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BOOK

소년이 온다

mimnesko 2024. 3. 21. 15:15

 

한강 - 소년이 온다

 

 

이 책을 손에 들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렸습니다. 

알록달록한 동화를 떠올리게 하는 제목과 달리, 그 내용이 5·18 광주 민주화 운동을 담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인지 모릅니다. 장선우 감독의 '꽃잎'에서, 이창동 감독의 '박하사탕'에서, 김지훈 감독의 '화려한 휴가'에서, 장훈 감독의 '택시운전사'에서 저는 이미 광주의 조각들을 보았습니다. 아니 보았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정작 광주사태, 광주항쟁, 광주 민주화 운동이 정작 언제 벌어진 일인지는 몰랐습니다. 5월 18일 하루에 그 모든 일이 다 일어난 걸까? 그 잔인하고 끔찍한 일들이 조각 조각들이 그 날 하루에 벌어진 일이었나? 손가락만 까딱하면 정보를 찾을 수 있는 요즘에도, 억지로라도 그 검색어를 입력해 보지는 않았습니다. 

 

그래서 제 기억은 조각과 조각을 기워 입혀 후줄근해진 옷처럼 남루했습니다. 제대로 알지도 못하지만, 입을 옷도 아닌데 뭐하러 빨아놓겠어, 하는 마음이 더 컸던 것 같습니다. 그 마음의 정체가 궁금해졌습니다. 길을 걷다가 문득, 혼잡한 지하철 속에서 문득. '어떻게 벌써 물이 나와요.'했던 그녀의 외침처럼. 사람들의 어깨를 피해 계단을 오르며 문득 그 마음의 정체가 궁금해졌습니다. 그래서 읽어보기로 했습니다. 오가는 지하철에서 훌훌 읽어보기로 했습니다.

그런데 한 문장을 읽다 생선 가시 같은 것이 목에 탁 걸렸습니다. 

 

 

˚

당신들을 잃은 뒤, 우리들의 시간은 저녁이 되었습니다.
우리들의 집과 거리가 저녁이 되었습니다.
더이상 어두워지지도, 다시 밝어지짖도 않는 저녁 속에서 우리들은 밥을 먹고, 걸음을 걷고 잠을 잡니다.
- 79쪽

 

 

책을 덮고 눈을 감았습니다. 그렇게 역 두어 개를 지났습니다. 지하철 3호선 수서 역을 지났을 무렵 다시 책을 폈습니다. 그럴 줄 알았기에 그 가시 하나가 참 아프게 매웠습니다. 그래서 사나흘 책을 두고 출퇴근을 했습니다. 빌려온 책이니 돌려줄 날까지 그대로 두자 했습니다. 그런데 무슨 마음에선지 출근길 가방에 책을 담았습니다. 그리고 꾸역꾸역 읽었습니다. 허재비 같은 사람들의 어깨 틈을 지나며 책을 들고 읽었습니다. 

 

 

˚

경찰서에 다 같이 끌려가 넋을 잃고 앉아 있는디 우리하고 다른 곳에서 시위하기로 했던 부상자회 청년들이 잡혀들어왔다이. 시무룩이 줄을 서서 들어오다가 우리하고 눈이 마주쳤는디, 한 청년이 갑자기 울면서 소리쳤다이.

엄마들, 여기서 왜 이렇고 있소? 엄마들이 무슨 죄를 지었소?

그 순간 내 머릿속이 멍해졌어야. 하얗게, 온 세상이 하얗게 보였어야. 찢어진 소복 치마를 걷고 탁자 위로 올라갔다이.

더듬더듬 조그만 소리로 중얼거렸어야.

맞어, 내가 무슨 죄를 지었단가.

 - 189쪽 

 

낯선 사투리의 글을 읽는 건 어려운 일입니다. 낯선 글이 그래서 더 낯설어집니다. 그런데 느닷없이 눈앞이 흐려집니다. 혼잡한 출근 지하철 안이라 더 당황하고 말았습니다. 그 뒤를 더는 읽을 수 없어 책을 덮었습니다. 

 

 

˚

허락이요? 물론 허락합니다. 대신 잘 써주셔야 합니다. 제대로 써야 합니다.

아무도 내 동생을 더이상 모독할 수 없도록 써주세요. 

 

 

작가의 에필로그를 두 번 새겨 읽었습니다.

입을 옷도 아닌데 뭐하러 이렇게 정성껏 빨아 널었을까. 책을 덮으며 생각했습니다. '서울의 봄'이라는 영화를 천만 명이나 되는 사람이 보았다고 합니다. 내가 그중 하나가 아니어서 다행이었고, 그중 하나가 아니어서 아쉬웠습니다. 어차피 입을 옷도 아닌데, 왜 다들 그 남루한 옷을 빨지 못해들 안달일까. 보란듯이 분수는 물을 뿜어내고, 이젠 아무도 '소년'을 기억하지 않는데.

 

그 밤에 누군가의 가벼운 발소리를 들었던가. 

정성껏 빨아 널어 놓은 그 남루한 옷에서 떨어지던 물소리였던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