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MOVIE

제목을 참 잘 찾아낸, 행복목욕탕(2016)

mimnesko 2017. 6. 30. 16:26

 

행복목욕탕 (湯を沸かすほどの熱い愛 : 물을 끓일 정도의 뜨거운 사랑, 2016)

 

 

지금껏 내가 본 일본영화는 대부분 작고 예쁜 소품들이 많았다. 보다 정확히 말하자면, '작고 예쁜 소품' 같은 영화가 보다 일본 영화스러웠고 다른 장르에 비해 영화로서의 재미가 있었다는 뜻이다. '러브레터', '립반윙클의 신부' 같은 이와이 슌지의 영화들이 그랬고 '안경', '카모메 식당' 같은 오기가미 나오코의 영화들이 그랬다. 침대 옆 작은 테이블 위에 올려두고 내내 보아도 질리지 않을 것 같은 영화들이다. 반면 인기드라마의 SP나 말도 안 되는 거대 스케일의 SF 영화들은, 세계 최강의 애니메이션 영화 리스트를 가진 나라치고는 시시하고 참담한 수준이다.

 

물론 이런 나의 편견의 이유가 표본이 너무 적은 탓도 있을 것이다. 하필 내 손에 걸린 영화들이 죄다 그런 영화였거나, 수입사 측에서 '잘 팔리는 일본 영화는 주로 이런 거......'라는 얼토당토 않는 이유로 편협한 영화를 선별하여 수입했을 가능성도 없지 않기 때문이다. 막상 일본에 가니 깜짝 놀랄만큼 재밌는 영화들을 곳곳에서 상영하고 있더라, 라는 전혀 의외의 상황을 만날 가능성도 얼마든지 있다는 이야기. 그러나 내가 사는 곳은 어쨌든 일본이 아니기에, 주어진 작은 정보 안에서 나름의 만족을 찾아야만 한다. 슬프게도...

 

나카노 료타의 '행복목욕탕'은 역시 작고 예쁜 소품 같은 영화라는 점에서 익숙한 일본 영화이다. 그러나 울림이 있는 무거운 추를 함께 달고 있다는 점에선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그렇게 아버지가 된다'나 '바닷마을 다이어리'를 연상하게 한다. 무엇보다 배우들의 연기가 단연 눈에 띈다. 좀 엉뚱한 생각이겠지만, 영화를 보는 내내 정말 저 사람이 19살 때 '산타페'라는 누드 화보집을 내서 엄청난 화제가 되었던 '리에'가 맞는지 깜짝 놀라게 된다. 그녀는 죽음을 앞 둔 환자를 연기하기 위해 실제로 단기간에 6킬로그램 가까운 체중감량을 하는 투혼의 연기를 보여주었다. 덕분에 미야자와 리에는 이 영화로 2017년 일본 아카데미의 여우주연상을 수상했다.


 

 

'주인이 수증기처럼 증발해 버려서, 당분간 목욕탕 영업을 중지합니다.'라는 메모와 함께 억척스레 생활을 이어가는 모녀의 아침식사로 영화가 시작된다. 엄마(후타바)는 사정이 이렇게 되었지만, 그렇다고 다른 사람들이 사정 봐주는 건 아니야, 라는 식의 단단한 삶의 태도로 생활비를 마련하여 근근이 살아간다.

 

남편(도망가버렸다)이 가업으로 이어받은 목욕탕은 '가족'의 전형적인 은유로 등장하지만, 목욕탕이 문을 닫음으로써 가족의 정상적인 기능은 시작부터 봉쇄되었다. 왜 남편이 갑자기 증발해 버렸는지 그리고 다시 가족으로서 회복 가능성이 존재하는지, 라는 자연스런 질문이 뒤따르는데 영화는 연기가 나지 않는 목욕탕의 마른 굴뚝을 보여주며 그 해답을 찾아가는 여정과 목욕탕의 회복이 크게 다르지 않음을 암시한다.

 

뜻밖의 이유로 가족은 분열되었지만 가족의 삶은 계속된다.

살아가는 일의 메마름은 딸(아즈미)의 학교 생활에서도 발견된다. 부모에게는 부모의 문제가 있고 자녀에게는 자녀의 문제가 있는 것이다. 생각해 보면 삶이란 결국 여러 계층의 문제들이 수납된 큰 서랍인 셈이다. 아즈미는 학교의 몇몇 아이들에게 노골적인 따돌림(이지메)을 당하면서도 감춰진 폭력에 대해 수용적인 태도를 갖는다. 그 이유가 아즈미의 '유전적' 성격 때문인지 아니면 꽤 오랫동안 지속된 듯 보이는 폭력에 이미 체념하게 되어 버린 탓인지는 선명하게 드러나지 않는다. 아즈미의 기울어진 학교생활은 외발로 자전거를 타듯 위태롭게 삶을 이어가던 엄마에게 가슴 아프게 전해진다.

 

가족의 재구성이라는 영화의 시각이 전체적이라면, 헐레벌떡 학교로 달려와 양호실 문앞에서 몇 번이나 숨을 고르며 얼굴을 펴는 엄마의 마음은 찌르르한 고통으로 어디까지나 개별적이다. 고통은 개별적이기에 필연적으로 소외를 부른다. 아빠의 부재와 가업의 중단으로 깨진 가정은 필연적으로 엄마와 딸에게 고스란히 상처를 남겼는데, 둘 중 누구도 그걸 인정하지 않고 서로에게 조금씩 거리를 두며 소외되고 있었던 것이다. 


 

 

다소 과격하다고 할만큼 돌발적인 행동으로 지긋지긋한 이지메를 벗어난 아즈미는 그 이유를 엄마의 유전자에서 찾았다. 승리의 트로피 같은 교복을 입고 돌아오는 딸의 모습과 그 모습을 바라보는 엄마의 눈 속에 마침내 작은 위로가 발견되고 가족이 회복될 수 있으리라는 작은 희망이 생겨난다.

 

결국 후타바는 남편 없이 목욕탕을 다시 열기로 결심한다.

오래 비워뒀던 목욕탕을 깨끗이 청소하면서 가족의 새로운 희망을 갖고자 애쓴다. 마치 딸이 교복이 '트로피'였던 것처럼, 그녀에게는 정상적으로 기능하는 '목욕탕'이 바로 트로피였고 그녀가 지키고자 애썼던 가족의 외껍질이기 때문이다. 비록 남편의 자리는 공석이겠지만, 최소한의 구성원으로도 여전히 가족이 견고할 수 있다는 신념에 남편의 또 다른 아이까지 기꺼이 데려올 수 있었던 것이다. 그것은 집념이고 용기였다. 다시 마른 굴뚝에 연기가 피어 오르고 삶은 행복에 조금 더 가까워질 수도 있겠구나, 라는 희망을 갖게 된다.

 

그러나 삶은 그녀에게 그렇게 단순하지 않았다. 희망이 있는 곳에는 늘 절망이 가까웠다. 절망이 있기에 사람은 누구나 희망을 꿈꾼다는 말은 가차없는 빈말일 뿐이다. 절망은 애써 '가족'이라는 한 묶음의 사람들을 낱낱이 개별화한다. 그러기에 삶은 마치 얇은 계란 껍질처럼 조심스럽기만 하고 '행복'은 좀처럼 도달하기 어려운 높은 산 꼭대기의 깃발처럼 휘날린다.

 

 

 

과연 가족은 구성원의 총합인가?

또 그 구성원은 반드시 동일한 '유전자'를 나누고 있어야 하는가?

가족과 행복은 어떤 상관관계를 갖는가?

 

후타바가 가장 원했던 것은 온전한 형태의 가족이었다. 그녀가 원하는 가족은 생물학적인 결합체로서가 아니라 '행복'을 지향하는 '사랑'으로 단단히 묶여있는 공동체이자 따스한 열기로 서로를 보듬어줄 수 있는 공동체를 의미했다. 그래서 생면부지의 아이조차 딸로 기꺼이 받아들일 수 있었고,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딸에게 자신의 유전자를 물려줄 수 있었던 것이다. 다시 돌이켜 생각해보면 이 해괴한 구성의 가족에서 유일하게 생물학적 연관고리가 없는 사람이 바로 '후타바'이다. 흔히 가족을 구성하는 단단한 DNA 사슬 대신 행복을 향한 마음, 혹은 사랑이 콩가루로 진즉 흩어졌을 가족을 지탱하고 붙잡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기에 후타바의 죽음은 이 아슬아슬한 가족의 또다른 해체를 예감하게 한다. 못난 남편(오다기리 조)이 아이들과 함께 만든(?) 생일 케이크는 사랑이라는 굵고 든든한 끈이 울타리로 만들어낸 또 다른 가족의 모습이었다. 어쨌든 후타바는 그 모습을 믿고 의지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남편에게 마지막 유언으로 엉뚱한 부탁을 한다.

 

영화의 원제가 "물을 끓일 정도로 뜨거운 사랑"이다. 이것은 영화가 가족을 암시했던 '목욕탕'의 술어적 표현이며 동시에 후타바의 사랑을 고스란히 옮겨낸 것이기도 하다. 생물학적 관련이 전무한 완벽한 '타자'로서 후타바는 자신의 몸을 온전히 녹여가족과 하나가 되는 길을 선택한 것이다. 그 열기와 온기, 이마에 송글송글 땀을 맺게 하는 것이 바로 후타바 자신이었고 가족에 대한 무한한 긍정과 사랑이었기 때문이다.

 

_

 

영화의 해석은 온전히 관객의 몫이기 때문에, 때론 준비된 답변이 기대에 턱없이 부족한 경우도 있겠고 또 지나치게 상세해서 오히려 거부감이 생길 수도 있다. 개인적인 생각으로 이 영화는 전자에 가깝다. 두 번째 장편 연출이라는 감독의 이력에 어울리지 않을만큼 꽤 훌륭하게 '평범하기 이를 데 없는' 가족 이야기를 이어 나갔다. 다만 러닝타임 내내 균일하게 느껴지지 않는 연출의 힘이 살짝 아쉽게 느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