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MEMBRANCE

한국교회 트렌드?

mimnesko 2022. 12. 12. 14:06

목회데이터연구소에서 한국교회 트렌드 2023이라는 생소한 이름의 책을 발간했다.

저자 중 실천신학대학원의 정재영 교수(반가운 이름)가 있어, 책의 이름이며 디자인 자체에서 대번에 비슷한 책이 연상되는 불편함과 거부감에도 불구하고 내용을 살펴보았다. 목차를 보니 2023년 한국교회의 트렌드를 나열한 11개의 영어 표현들이 제일 먼저 눈에 들어온다. 레퍼런스 도서는 영단어의 스펠링을 첫글자로 화두를 뽑는(Acrostic) 방식으로 기술되었기 때문에 최소한의 필요성이라도 있었는데, "Rabit Jump" 라는 식의 연상조차 필요없음에도 불구하고 왜 굳이 낯선 영어 단어들로 목차를 채웠을까 싶은 생각부터 들었다. 그 표현들이 영어가 아니고선 도저히 담을 길 없는 주제의 응축이 있는 것도 아니다. 2장의 제목 'Spiritual but Not Religious'는 한글 병기도 아닌 영어로 'SBNR'이라고 옆에 적혀 있다. 다른 뜻이 있는 것이 아니라 그냥 영어 표현의 약자이다. 그걸 '에스비엔알'로 읽어달라는 뜻일까? 2023년 한국교회는 에스비엔알 성도들이 많다, 라고 말해달라는 것인지, 아니면 너무나 광범위하게 사용되는 표현인데 나만 모르고 있었던 것인지...

 

무엇보다 당혹스러웠던 것은 1장의 제목 '플로팅 크리스천(Floating Christian)'이다. 제목에서 미뤄볼 수 있듯이 한 교회에 정착하지 못하고 마치 물 위를 부유하는 것처럼 '떠다니는 기독교인'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이렇게 한 번 더 해석해야만 목차를 이해할 수 있다니 한심한 노릇이다). 그 표현의 적절성에 의문이 생긴다. 과거 한국교회에는 '가나안 성도'라는 표현을 종종 사용해왔다. 교회를 '안 나가'라는 말을 뒤집어서 성경에 등장하는 지역의 이름과 매칭을 시킨 그럴 듯한 표현이었다. 저자 중 반가운 이름인 정재영 교수가 쓴 책의 제목에도 '가나안 성도'라는 표현이 등장한다. 그런데 누구라도 쉽게 이해할 수 있는 표현을 굳이 버려두고 굳이 생소한 '플로팅 크리스천'이라는 영어 표현을 사용한 이유가 무엇일까? 과거의 '가나안 성도'와의 어떤 큰 차이를 가지고 있기 때문인가? 

 

플로팅 크리스천과 가나안 성도

여러 번 1장을 읽고난 뒤 나의 소감은 '의미하는 바는 다를 바 없다. 그러나 방향이 바뀌었다.' 였다. 가나안 성도는 어떤 개인적인 이유(신앙심, 종교에 대한 입장 등 마음의 변화, 질병 등으로 인한 신체의 변화, 이사나 입원 등의 거주 환경의 변화)로 특정한 교회의 성도로 집계되지 않는 성도들을 의미한다. 성도의 개인적인 이유가 주일 성수, 공동체 소속이라는 기독교적의 전통적인 이해보다 앞선 어떤 성도들은 개인의 신앙심을 유지한 채로 '교회'라는 가시적인 단체의 소속을 거부하는 것이다. 이 경우 대부부의 이유가 '교회'라는 단체에 존재하기 마련이다. 과거 가나안 성도를 조사했던 여러 조사들을 보면 가나안 성도들이 교회를 떠난 이유 중 적지 않은 것이 '교회'라는 단체로부터 빌미가 된 경우가 많았다. 목회자의 설교나 성품,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아서, 교회의 행정이 올바르지 않아서, 교회가 요구하는 내용이 기독교 신앙과 일치된다고 인정하기 어려워서 등 다양한 이유가 교회로부터 말미암게 된다. 따라서 교회를 '안 나가'는 성도의 선택은 자신의 신앙을 지키고자 하는 노력의 일환으로 여겨질 수도 있고 또 더 나은 공동체를 발견하고자 하는 갈증이라고 표현될 수도 있다(물론 모두 그렇게 긍정적인 이유만을 가진 것은 아니다). 요약하자면 교회를 '안 나가'는 것을 결정한 것은 성도 그 자신이고 교회는 그들이 교회를 안 나오는 이유의 해결책을 제시해야할 책임을 갖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플로팅 크리스천'은 철저히 교회에서 어떤 부류의 성도들을 카테고리화 한다. 그곳에는 성도 자신의 주체적인 결단은 소거되고 단지 현재 그들이 어느 특정한 교회 단체에 소속되어 있지 않은 현재의 상태만을 나타낸다. 이 묘한 뉘앙스의 차이는 스스로가 크리스천이라고 말하면서 '둥둥 떠다니고 있는' 책임을 성도 개인에게 전가한다. 그리고 교회에게는 마치 물에 떠다니는 고기를 잡듯이 이러한 플로팅 크리스천을 낚아내야만 한다는 식의 생각을 갖게할 위험이 있다. 코로나 3년을 지나면서 한국교회는 생소한 '온라인' 환경의 예배를 드리게 되었다. 성도들은 '주일 성수'가 꼭 오프라인 예배와 매칭되는 것이 아니라는 교회의 공식적인 입장을 마주하게 된다. 불가피한 상황이라면 온라인으로 예배에 참석하고 온라인으로 봉헌을 하는 것도 가능하다, 라는 것을 안내해주고 승인해 준 곳이 다름 아닌 '교회들'이다. 

그런데 온라인으로 예배를 드리는 성도들이 더이상 오프라인 예배로 돌아오지 못한다고 해서 그것을 '플로팅'이라고 표현하는 것은 자가당착이다. 마치 일부 성도들이 중요한 종교적인 책무를 수행하고 있지 못하며, 건전하지 못한 신앙생활을 하는 것처럼 지칭할 수 있는 위험이 이 단어에 함축되어 있기 때문이다. 실제의 용례를 보더라도 그렇다. 과거에도 있었고 지금도 엄연히 존재하는 '가나안 성도'들이 스스로를 '나는 플로팅 크리스천이다'라고 말할 가능성은 거의 없어 보인다. 오히려 코로나19 이후 정체를 겪고 있는 한국교회들이 마치 집 나간 탕자처럼 '플로팅 크리스천'들을 어서 교회로 돌아와야할 대상으로 간주할 가능성이 훨씬 더 높아 보인다. 

 

한국교회 트렌드?

때문에 '한국교회 트렌드 2023'의 '교회'는 에클레시아의 교회라기보다는 구체적이고 가시적인 교단과 그에 속한 '교회'(The Church)를 의미한다고 보는 것이 더 타당하지 않을까, 하는 우려를 갖게 한다. 사실 이 책이 대상이 한국교회의 성도들이라기보다는 오히려 목회자들이나 교회 지도자들이라는 점은 '추천의 글'만 보아도 대략 유추할 수 있다. 만약 이러한 우려가 사실이고, 교회 지도자들이나 개교회의 목회자들이 이 책의 내용을 토대로 2023년의 목회계획을 수립한다면 이 책은 그 제목의 거창함과는 다르게 오히려 또 다른 이름의 '교회 성장학'이라고 보는 편이 적합할 것이다. 어떻게 하면 이 불모의 시대에 교회를 성장시킬 수 있는가, 하는 물량목회와 번영주의가 트렌드, 라는 교묘한 이름 뒤에 숨어, 다시금 있지도 않은 편가르기에 나서는 것은 아닌지, 하는 불편한 마음을 감출 길이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