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IDBARR

작은 자 중의 하나

mimnesko 2023. 3. 8. 07:00
마태복음 18:11~20

11 (없음)
12 너희 생각에는 어떠하냐 만일 어떤 사람이 양 백 마리가 있는데 그 중의 하나가 길을 잃었으면 그 아흔아홉 마리를 산에 두고 가서 길 잃은 양을 찾지 않겠느냐
13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만일 찾으면 길을 잃지 아니한 아흔아홉 마리보다 이것을 더 기뻐하리라
14 이와 같이 이 작은 자 중의 하나라도 잃는 것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뜻이 아니니라
15 네 형제가 죄를 범하거든 가서 너와 그 사람과만 상대하여 권고하라 만일 들으면 네가 네 형제를 얻은 것이요
16 만일 듣지 않거든 한두 사람을 데리고 가서 두세 증인의 입으로 말마다 확증하게 하라
17 만일 그들의 말도 듣지 않거든 교회에 말하고 교회의 말도 듣지 않거든 이방인과 세리와 같이 여기라
18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무엇이든지 너희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
19 진실로 다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중의 두 사람이 땅에서 합심하여 무엇이든지 구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그들을 위하여 이루게 하시리라
20 두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

 

몇 해 전, 잘 아는 목사님이 교회를 개척했습니다. 상가 내 작은 교회였는데 그 이름이 독특했습니다. "물방울교회".

작은 물방울들이 모여 마침내 발목을 적시고 무릎을 채우며 큰 줄기의 물을 이루는 에스겔의 환상(겔 47:1~6)이 떠오르는 멋진 이름이라고 감탄했습니다. 물방울교회의 귀한 사역들이 그렇게 성장하기를 소망하고 바랐습니다. 

생각해보면, 우리는 '작은 것'들의 가치를 쉽게 저버릴 때가 많습니다. 물방울이 모여 결국 큰 강을 이룬다는 말도 그 방점은 '큰 강'에 놓일 때가 많습니다. 사실 큰 강을 이루기 위해선 낱개의 물방울들이 중요하다는 것이 이 말의 핵심인데 그렇게 듣지도 보지도 않습니다. 오히려 물방울이 모인다 한들 그게 큰 강을 이루지 못하면 무슨 소용인가. 결과가 중요하다. 큰 강이 되어야만 그 낱개의 물방울도 가치가 있는 것이 아닌가, 라는 희한한 논리를 만들어내곤 합니다. 이것을 '성장주의'라고 합니다. 

 

교회 공동체가 '성장주의'에 매몰(정말이지 '매몰'이라는 단어가 딱입니다)되면 작은 물방울과 같은 한 분 한 분의 성도들은 그리 중요하게 여기지 않습니다. 성도들은 구역이나 교구라는 '묶음'으로만 존재하게 됩니다. 소그룹 모임 역시 그 자체가 목적이라기보다는 전체를 위한 부분으로서만 존재하게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대부분의 목회자들이 인정하는 것처럼 한 사람의 목회자가 성심을 다해 돌볼 수 있는 공동체의 크기는 300여 명이 최대치입니다. 300여 명의 성도님들과 공동체를 이루며 함께 어우러지는 것은 생각만해도 아름답고 멋진 일이지요. 그러나 '성장주의'의 매몰된 교회는 그 300명의 성도를 '시드'처럼 생각합니다. 아름답게 표현하면 '마중물'이고 못 되게 표현하면 '종잣돈'입니다. 오로지 성장을 목표로만 교회의 모든 구호, 모든 시스템이 조정됩니다. 성장에 방해가 되는 요소(역설적이지만, 교회학교가 대표적입니다)는 과감히 축소합니다. 전도집회나 특별새벽기도회가 시도 때도 없이 만들어집니다. 

 

문제는 이런 '성장주의' 일변의 드라이브는 필연적으로 구성원의 이탈과 낙심을 유발한다는 것입니다. "우리 교회가 좀 변한 거 같아". "왜 이렇게까지 하시는 거지?" 질문은 무성하지만 딱히 표현할 곳은 마땅치 않습니다. 우리가 앞선 말씀에서 '실족'을 살펴본 것이 바로 이런 이유였습니다. 아흔아홉 마리의 양으로 '종잣돈'을 삼은 목자에겐 '잃어버린 한 마리 양'은 '기회 비용'처럼 보입니다. "그래 어차피 다 데려갈 수는 없는 거야. 대신 아흔아홉 마리가 곧 삼백 마리가 되면 되는 거지." 더불어 그 하나를 찾기 위해 아흔아홉을 무방비의 상태로 두는 것을 '무책임함'이라고 여기게 됩니다. 그런 일이 '성장주의'에 매몰된 교회에서 빈번하게 발생합니다. 그럼 어떻게 해야할까요?

 

당장 그 위험한 공동체에서 나와야 합니다. 스스로 잃어버린 한 마리가 되어야 합니다.

물방울 한 방울의 중요성을 이해하고 소중히 여기는 공동체, 스스로의 한계를 명확히 규정하고 '탈성장'의 가치를 높이 여기는 교회 공동체로 옮겨야만 합니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성도들은 물방울 하나보다 더욱 가치 있습니다. 예수님은 그 하나를 찾기 위해 아흔아홉의 안전을 포기하셨습니다. 그 번영과 성장을 외면하셨습니다. 왜냐하면 교회 공동체가 원래 '작은 자'들의 공동체이기 때문입니다. 그 '작은 자 중의 하나'를 더욱 귀하게 여기는 곳이 바로 하나님 나라입니다. 

 

 

이와 같이 이 작은 자 중의 하나라도 잃는 것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뜻이 아니니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