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MEMBRANCE

주말의 소파

mimnesko 2016. 1. 3. 01:41

 

 

몇년 간 출근과 퇴근이 선명한 일을 반복하다보니 주말의 귀함을 알게 되었다. 비록 주말에도 정해진 출퇴근과 업무가 있기 때문에 그 기분을 만끽하기란 쉽지 않지만 그래도 주말은 주말이었다. 꿀맛 같은 졸음에 저 멀리서 들리는 알람 소리를 가까이 끌어당기지 않아도 되고, 비좁은 사람들의 마음이 좁은 공간만큼이나 가깝게 다가오는 출근 지하철의 혼잡함을 견디지 않아도 된다. 사람이 살아가기에 어쩔 수 없는 소음과 냄새를 참아내기 어려울 때가 가끔 있다. 이것이 바로 삶이고 굳게 두 발 디딘 현실이라 생각해도 종내 마음 끝이 무뎌지지 않는 일들이 가끔 있다. 주말에는, 그 날선 마음을 잠시 잊는다.

월요일 아침 7시 40분, 왕십리를 출발하는 분당선 지하철 안에서 고스란히 다시 살아나게 될 마음이라도 주말에는 잊을 수 있다. 그 귀함을 알고 느끼고 온 세포마다, 뼈의 마디마디마다 알려주는 일상이 있기에 주말은 참 귀하다.

 

나는 가급적 주말에는 혼잡한 시내에는 얼씬도 하지 않는다. 마트나 백화점, 서점도 피한다. 동네 슈퍼에서 구할 수 있는 것들로 만족하며 겨우내 양식을 그러모은 다람쥐처럼 조용히 사각거리며 지낸다. 주말에도 평일과 같은 피곤함을 자처하는 사람들이야 있겠냐마는, 어쩔 수 없는 일들도 있는 것이다. 누구에겐 평일이 주말 같고 또 누구에겐 주말이 평일 같을 것이다. 그래서 주말에는 평일엔 멀쩡하던 시간에 멀쩡하던 길이 막힌다. 집 근처 도로엔 관광객을 실어나르는 관광버스가 줄 지어 길 옆 가장자리 차선을 차지한다. 차선 하나를 양보한 길은 평일보다 더 비좁아진다. 미숙한 운전의 차들이 많아진다. 5일을 벼르던 외출길일 수도 있다. 먼 지인의 결혼식에 참석하기 위해 생경한 도로를 운전하는 중일 수도 있다. 이유는 수만 가지이고 길은 막힌다. 평일의 단조로움과는 전혀 다른 종류의 번잡함이 도로며 상점이며, 도심을 채운다.

 

개인적인 이유로 출퇴근 하던 일을 정리한 뒤에도 이 여운은 오래 갔다.

맘 먹으면 평일이 주말처럼, 또 주말이 평일처럼 바뀔 수도 있었지만 습관은 깊었고 생각보단 몸이 익숙해졌다. 약간의 늦잠이 생긴 것 외에 별반 다름없는 일상이 이어지고, 다시 주말이 찾아왔다. 이젠 주말을 바쁘게 하던 일마저도 없앴다. 한편으로는 걱정스러운 일이었지만, 익숙함으로 남아있는 관성의 습관들이 그 걱정을 잠깐씩 잊게 해 준다.

 

주말에는, 하며 다짐했던 일들이 평일에 많았지만 정작 주말이 찾아오면 그 짧은 48시간에 채울 수 없는 일들은 일찌감치 포기한다. 장시간의 운전은 힘들고, 또 길이 막혀 더 피곤해 진다. 쇼핑은 주말의 미덕이 아니다. 보고 싶던 영화들을 주말에 보기 위해 시내 한 복판으로 나선다는 것은 멍청한 짓이다. 도심은 사람으로, 외곽은 차로 넘치는 시간에 차를 가지고 움직일 필요가 있을까?

이유가 많아지고 대답이 많아지면 집에서 늘어질 시간이 길어진다.

결국 이번 주말에도 지난 주부터 내내 손에 있었지만 아직 반도 더 남은 책을 읽기로 했다. 한 시간 남짓하던 출퇴근도 이젠 없기에 책읽는 시간을 따로 만들어야만 했다. 꼭 주말일 필요는 없었지만, 주말에 해보기로 했다.

 

주말은 누군가의 자리를 얌전히 기다리는 거실의 '소파'처럼 평일의 나를 매료시켰다. 평일에는 혼잡한 출퇴근 길에 주말의 푹신한 주말의 소파를 그리워했고, 주말이면 그 안온함에서 떨어져 나가는 것을 두려워했다. 주말과 평일의 경계가 사라진 후에도 주말의 소파, 라는 이미지는 명료하고 구체적이었다. 소파의 재질이며 그 질감도 선명했다. 쿠션의 적당함이나 컬러와 패턴도 손에 잡힐 듯 가까웠다. 그러나 단 한 번도 그 소파가 현실에 존재할 것이라곤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어디까지나 상상의 소파였고, 상상의 안온함이었으며, 상상의 쿠션이었다. 평일을 견디게 해주는 오아시스와도 같은 힘이었다. 실제로 집에 소파가 없는 나로서는 주말 그 자체를 펑퍼짐한 소파로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온 몸의 불필요한 힘들이 스르르 빠져나가는 이완의 효과가 있었다.

 

그래서 일 때문에 방문한 어느 쇼룸에서 발견한 소파에 그만 발걸음이 멈추고 말았다.

'주말의 소파'였다.

두 말 할 나위 없이 그것은 주말의 재질이었고 주말의 촉감이었다. 스텝의 양해를 구하고 잠시 앉아보았는데 주말의 쿠션이었고 주말의 안온함이었다. 눈 앞의 소파는 주말의 시니피에(signifie)였고, 랑그(Langue)였다. 하루키적으로 말하자면 레종데뜨르쯤 될까? 사진을 찍어 모니터에 옮겨놓고 보니 주말이 현현한 셈이 되어 버렸다. 이전의 애틋함은 사라져버렸지만 주말의 질감과 느낌은 사진의 현실성만큼이나 절절하게 차고 넘쳤다. 그래서 5일이면 어김없이 돌아오는 주말의 재림을 더 이상 애타게 기다리지 않아도 되는 불손한 신자가 되어버리고 말았다. 손에 잡힐 듯 선명한 이미지가 오히려 주말의 이미지를 훼손하는 기이한 경험도 했다.

 

그래서 사진을 남긴다. 누군가 나와 같이 주말의 소파를 상상했다면, 그것은 존재하지 않지만 기능하는 '생각하는 의자'와 같이, 절대로 그 소파를 만나지 말기를 바란다. 혹은 만나더라도 전의식적으로 맹렬히 거부해야 한다. 프로이드가 예언했고, 실존의 소파가 증명해 버린 무의식의 나락으로 주말의 소파가 던져지지 않도록 맹렬히, 맹렬히 갈구해야 한다.

 

F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