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IDBARR

능히 고치지 못하더이다

mimnesko 2023. 3. 6. 10:05
- 마태복음 17:14~27

14 그들이 무리에게 이르매 한 사람이 예수께 와서 꿇어 엎드려 이르되
15 주여 내 아들을 불쌍히 여기소서 그가 간질로 심히 고생하여 자주 불에도 넘어지며 물에도 넘어지는지라
16 내가 주의 제자들에게 데리고 왔으나 능히 고치지 못하더이다
17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믿음이 없고 패역한 세대여 내가 얼마나 너희와 함께 있으며 얼마나 너희에게 참으리요 그를 이리로 데려오라 하시니라
18 이에 예수께서 꾸짖으시니 귀신이 나가고 아이가 그 때부터 나으니라
19 이 때에 제자들이 조용히 예수께 나아와 이르되 우리는 어찌하여 쫓아내지 못하였나이까
20 이르시되 너희 믿음이 작은 까닭이니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만일 너희에게 믿음이 겨자씨 한 알 만큼만 있어도 이 산을 명하여 여기서 저기로 옮겨지라 하면 옮겨질 것이요 또 너희가 못할 것이 없으리라
21 (없음)
22 갈릴리에 모일 때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인자가 장차 사람들의 손에 넘겨져
23 죽임을 당하고 제삼일에 살아나리라 하시니 제자들이 매우 근심하더라
24 가버나움에 이르니 반 세겔 받는 자들이 베드로에게 나아와 이르되 너의 선생은 반 세겔을 내지 아니하느냐
25 이르되 내신다 하고 집에 들어가니 예수께서 먼저 이르시되 시몬아 네 생각은 어떠하냐 세상 임금들이 누구에게 관세와 국세를 받느냐 자기 아들에게냐 타인에게냐
26 베드로가 이르되 타인에게니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그렇다면 아들들은 세를 면하리라
27 그러나 우리가 그들이 실족하지 않게 하기 위하여 네가 바다에 가서 낚시를 던져 먼저 오르는 고기를 가져 입을 열면 돈 한 세겔을 얻을 것이니 가져다가 나와 너를 위하여 주라 하시니라

 

빈센트 반 고흐(Vincent Willem van Gogh)의 생애는 '불모하다(barrenness)'라는 한 단어로 응축될 수 있습니다.

지금은 설령 그의 이름은 모르더라도 그의 그림을 모르는 사람은 없을 정도로 유명한 화가이지만 그의 삶을 돌아보면 '유명함'이나 '부유함'이라곤 눈을 씻고 찾아볼 길이 없습니다. 그가 생전에 판매한 자신의 그림은 한 점에 불과했습니다. 아무도 고흐의 그림에는 진지한 관심을 갖지 않은 것처럼 보였습니다. 심지어 고흐 자신도 편지에 이런 글을 남길 정도였습니다. 

 

"내 작품이 팔리지 않아도 어쩔 수 없지. 그렇지만 언젠가는 사람들도 내 그림이 거기에 사용한 물감보다, 내 인생보다 더한 가치가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될 거야."

 

사실 고흐에 대해 잘 알려지지 않은 사실 중 또 하나는 그가 '목회자의 가정'에서 태어났다는 것과 화가로 뚜렷한 성과를 내기 전인 20대 중반, 종교적 열심으로 목회자가 되기 위해 진지하게 목회 수업을 받은 적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비록 그의 불안정한 정신 상태가 성직자로서의 고흐의 삶에 발목을 잡긴 했지만, 그림에 대한 열정이 성직보다 더 컸다는 뜻이지 종교적 열심과 열정이 사그라들지는 않았던 것 같습니다. 화가로서 첫 걸음을 내딛었던 고흐는 자신이 목회 수업을 받고 있었던  보리나주 광부의 열악한 삶을 그림으로 옮깁니다. 그에겐 캔버스 위에 덧입혀가는 사물의 형상 자체가 하나의 제의적 수행과 다름이 없었던 것입니다. 불과 37세로 삶을 마감했던 고흐였기에, 그의 젊은 시절 종교적 열심은 짧고 강한 광휘처럼 그의 삶을 지나갔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고흐(Gogh)의 그림은 한 화폭에 시간의 경과를 담고 있는 '인상주의' 화풍을 따르고 있습니다. 시간이 흐르면서 미묘하게 바뀌어가는 빛의 흐름이 한 폭의 그림에 담겨, 마치 최근의 '타임랩스'(Timelapse)를 보는 듯한 느낌을 줍니다. 그런데 감상자의 입장에선 고흐의 시간이 균일하지 않다는 점에 더욱 주목하게 됩니다. 아침과 점심, 그리고 석양의 빛이 균등하게 놓여 있는 것이 아니라, 그가 가장 사랑했던 어느 특정한 시간이 빛들이 좀 더 농밀하게 함축되어 있는 듯한 느낌을 줍니다. 때로는 아침의 고요한 햇살이거나, 또는 오후 4시 조금씩 힘을 잃어가는 태양의 그림자와도 같은 빛들일 때도 있습니다. 전체적으로 밝은 느낌의 그림 속에서도 이런 묘한 구별을 느낄 수 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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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본문을 묵상하면서 빈센트 반 고흐가 떠올랐던 것은 말씀 전체가 조밀한 빛처럼 수놓아져있다는 인상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그 빛은 틀림없이 20절 말씀, "겨자씨 한 알"에서 가장 밝고 뚜렷하게 드러나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런데 그 밝은 빛에 가려 앞뒤에 놓인 말씀이 발하고 있는 분명하고 은은한 빛을 놓칠 때가 종종 있습니다. 우리가 주목한 것은 마치 '정오의 빛'처럼 빛나고 있던 20절의 말씀이었지만, 실상 마태가 주목하고 있었던 것은 다른 빛들은 아니었을까요? 

 

간질로 고생하는 아이의 어머니는 혹시 나음을 얻을 수 있을까 싶어 제자들에게 데려 왔습니다. 우리는 이미 제자들이 '천국의 열쇠'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예수님과 같은 놀라운 권능을 행할 힘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들이 '제자'로 불리는 순간부터 이미 초인간적인 슈퍼히어로가 되었다는 사실도 알고 있습니다. 그렇기에 여인의 대답은 우리의 주목을 끕니다. 

 

 

내가 주의 제자들에게 데리고 왔으나 능히 고치지 못하더이다 (16절)

 

 

마치 학생의 잘못을 선생님께 이르는 듯한 이 말투는 분명 정오의 빛보다는 못하지만 은은하고 밝은 빛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능히 고치지 못하더이다'는 그녀의 말은 제자들을 향한 힐난이기도 하고, 또 제자들의 스승을 향한 '무능함'의 고발이기도 합니다. 도움을 요청하던 처지는 어느샌가 기적의 입증을 요구하는 당당함으로 바뀌어 있습니다. 그녀에게는 "당신 제자들도 못하던데 혹시 선생인 당신은 할 수 있을까 싶어서..." 하는 의심도 가득 담겨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갑자기 '겨자씨 한 알의 믿음'을 이야기하신 이유가 바로 이곳에 있습니다. 오전의 빛이 여물어 정오의 번쩍임이 되는 것처럼 예수님의 단호한 선언은 그녀의 '의심'으로부터 시작되었던 것입니다. 때문에 겨자씨 한 알조차 믿음이 없었던 사람은, 그 아들을 고치지 못한 제자들이라기보다는 오히려 기적을 보았으나 의심을 버리지 못하는 이 세대들을 향한 것이었습니다.

아무리 기적이 쌓여간 들, 아무리 죽은 자가 일어난다 한 들, 눈먼 자가 눈을 뜨고 저는 자가 걷게 된다고 한 들 이 세대에는 주님을 믿는 한 톨의 믿음조차 남아 있지 않은 것입니다. 세상이 중요하게 여기는 것은 그저 자신들의 유익과 편익뿐입니다. 자신에게 손해가 되고 또 자신을 불편하게 한다면 설령 그것이 진실이라고 할지라도 얼마든지 등을 돌릴 준비가 되어있는 '패역함'을 주님은 그 여인의 눈을 통해 마주하셨던 것입니다. 산을 옮길 만한 믿음은 결코 제자들만의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 빛의 기울어짐에 물고기 입에 담긴 한 세겔이 놓여 있습니다. 마치 고흐의 그림처럼 하루의 빛, 혹은 일주일의 빛을 고스란히 담고 있는 이 장면은, 그래서 몇 번이나 곱씹게 됩니다. 기적이 일상이 된들, 놀라운 병고침이 일상이 된들, 그것으로는 한 톨의 믿음도 더할 수 없다는 것을 새삼 깨닫게 됩니다. 적어도 세상이 원하는 것은 기적이 아닙니다. 이천 년 전에도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세상은 자신의 이익을 극대화하는 것을 축복이라고 말하고 자신의 불편함을 최소화하는 것을 기적이라고 숭배합니다.

그 남루한 사실이 예수님의 슬픔이며 이 시대의 교회가 짊어져야 할 슬픔이기도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