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BOOK

혐오와 증오의 사회

mimnesko 2023. 8. 21. 09:49

혐오(disgust)는 불편함이다. 

나와 다른 타자로부터 느끼는 불일치에 대한 불편함일 수도 있고, 청결하지 못한 대상에 대한 찌푸림일 수도 있다. 누구에게나 이런 '혐오의 감정'은 있다. 그것이 바퀴벌레에 대한 것일 수도 있고, 불균형한 건출물에 대한 것일 수도 있다. 또 '외국인 노동자'나 '난민', '동성애자'를 바라보는 불편한 시선일 수도 있다. 이것은 잘못인가? 아니다. 이것은 어디까지나 개인의 도덕적 감수성의 문제이다. 개인의 자유를 존중한다는 것은 한편으로 이러한 '혐오'까지 존중하는 것이다. 그리고 최근까지도 이러한 '혐오'는 지극히 개인의 감정에 불과했다.

 

혐오가 집단화되는 것이 증오(hatred)이다.

데카르트의 영리한 지적처럼, 증오는 어떤 특정한 집단 내의 혐오 대상이 완전히 제거될 때까지 사라지지 않는 감정이다. 작게는 집단 따돌림이다. 결국 상대를 파괴할 떄까지 이 집단의 '혐오'는 멈추지 않는다. 때문에 증오는 필연적으로 '폭력성'을 동반한다. 때문에 종교와 정치의 기능은 개인의 '혐오'가 집단의 '증오'로 증폭되는 일련의 과정을 제거하거나 소거하거나 완충하는 것에 있다. 만약 '집단의 이성'이 그 역할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할 경우, 우리는 '광기'어린 폭력적 집단이 법의 테두리에서 조직되는 것을 목격하게 된다. 2차 세계대전 중 유대인에 대한 학살은 법의 테두리 안에서 철저한 행정적인 작업을 통해 진행되었다. 과거 한국사회를 횡횡하던 '빨갱이 사냥' 역시 종종 국가기관이거나 그에 준하는 단체를 통해 조직적이고 행정적인 뒷받침을 받았다. 

 

카롤린 엠케의 '혐오사회'(정지인 역, 다산초당, 2017)는 우리의 혐오가 어떻게 집단화 되는 지를 잘 보여주고 있다. 

집단화된 혐오가 또 얼마나 위험한 것인지를 보여주고 있다. 문제는 이러한 '집단화'과 과거 '물리적인 연대'를 벗어나 '가상의 공간'에서 종횡무진 일어나고 있다는 것이다. '여혐'이나 '남혐'을 주제로 하는 사이트가 우후죽순 생겨나고 있다. 이곳에 올려지는 수만 개의 개인적인 '혐오'는 집단의 동의를 얻는 즉시 '증오'로 변모한다. 문제는 그 주체가 '집단'이 아니라 여전히 '개인'에 있다는 점이다. 과거에는 혐오가 어떤 집단의 형태를 띄고 '증오'가 되면 집단의 형태로 움직였다. 집단에는 주체가 있고 추종자가 있다. 따라서 비판과 소거의 대상이 존재하는 것이다. 그러나 개인의 주장인 '혐오'가 가상의 공간(웹사이트, 동호회 등)에서 '집단화'되면, 마치 집단을 대표하는 듯한 개인에 의해 이러한 폭력이 자행될 수 있다는 점이 과거와 달라진 점이다. 물론 개인의 증오가 집단화된 혐오의 위험성보다는 현저히 낮을 수 있으나, 그 대상이 무차별적일 수 있다는 점에서는 더 큰 우려를 낳게 된다. 

즉, 나를 '혐오'하는 어떤 타자가 갑자기 돌변하여 나를 '제거'하려고 마음을 먹기까지 불과 몇 분의 시간이면 충분하다는 것이다. 

 

최근 신문 기사를 보면, 한국 사회가 다른 어느 나라보다 재빠르게 증오 사회로 옮겨가는 것을 볼 수 있다. 개인들의 무차별적인 범죄 때문이 아니다. 과거 서로 다른 지역의 혐오를 양분으로 삼던 정치 집단들이 세대 간의 혐오를 조장하며 정치적인 자양분을 축적하더니, 이제는 사회에서 볼 수 있는 모든 계급의 대립을 통해 자신들의 정치적 자산을 축적하고 있다. 무엇보다 한 나라의 행정수반이 그 가장 앞 열에 서서, 증오 사회를 촉진하고 있는 모양새이다. 시대착오적인 발언은 차치하더라도 개인의 도덕적 감수성을 의심하게 하는 이상한 판단과 결정은 개인 내면의 '혐오'가, 어떤 집단적인 도움이나 제어 없이 가장 힘 있는 사람의 '증오'로 번져갔을 때 발생할 수 있는 모든 경우의 수를 보여주고 있는 것만 같다. 즉 한국에서의 '증오'는 여러 정치적 필요에 의해 거의 빛의 속도로 개인의 한계를 넘어 집단화 되고 있다. 그 증오의 강도는 불과 70년 전에 심각한 내전을 경험한 나라의 국민이라고는 도무지 믿기 힘들 정도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이 '혐오'가 '증오'로 증폭되는 것을 막을 수 있을까? 

한나 아렌트는 예루살렘의 법정에 선 '아히히만'을 평범한 사람, 아니 오히려 평범하고 싶었던 열등한 사람이라고 표현한다. 그리고 그 열등한 '개인'에게 과도한 권한이 주어졌을 때 유대인들에게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를 엄밀히 기술한 바 있다. 그의 참담한 죄악은 철저히 법의 테두리 안에서 또 '유능한 관료'의 모습으로 행해졌다. 만약 당시 독일의 집단 지성들이 당시 독일의 '제국 헌법'이 그 본연의 가치를 상실하고 있으며 그 속에서의 유능함이란 결국 '범죄'일 뿐이라고 주장했다면(종전 후에는 결국 그렇게 되었다), 우리는 그 참혹함의 시간을 조금은 줄일 수 있지 않았을까? 만약 당시 독일교회가 대사회적인 역할과 기능이 단순히 '구제'에 끝나는 것이 아님을 조금 더 일찍 자각했다면, 그래서 본 회퍼와 같은 신학자들이 좀 더 많았더라면 그 부끄러운 시간을 조금은 줄일 수 있지 않았을까? 

 

카롤린 엠케의 '혐오사회'에서 우리가 그 실마리를 발견할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