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MEMBRANCE 91

오후의 그늘

돌이켜 생각해보니, 난 당신에게 그늘이 되고 싶었나보다. 따가운 햇살이 당신의 가늘고 긴 뒷목에 빨갛게 내려 앉을 때 한줄기 바람처럼 서늘한 그늘이고 싶었나보다. 당신이 힘든 하루의 일과를 마치고, '힘들다'라는 말조차 꺼내기 어려워 손에 든 가방의 무게만큼 가만히 고개를 기대고 숨을 고를 수 있는 든든한 그늘이고 싶었나 보다. 가끔은 거센 파도처럼 마음을 할퀴는 눈물 앞에서 말없이 눈물을 받아주고 어깨를 토닥여주는 그늘이 되고 싶었나보다. 당신에게 필요한 것들이 나에게 있기를 바랬다. 당신에게 소중한 것 중에 내가 있기를 바랬다. 그 마음이 지나쳐 욕심이 되고, 미련한 욕심이 자라 때론 삐죽삐죽 튀어나온 입술이 되었을 때, 폭신폭신했던 처음의 기억이 온데간데 없고, 바싹 벼린 날이 뜨거운 심장을 헤집어..

REMEMBRANCE 2017.06.30

困而不學

困而不學, 民斯爲下矣 곤이불학, 민사위하의 논어에 나오는 이 한 구절에 오랫동안 눈이 멈췄다. 마치 타인이 내 삶을 훤히 들여다보는 듯한 부끄러움도 들었다. 공자는 '태어나면서부터 아는 것이 가장 높은 수준이다'라 말했다. 나로서는 요령부득의 일이라 '배워서 아는' 수준이라도 되고 싶다는 열망을 갖게 된다. 그러나 실제의 삶은 그 마저도 순탄치 않다. '곤경이 처하고 나서야 배우는'(困而學之) 수준이면 그나마 다행이다 싶다. 성경은 '고난'을 통해서 성장하는 믿음을 이야기한다. '환난'이 '인내'를 낳고 '인내'는 '연단'(character, 메시지 번역)을 낳는다. 즉 고난을 통해서 한 사람의 온전한 인격과 품성이 만들어질 수 있다는 것이다. 실제로 믿음의 조상들의 삶은 고난의 조상들의 삶이기도 했다...

REMEMBRANCE 2016.11.23

할매국밥

좀처럼 나는 부산과 인연이 없었다. 20여년 전, 맥도날드조차 하나 없던 시절 새벽 찬 바람을 맞으며 밤기차에서 내려본 것 말고는 부산을 딱히 경험한 적이 전혀 없었다. 그런데 2014년 초가을에 당시 맡은 일 때문에 부산엘 내려 가게 되었다. 바다를 가로지르는 광안대교를 봤고, 태어나 처음으로 여름이면 해변가득 세워둔 파라솔로 정작 모래가 보이지 않던 해운대의 바다를 봤다. 부산의 길은 혼잡했고 아파트가 높았다. 동서고가를 타고 목적지를 찾아가는 일은 네비게이션의 도움을 받아도 늘 아슬아슬한 좌회전과 우회전의 연속이었다. 가장 많이 들었던 안내음성이 '10시 방향 좌회전'이었다. 보통의 사거리와는 전혀 다른 갈림길이 눈앞에 있었다. 재빨리 머리속에 시계를 그려서 10시 어림쯤에 길을 찾아본다. 문제는 ..

REMEMBRANCE 2016.02.14

겨울소감

납전삼백(臘前三白)이면 그해 풍년이 든다던데, 올해는 푸짐하게 내렸던 초설 이후 거의 눈 다운 눈을 만나지 못하고 섣달 그믐이 지난 지금까지 이백(二白)도 온전히 채우지 못했으니, 40년 만의 가뭄이란 말이 영 허언은 아니었던 것 같다. 나흘간 정상적인 식사를 거르고 닷새 째에 미음으로 위장을 채운 뒤, 갑자기 기름진 음식을 집어 넣은 탓인지 속은 내내 편하지 않다. 하긴 이미 속이 편하지 않아 음식을 삼키지 못한 것이니 딱히 음식탓이라 말하기도 어렵다. 2016년을 와신상담의 해로 세모에 기록했으나, 정작 와신하고 상담할 일이 무엇일까 생각하지 않았다는 미흡함에 자책한다. 늘 마음이 생각을 앞지르고 생각이 그 다음을 앞지르는 어리석음이 있었다. 올해는 그런 어리석음으로 조금이라도 덜어보자 생각했다. 그..

REMEMBRANCE 2016.02.08

주말의 소파

몇년 간 출근과 퇴근이 선명한 일을 반복하다보니 주말의 귀함을 알게 되었다. 비록 주말에도 정해진 출퇴근과 업무가 있기 때문에 그 기분을 만끽하기란 쉽지 않지만 그래도 주말은 주말이었다. 꿀맛 같은 졸음에 저 멀리서 들리는 알람 소리를 가까이 끌어당기지 않아도 되고, 비좁은 사람들의 마음이 좁은 공간만큼이나 가깝게 다가오는 출근 지하철의 혼잡함을 견디지 않아도 된다. 사람이 살아가기에 어쩔 수 없는 소음과 냄새를 참아내기 어려울 때가 가끔 있다. 이것이 바로 삶이고 굳게 두 발 디딘 현실이라 생각해도 종내 마음 끝이 무뎌지지 않는 일들이 가끔 있다. 주말에는, 그 날선 마음을 잠시 잊는다. 월요일 아침 7시 40분, 왕십리를 출발하는 분당선 지하철 안에서 고스란히 다시 살아나게 될 마음이라도 주말에는 잊..

REMEMBRANCE 2016.01.03

오랜만의 라이딩

이런 저런 생각이 많을 때 라이딩만큼 좋은 게 없다. 한 시간 남짓 28km의 거리를 달려 숨이 턱까지 차오르는 호흡을 반복하다 보면, 비로소 한강의 서늘한 가을 바람이 느껴지고, 저 멀리 양화대교가 보인다. 고민하던 일들이 다 뭐였다 싶고 그동안 쉰 덕에 바닥까지 떨어진 체력을 새삼 실감하며 기분좋게 피곤해졌다. 그래, 더운 물로 샤워를 하자. 내일 일은, 내일 고민하면 된다. Fin.

REMEMBRANCE 2015.10.22

[연극] 햇빛샤워

효선이가 강력하게 추천했던 연극을 가까스로 보았다. 종연 하루 전이기도 했고, 낮부터 하루종일 비가 내리기도 했고, 인터넷 예약이 안 되어서 전화로 겨우겨우 예약을 하기도 했고, 하필 그 예약한 자리가 더블이 나서(기다리다 보니 더블 부킹이 된 좌석이 적지 않아 보였다. 자리를 안내하던 직원들은 '전산상의 이유'라고 설명했는데, 그건 종종 의사들이 '신경성'이라고 말하는 것과 흡사한 일이다) 예약과는 달리 좀 엉뚱한 자리에서 보기도 했기 때문에 '가까스로'라고 이야기하는 것이다. 극단 이와삼의 장우재 대표가 자신이 쓴 희곡을 직접 연출했다. 효선이의 이야기처럼 배우들의 연기는 훌륭했고, 가변적으로 움직이는 무대의 연출 역시 훌륭했다. 씽크홀, 이라는 말이 조금 진부하게 느껴졌지만, 말 그대로 씽크(sin..

REMEMBRANCE 2015.07.29

달팽이

Sony RX-1 Carl Zeiss T* 35mm F2.0 어쩌다보니 달팽이가 네 마리나 생겼다. 사실 알(달팽이가 알에서 태어난다는 것도 처음 알게 되었습니다)은 6개를 분양받았는데 막상 부화를 시켜놓고 세어보니 네 마리다. 다른 두 마리의 행적에 대해선 아직도 묘연하다. 나머지 네 마리가 맛있게 냠냠 먹어버렸다는 설도 있는데, 달팽이는 대부분 '채식주의자'가 아니었나? 하는 생각에 쉽게 동의하기가 어렵다. 그럼 도대체 두 마리는 어디로 가버린 걸까? 모두들 잠든 깊은 밤에 임시로 만들어 놓은 집을 몰래 빠져나와 먼 여행이라도 떠난게 아닐까? 마치 수많은 위험을 무릅쓰고 모래톱에서 바다를 향해 기어가는 꼬마 거북이들처럼, 밤마다 사그락 사그락 열심히 몸을 움직이면서 창틈이며 벽 사이를 기어가는 달팽이..

REMEMBRANCE 2015.07.05

클릿페달 적응 중...

iPhone5 최근에 자전거를 점검하면서 페달을 교체했다. 지금은 일본에서 알콩달콩 보내고 있는 Tim에게 양도받은 Look 클릿을 내내 보관만 하고 있다가, 일단 설치라도 해보자는 마음으로 바이크 클리닉 미캐닉에게 부탁을 드렸다. "전에 클릿 페달 사용해 본 적 없으시죠?" "...네." 그러자 미캐닉이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그리곤 손가락을 세 개 펴서 나에게 보여 주며 말했다. "세 번은 넘어지실 거에요." "...네?" "클릿페달은 세 번은 제대로 넘어져야 적응한다는 뜻이죠. 저도 세 번 넘어졌어요." 이미 제대로 한 번 넘어지고 난 뒤라 가뜩이나 풀이 죽어 있었는데 이런 먹구름 가득한 예언이라니! 내가 자전거를 안고 넘어지는 걸 상상해 보면 된다. 실제로 최근에 제대로(?) 넘어질 때에도 나..

REMEMBRANCE 2015.07.03

순진한 기독교 : 이야기를 시작하며...

중세를 암흑의 시기로 보는 것은 다분히 인본주의자들의 시선이다. 교황의 절대적인 권력 아래 합리적인 사고와 판단이 실종된 중세시대는 흑사병으로 유럽 인구의 2/3이 죽고 나서야 비로소 막을 내리게 된다, 는 식의 접근이다. 이렇게 생각하면 꽤 우울한 그림이 연상되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기도 하다. 하지만 '신본주의자'들의 입장에선 오히려 이 시기야말로 어떤 혼란과 혼돈이 없던 매우 선명한 시기였을 것이다. 자연스러운 질문조차 거세된 삶은 단순하고 질서 정연할 수밖에 없다. 모든 이유는 종교적인 판단으로 귀결된다. 즉 반론의 여지가 없다. 이 얼마나 명쾌하고 즐거운가. 단순무식이라는 말이 있는 것처럼 단순하고 무식한 것에는 결코 적지 않은 '힘'이 있다. 다양성과 단순함의 싸움이라면 그건 해보나 마나한 ..

REMEMBRANCE 2015.06.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