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MEMBRANCE

순진한 기독교 : 이야기를 시작하며...

mimnesko 2015. 6. 16. 01:11

중세를 암흑의 시기로 보는 것은 다분히 인본주의자들의 시선이다.

교황의 절대적인 권력 아래 합리적인 사고와 판단이 실종된 중세시대는 흑사병으로 유럽 인구의 2/3이 죽고 나서야 비로소 막을 내리게 된다, 는 식의 접근이다. 이렇게 생각하면 꽤 우울한 그림이 연상되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기도 하다.

 

하지만 '신본주의자'들의 입장에선 오히려 이 시기야말로 어떤 혼란과 혼돈이 없던 매우 선명한 시기였을 것이다. 자연스러운 질문조차 거세된 삶은 단순하고 질서 정연할 수밖에 없다. 모든 이유는 종교적인 판단으로 귀결된다. 즉 반론의 여지가 없다. 이 얼마나 명쾌하고 즐거운가. 단순무식이라는 말이 있는 것처럼 단순하고 무식한 것에는 결코 적지 않은 '힘'이 있다. 다양성과 단순함의 싸움이라면 그건 해보나 마나한 일이다. 무조건 '단순함'이 이긴다.

 

그러나 현실이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는 걸 자각하는 사람들이 하나 둘 늘어나면서 중세는 근원적인 뒤틀림을 겪게 된다. 그리고 당시 중세의 교회는 급변하는 상황에 대처할 수 있을만큼 기민한 조직이 아니었다. 오히려 엉덩이가 가려워도 시원하게 한 번 긁어볼 수 없을만큼 비대해진 상태였다. 파국은 당연했고, 그 여파는 결코 적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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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의 한국교회에는 여러 아픈 상처들이 있다. 어마어마한 규모의 교회가 한두 개가 아니라, 지역 마다 하나씩은 있다. 믿기 힘든 일이지만 수십 만 명이 한 교회의 교인으로 등록된 교회도 있고, 2~3만명 규모의 교회도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등록된 교인이든 아니든 사람이 많다는 것은 그만큼 생각이 많다는 것이다. 개인의 신앙경험을 고려해 볼 때에도 모인 사람들의 숫자만큼의 서로 다른 생각이 존재할 수 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대부분의 대형교회의 모습을 보면 대단히 '단순한' 형태의 의견을 보여준다. 심지어 교회 내분의 사태로 이러저러 시끄러운 일을 겪고 있는 교회들조차도 자기 방어만큼은 일치단결하는 느낌이다.

분쟁의 중심에 대부분 목회자가 놓여 있다는 것도 슬픈 일인데, 그 목회자가 오히려 분쟁을 조장하거나 방조하며 교인들을 포섭(?)하여 세력화하는 모습은 재개발지역에서 지역 건달들의 모습과 별반 다르지 않다.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것은, 교회가 분열되고 각자의 세력화된 모습으로 싸움을 벌인다고 해서 도대체 어떤 '이권'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인가? 왜 그렇게들 열심히 교회를 파편화시키는 일에 앞장서게 되는 걸까?

 

최근 이슈가 되는 몇몇 교회의 청년들을 우연히 만날 기회가 있어 교회가 겪는 어려움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청년들 대부분이  놀라울 정도로 단순한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었다. 간단히 말하자면, 자신이 속한 부류가 '하나님의 뜻'이라는 것이다. 같은 교회에서 성장했지만 단지 약간의 생각이 달라 서로 다른 편에 속하게 된 것이 아니라, 자신들은 '하나님' 편이고 상대방은 교회를 훼방하는 '사단'의 편이라는 것이다. 이 놀랍도록 단순하고 무식한 편가름을 보며, 이 내분의 진상이 무엇이든 간데, 교역자나 이권에 깊숙히 개입한 성도들이 벌이는 일들이 얼마나 추악한지를 돌아보게 된다.

무지한 단순함이 '세력화'되면 필연적으로 '정당성'을 요청하게 된다. 믿음은 있는데 마땅한 대상이 없기 때문이다. 이 때 목회자들은 자신들의 권력지양을 '하나님의 뜻'으로 정당화한다. 정당성을 획득한 무지한 단순함은 교회의 기존 조직을 타고 더 넓게 세력화 된다. 물론 상대편도 마찬가지의 진화를 거쳐서 결국은 '하나님의 뜻'이 양분되어 대립하는 형국이 된다. 물론 '하나님'은 늘 자신의 입장에 있기 마련이고, 저 무지몽매한 상대 진영은 사우론의 번뜩이는 눈 아래 있을 뿐이다. 이쯤되면 '불가지론'이 꽤 힘을 얻는다. 양쪽 다 하나님의 뜻을 주장하고 있는데 그것이 서로의 대립명제라면, 애초에 하나님의 뜻 자체가 없는게 아닐까(0으로 상쇄), 하는 합리적인 의심을 가질 수 있기 때문이다.

 

여하튼 이처럼 교회(라는 어떤 '집단'이)가 하나의 권력이 되어 단순함을 무기로 휘두르는 모습을 보면 어쩔 수 없이 과거 유럽의 역사가 오버랩된다. 그들은 거리낌없이 스스로를 '신본주의자'들이라고 불렀다. 그러나 내면을 살펴보면 하나님을 믿는 공동체로서의 교회가 아니라, 이익집단으로서의 교회로 세상에 영향력을 주고자 하는 패권주의적 사고에 더 관심이 있음을 알 수 있다. 역사를 돌이켜 보아도 가장 치열하고 장기적이며, 잔혹한 전쟁은 대부분 '굳은 신앙'이라는 미명 하에 치뤄졌다. 이 전쟁의 목적이 상대의 '멸절'이기 때문에, 애초에 어떤 자비도 기대할 수가 없다. 그러나 정작 상대를 '멸절'한 후에도 여전히 내부의 '적'은 다시 움트고 싹튼다. 결국 하나님의 뜻은 소수의 권력의지에 따라 후라이팬 위의 옥수수처럼 이리 튀고 저리 튀게 된다. 그 속에서 '단순함'의 의미를 발견하기란 쉽지 않다. 그것이 비록 '성실함'이라는 모양 좋은 외견을 가지고 있다고 하더라도 말이다.

 

하나님은 세상을 검은색과 흰색, 단 두 가지 색깔로 창조하지 않으셨다. 누구의 말처럼 하나님께선 땅을 차별하여 비를 뿌리지 않으신다. 우리가 생각하는 '악인'의 땅에도 해는 뜨고 바람이 불며, 비는 내린다. 이런 다양성을 인정하고 이해하는 것이 왜 우리가 가진 '믿음'과 상치되는 것인지 나는 도무지 이해할 길이 없지만, 최근 대형 교회를 중심으로 한 단순화된 신앙의 패턴은, 다양성을 인정하는 것을 마치 기독교 신앙의 종말쯤으로 보고 있다. 대충 어떤 의미인지는 이해가 되지만, 그렇다고 해서 소수의 권력의지에 교회를 이용하고, 신앙을 이용하며, 개인의 헌신을 이용하는 것은 결과적으로 그 모든 것을 '조롱'하는 것과 다름없는 일이 아닐까?

 

역사적으로 돌아보면 한국의 독립에 적지 않은 기여를 했던 이 땅의 기독교를 여론이 '개독교'라 인용한 것도 벌써 몇 해가 흘렀다. 하지만 그 간단한 단어조차 바로잡아 기독교인들의 마음의 상처를 덜어낼 지혜로운 시도는 기독교 내에서 거의 없었다. 오히려 더욱 단단하게 흑백논리로 무장하고 있었다. 마치 가공의 적을 만들어 내부의 결속을 다지는 병법서의 어느 구절처럼, 소수의 대형교회들은 오직 자신들만의 리그를 위해 대중의 신앙을 기만하고 있다. 만약 그 속에 '하나님의 뜻'이 담겨 있다면, 그것은 '정명제'로서의 뜻이 아니라 오히려 '반명제'로서의 뜻일 것이다. 무너져야 새로 쌓을 수 있다. 교회들의 대형화와 세속화가 두려운 것은, 바로 그 이유이다. 적어도 한국교회는 돌 하나 남기지 않고 무너졌던 예루살렘의 성을 지금 누가 차지하고 있는지 곰곰이 생각해 봐야 한다. 물론 그 역시도 이 세상의 주인되신 하나님의 뜻임에 틀림없다.

 

F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