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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족하게 하는 일들

mimnesko 2023. 3. 7. 10:10
마태복음 18:1~10

1 그 때에 제자들이 예수께 나아와 이르되 천국에서는 누가 크니이까
2 예수께서 한 어린 아이를 불러 그들 가운데 세우시고
3 이르시되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돌이켜 어린 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4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어린 아이와 같이 자기를 낮추는 사람이 천국에서 큰 자니라
5 또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런 어린 아이 하나를 영접하면 곧 나를 영접함이니
6 누구든지 나를 믿는 이 작은 자 중 하나를 실족하게 하면 차라리 연자 맷돌이 그 목에 달려서 깊은 바다에 빠뜨려지는 것이 나으니라
7 실족하게 하는 일들이 있음으로 말미암아 세상에 화가 있도다 실족하게 하는 일이 없을 수는 없으나 실족하게 하는 그 사람에게는 화가 있도다
8 만일 네 손이나 네 발이 너를 범죄하게 하거든 찍어 내버리라 장애인이나 다리 저는 자로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두 손과 두 발을 가지고 영원한 불에 던져지는 것보다 나으니라
9 만일 네 눈이 너를 범죄하게 하거든 빼어 내버리라 한 눈으로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두 눈을 가지고 지옥 불에 던져지는 것보다 나으니라
10 삼가 이 작은 자 중의 하나도 업신여기지 말라 너희에게 말하노니 그들의 천사들이 하늘에서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얼굴을 항상 뵈옵느니라

 

요즘은 '조간 신문'이라는 단어가 생소합니다.

물론 지금도 조간 신문이 집집마다 배달되고 있을테지만, 다가구가 사는 아파트에서도 우편함에 꽂혀 있는 신문을 찾기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스마트폰의 대중화가 가끔은 서글퍼지는 장면입니다. 기억을 떠올려 보면, 아침의 서늘한 기운과 함께 배달 된 조간 신문을 펴들면 제일 먼저 신문 잉크 냄새가 확 밀려오곤 했습니다. 어느 시인이 사람은 '냄새'로 기억을 저장한다고 했는데 정말 그렇습니다. 지금도 문득 그 비슷한 잉크 냄새라도 맡으면 머리속은 어느새 수십 년 전, 대문 앞에 떨어져 있던 조간 신문을 들고 식탁으로 가져 오던(그게 제 아침 임무였습니다) 기억이 생생하게 되살아나곤 하니까요. 

 

잉크 냄새 사이로 그날의 헤드라인 기사가 보입니다. 마치 호령하는 것처럼 굵게 적혀 있는 헤드라인은 짧고 힘이 있습니다. 그 헤드라인이 사람들을 웃게도 하고 또 찡그리게도 합니다. 밤 사이 큰 화재라도 있는 날에는 피곤한 기색이 역력한 소방관의 지친 모습과 함께 사상자의 숫자가 굵고 선명하게 헤드라인에 놓여지곤 합니다. 스마트폰으로 확인하는 신문 기사에서는 찾아보기 어려운 일입니다. 사람들의 클릭 수가 매출로 직결되는 온라인 환경 탓에 헤드라인의 그 간결함과 견고함은 자취를 감췄습니다. 더불어 신문 고유의 색깔이나 논지도 희박해지는 것만 같아 안타깝습니다. 굳이 일간 신문의 온라인 판을 찾아가 보더라도 상황은 그닥 다르지 않습니다. 하루치의 효용을 지닌 신문의 가치는 내지르는 듯 소리치는 헤드라인과 쪽과 쪽 사이를 오고가는 기사의 편집에 있음을 새삼 느끼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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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본문의 '실족'이라는 단어가 눈에 걸렸습니다. 그 단어가 '조간 신문'을 연상시킨 것은 아마도 요즘 신문 기사를 보며 '실족'하게 되는 일이 많아서일 것입니다. 개인적으론 '정치'가 개인의 삶에 큰 영향(또는 스트레스)을 주지 않는 삶이야말로 좋은 정치제도라고 생각합니다. 때문에 민주주의는 지방 자치를 통해 단계별로 성숙해야 한다고도 생각합니다. 그러나 '민주주의'라는 정치 체계마저 불과 수십 년 전에 수입한 우리나라로서는, 최소 200년 이상 그 체계를 공고히 하기 위해 시련을 겪었던 다른 나라의 그것과는 아무래도 성숙의 차이가 있을 수밖에 없겠지요. 그래서 실족하게 됩니다. 

 

개인의 의견이 모여 집단의 의견이 됩니다. 집단의 의견이 제대로 반영되지 않을 때 우리는 '실족'하고 맙니다. 그것은 교회도 예외가 아닙니다. 교회 구성원들의 상식과 교회 지도자들의 상식이 배치될 때, 우리는 '실족'하게 됩니다. 거대한 재정과 성도수를 자랑(?)하던 대형교회가 자신의 부와 권력을 연장하기 위해 자녀 세습을 하는 모습을 보면 '실족'하지 않기란 어렵습니다. 교회 헌금을 제 주머니의 돈처럼 쓰면서도 조금의 가책이 없는 교회 지도자를 보며 역시 실족하지 않기란 어렵지요.

이처럼 실족은, 개인과 집단의 기대가 처절하게 무너지면서 마치 허방다리라도 짚 듯 몸의 균형이 무너지는 일입니다. 좀처럼 회복하기 어려운 상처를 입는 일이기도 합니다. 예수님조차 그 일이 얼마나 빈번하게 우리 주위에서 벌어지고 있는지를 선명하게 말씀해 주셨습니다. 

 

 

실족하게 하는 일들이 있음으로 말미암아 세상에 화가 있도다 실족하게 하는 일이 없을 수는 없으나 실족하게 하는 그 사람에게는 화가 있도다

 

 

'실족하게 하는 일이 없을 수는 없으나' 라는 말씀에 목에 가시가 걸린 듯 불편했습니다. 내가 신문의 헤드라인을 보고 품었던 마음처럼, 혹시 오늘 내 삶이 누군가를 실족하게 하는 것은 아닌지, 누군가 개인의 마음이나 집단의 마음을 배반하는 것은 아닌지 돌아보게 됩니다. 돌아보면 내 삶이, 내가 걸어온 이 평탄치 않은 길이 온통 누군가를 실족하게 했던 삶이 아니었던가. 기대를 배반하고 믿음을 져버리는 일들은 또 아니었던가. 설령 그 실족됨이 내가 의도하지 않은 일이라고 하더라도 그 화살의 끝을 피할 수 없다는 주님의 서늘한 말씀에, 다시 한 번 마음을 여미게 됩니다. 그 갚을 길 없는 미안함에 마음이 더욱 낮아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