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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게 피 남편이로다

출애굽기 4:18~31 구약 성경을 읽다보면, 도무지 그 문맥만으로는 이해하기 어려운 장면들을 만나게 된다. 발람의 저주(민수기 22장, 이 본문에선 동물이 말을 하는 진기한 장면이 나온다. 창세기에서 뱀이 하와에게 말을 건 장면 외엔 구약에선 유일하다)나 웃사의 죽음(사무엘하 6장) 등 여러 본문들이 성경을 진지하고 경건하게 대하는데 어려움을 주는 경우가 있다. 오늘 본문의 '피 남편'의 경우도 그렇다. 모세가 길을 가다가 숙소에 있을 때에 여호와께서 그를 만나서 그를 죽이려 하신지라 십보라가 돌칼을 가져다가 그의 아들의 포피를 베어 그의 발에 갖다 대며 이르되 당신은 참으로 내게 피 남편이로다 하니 여호와께서 그를 놓아 주시니라 그 때에 십보라가 피 남편이라 함은 할례 때문이었더라 (출애굽기 4장 2..

MIDBARR 2022.07.25

너희의 조상의 하나님

출애굽기 3:13-22 하나님의 산 호렙에서 모세는 하나님을 만난다. 그 만남은 불 붙은 떨기나무의 극적인 연출과 함께 신비로움을 더한다. 하나님은 말한다. 내가 애굽에 있는 내 백성의 고통을 분명히 보고 그들이 그들의 감독자로 말미암아 부르짖음을 듣고 그 근심을 알고 내가 내려가서 그들을 애굽인의 손에서 건져내고 그들을 그 땅에서 인도하여 아름답고 광대한 땅, 젖과 꿀이 흐르는 땅 곧 가나안 족속, 헷 족속, 아모리 족속, 브리스 족속, 히위 족속, 여부스 족속의 지방으로 데려가려 하노라 - 출애굽기 3:7~8 일곱 개의 동사로 이뤄진 하나님의 놀라운 이야기에 모세는 매료된다. 그 순간만큼은 도망자 신세로 척박한 미디안 광야에서 제 것도 아닌 장인의 가축을 돌보는 스스로의 신세를 깨닫지 못한다. 마치 ..

MIDBARR 2022.07.22

제목을 참 잘 찾아낸, 행복목욕탕(2016)

행복목욕탕 (湯を沸かすほどの熱い愛 : 물을 끓일 정도의 뜨거운 사랑, 2016) 지금껏 내가 본 일본영화는 대부분 작고 예쁜 소품들이 많았다. 보다 정확히 말하자면, '작고 예쁜 소품' 같은 영화가 보다 일본 영화스러웠고 다른 장르에 비해 영화로서의 재미가 있었다는 뜻이다. '러브레터', '립반윙클의 신부' 같은 이와이 슌지의 영화들이 그랬고 '안경', '카모메 식당' 같은 오기가미 나오코의 영화들이 그랬다. 침대 옆 작은 테이블 위에 올려두고 내내 보아도 질리지 않을 것 같은 영화들이다. 반면 인기드라마의 SP나 말도 안 되는 거대 스케일의 SF 영화들은, 세계 최강의 애니메이션 영화 리스트를 가진 나라치고는 시시하고 참담한 수준이다. 물론 이런 나의 편견의 이유가 표본이 너무 적은 탓도 있을 것이다...

REVIEW/MOVIE 2017.06.30

The Köln Concert

1975년 1월 24일. 밤새 내린 눈은 길위에 질척하게 얼어붙어 번쩍인다. 동쪽 숲에서 시작된 바람은 습기를 머금어 축축하다. 머플러를 단단히 동여보지만 틈새로 스며드는 한기를 막기란 쉽지 않다. 호텔을 나서니 좁은 오거리 길은 만난다. 호텔 앞을 가로지르는 Clever 스트리트를 따라 라인강을 왼편에 두고 걷는다. 차가 많지 않았고 도시는 고요했다. 이정표엔 'Theodor-Heuss-Ring'이라는 낯선 이국의 글자가 적혀 있다. 근처 공원의 이름인지, 아니며 그 공원을 순환하는 도로의 이름인지는 알 길이 없다. 테어도르 호이스 링, 발음이 좋아 몇 번 따라 불러 본다. 근처 아파트의 열린 창문으로 피아노 소리가 들린다. 아직 서툰 연주라서 곡은 난이도가 높은 마디에서 형편없이 느려진다. 바흐의 골..

REMEMBRANCE 2017.06.30

오후의 그늘

돌이켜 생각해보니, 난 당신에게 그늘이 되고 싶었나보다. 따가운 햇살이 당신의 가늘고 긴 뒷목에 빨갛게 내려 앉을 때 한줄기 바람처럼 서늘한 그늘이고 싶었나보다. 당신이 힘든 하루의 일과를 마치고, '힘들다'라는 말조차 꺼내기 어려워 손에 든 가방의 무게만큼 가만히 고개를 기대고 숨을 고를 수 있는 든든한 그늘이고 싶었나 보다. 가끔은 거센 파도처럼 마음을 할퀴는 눈물 앞에서 말없이 눈물을 받아주고 어깨를 토닥여주는 그늘이 되고 싶었나보다. 당신에게 필요한 것들이 나에게 있기를 바랬다. 당신에게 소중한 것 중에 내가 있기를 바랬다. 그 마음이 지나쳐 욕심이 되고, 미련한 욕심이 자라 때론 삐죽삐죽 튀어나온 입술이 되었을 때, 폭신폭신했던 처음의 기억이 온데간데 없고, 바싹 벼린 날이 뜨거운 심장을 헤집어..

REMEMBRANCE 2017.06.30

困而不學

困而不學, 民斯爲下矣 곤이불학, 민사위하의 논어에 나오는 이 한 구절에 오랫동안 눈이 멈췄다. 마치 타인이 내 삶을 훤히 들여다보는 듯한 부끄러움도 들었다. 공자는 '태어나면서부터 아는 것이 가장 높은 수준이다'라 말했다. 나로서는 요령부득의 일이라 '배워서 아는' 수준이라도 되고 싶다는 열망을 갖게 된다. 그러나 실제의 삶은 그 마저도 순탄치 않다. '곤경이 처하고 나서야 배우는'(困而學之) 수준이면 그나마 다행이다 싶다. 성경은 '고난'을 통해서 성장하는 믿음을 이야기한다. '환난'이 '인내'를 낳고 '인내'는 '연단'(character, 메시지 번역)을 낳는다. 즉 고난을 통해서 한 사람의 온전한 인격과 품성이 만들어질 수 있다는 것이다. 실제로 믿음의 조상들의 삶은 고난의 조상들의 삶이기도 했다...

REMEMBRANCE 2016.11.23

할매국밥

좀처럼 나는 부산과 인연이 없었다. 20여년 전, 맥도날드조차 하나 없던 시절 새벽 찬 바람을 맞으며 밤기차에서 내려본 것 말고는 부산을 딱히 경험한 적이 전혀 없었다. 그런데 2014년 초가을에 당시 맡은 일 때문에 부산엘 내려 가게 되었다. 바다를 가로지르는 광안대교를 봤고, 태어나 처음으로 여름이면 해변가득 세워둔 파라솔로 정작 모래가 보이지 않던 해운대의 바다를 봤다. 부산의 길은 혼잡했고 아파트가 높았다. 동서고가를 타고 목적지를 찾아가는 일은 네비게이션의 도움을 받아도 늘 아슬아슬한 좌회전과 우회전의 연속이었다. 가장 많이 들었던 안내음성이 '10시 방향 좌회전'이었다. 보통의 사거리와는 전혀 다른 갈림길이 눈앞에 있었다. 재빨리 머리속에 시계를 그려서 10시 어림쯤에 길을 찾아본다. 문제는 ..

REMEMBRANCE 2016.02.14

겨울소감

납전삼백(臘前三白)이면 그해 풍년이 든다던데, 올해는 푸짐하게 내렸던 초설 이후 거의 눈 다운 눈을 만나지 못하고 섣달 그믐이 지난 지금까지 이백(二白)도 온전히 채우지 못했으니, 40년 만의 가뭄이란 말이 영 허언은 아니었던 것 같다. 나흘간 정상적인 식사를 거르고 닷새 째에 미음으로 위장을 채운 뒤, 갑자기 기름진 음식을 집어 넣은 탓인지 속은 내내 편하지 않다. 하긴 이미 속이 편하지 않아 음식을 삼키지 못한 것이니 딱히 음식탓이라 말하기도 어렵다. 2016년을 와신상담의 해로 세모에 기록했으나, 정작 와신하고 상담할 일이 무엇일까 생각하지 않았다는 미흡함에 자책한다. 늘 마음이 생각을 앞지르고 생각이 그 다음을 앞지르는 어리석음이 있었다. 올해는 그런 어리석음으로 조금이라도 덜어보자 생각했다. 그..

REMEMBRANCE 2016.02.08

주말의 소파

몇년 간 출근과 퇴근이 선명한 일을 반복하다보니 주말의 귀함을 알게 되었다. 비록 주말에도 정해진 출퇴근과 업무가 있기 때문에 그 기분을 만끽하기란 쉽지 않지만 그래도 주말은 주말이었다. 꿀맛 같은 졸음에 저 멀리서 들리는 알람 소리를 가까이 끌어당기지 않아도 되고, 비좁은 사람들의 마음이 좁은 공간만큼이나 가깝게 다가오는 출근 지하철의 혼잡함을 견디지 않아도 된다. 사람이 살아가기에 어쩔 수 없는 소음과 냄새를 참아내기 어려울 때가 가끔 있다. 이것이 바로 삶이고 굳게 두 발 디딘 현실이라 생각해도 종내 마음 끝이 무뎌지지 않는 일들이 가끔 있다. 주말에는, 그 날선 마음을 잠시 잊는다. 월요일 아침 7시 40분, 왕십리를 출발하는 분당선 지하철 안에서 고스란히 다시 살아나게 될 마음이라도 주말에는 잊..

REMEMBRANCE 2016.01.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