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IDBARR

나의 사랑, 나의 고민

mimnesko 2023. 3. 3. 07:00
마태복음 16:1~20, 개역개정

1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이 와서 예수를 시험하여 하늘로부터 오는 표적 보이기를 청하니
2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가 저녁에 하늘이 붉으면 날이 좋겠다 하고
3 아침에 하늘이 붉고 흐리면 오늘은 날이 궂겠다 하나니 너희가 날씨는 분별할 줄 알면서 시대의 표적은 분별할 수 없느냐
4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적을 구하나 요나의 표적 밖에는 보여 줄 표적이 없느니라 하시고 그들을 떠나 가시니라
5 제자들이 건너편으로 갈새 떡 가져가기를 잊었더니
6 예수께서 이르시되 삼가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의 누룩을 주의하라 하시니
7 제자들이 서로 논의하여 이르되 우리가 떡을 가져오지 아니하였도다 하거늘
8 예수께서 아시고 이르시되 믿음이 작은 자들아 어찌 떡이 없으므로 서로 논의하느냐
9 너희가 아직도 깨닫지 못하느냐 떡 다섯 개로 오천 명을 먹이고 주운 것이 몇 바구니며
10 떡 일곱 개로 사천 명을 먹이고 주운 것이 몇 광주리였는지를 기억하지 못하느냐
11 어찌 내 말한 것이 떡에 관함이 아닌 줄을 깨닫지 못하느냐 오직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의 누룩을 주의하라 하시니
12 그제서야 제자들이 떡의 누룩이 아니요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의 교훈을 삼가라고 말씀하신 줄을 깨달으니라
13 예수께서 빌립보 가이사랴 지방에 이르러 제자들에게 물어 이르시되 사람들이 인자를 누구라 하느냐
14 이르되 더러는 세례 요한, 더러는 엘리야, 어떤 이는 예레미야나 선지자 중의 하나라 하나이다
15 이르시되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16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여 이르되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17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
18 또 내가 네게 이르노니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19 내가 천국 열쇠를 네게 주리니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 하시고
20 이에 제자들에게 경고하사 자기가 그리스도인 것을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라 하시니라

 

필립 얀시의 책 "교회, 나의 고민 나의 사랑(IVP)"은 청년 시절 저자가 교회에 실망하고 떠났던 경험으로부터 시작합니다.

그의 눈에 비친 교회는 거짓 용서와 위선과 가식, 종교적 틀만 내세우는 경건으로 가득 찬 곳이었습니다. 그가 교회에서 경험할 수 있는 하나님의 모습은 모두를 질식시킬 것만 같은 '숨막하게 하는 하나님'이며, '강요의 하나님'이었습니다. 청년 필립 얀시는 자문합니다.

"교회는 나의 고민거리에 불과해. 왜 내가 교회 때문에 고민을 해야 하지?"

 

코로나 팬더믹을 거치면서 교회는 이제 사회의 '고민거리'가 된 듯한 느낌입니다. 교회의 목회자나 성도를 신뢰하는 수치가 사상 최저치를 경신하고 있습니다. 다음 세대의 복음화율은 선교지의 상황과 다를 바 없어지고 있습니다. 청소년의 복음화율은 3.8%(2022년 추정치). 200만 명의 청소년 중 기독교인이 7만 6천 명에 불과합니다. 그러나 현장에선 이마저도 지나치게 낙관적인 수치라고 말합니다. 체감으로 느끼는 청소년의 복음화율은 2% 미만입니다. 우리가 흔히 미전도 종족을 구분하는 기준이 3%이니, 현재 청소년들을 미전도 종족이라고 불러도 무리는 없을 것입니다. 레슬리 뉴비긴 목사님의 유명한 이야기처럼, "선교지에서 돌아와 보니 고국(영국)이 선교지기 되어 있었다"는 고백이 우리의 상황과도 다를 것 없어 보입니다. 

 

***

예수님께서 처음 세우셨던 교회는 지금의 모습과 사뭇 달랐습니다. 그 교회는 '반석' 위에 세워졌고,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는 곳이었습니다. '천국의 열쇠'를 가지고 무엇이든지 매고 무엇이든지 풀 수 있는 권세가 있었습니다. 그 '사도전 전승'의 토대 위에, 그 신앙의 여정 끝에 우리의 교회가 있다면 지금의 교회 역시 처음의 교회와 다를 바 없어야 합니다. 하지만 현재 한국교회를 베드로의 신앙고백 위에 세워졌던 '그 교회'와 동일시하기엔 어려움이 있습니다. 왜 이렇게 되었을까요? 

 

필립 얀시는 비록 교회에 실망해서 공동체를 떠났지만, 개인의 경건 생활을 통해 신앙을 유지할 수 있으리라 믿었습니다. 고민거리였던 교회를 떠남으로써 오히려 기쁨과 자유가 가득하리라 기대했습니다. 내가 발을 디딘 곳이 교회, 라는 생각도 했습니다. 그러나 현실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한동안 교회를 떠났다. 그런데 나의 불행은 그제서야 다가왔으니, 위선의 껍질을 던질 줄 알았는데, 신앙이라는 제일 중요한 속내용까지도 내던져버린 것이었다." - "교회, 나의 사랑 나의 고민" 중 - 

 

이 말을 현대 교회의 관점에서 옮겨 보면, "교회를 사회학적, 심리학적, 경제학적, 경영학적인 측면에서 재단하고 조직하고 재구성하게 되면 '비효율의 껍질'을 던질 줄 알았는데, 오히려 '공동체'라는 제일 중요한 속내용까지도 내던져 버린 꼴" 이라는 말이 됩니다. 교회가 사회학적, 경제학적, 경제학적, 경영학적 고민이 필요없다는 뜻이 아닙니다. 그것은 현대 교회의 노정을 살피는 중요한 '도구'가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현대 교회의 딜레마는 그 도구와 목적이 환치(換置)되었다는 점입니다. 만약 합리성과 효율성이 교회의 지향이 된다면, 복음은 설 곳이 없습니다. 복음이야말로 가장 비합리적이며 가장 비효율적인 가치이기 때문입니다.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이 인간의 몸을 입어 이 땅에 오셨다는 것보다 더 비합리적이고 비효율적인 선택이 있을 수 있을까요?

 

마태복음이 증거하는 교회는 표적의 공동체이며 기적의 공동체입니다. 약속의 공동체이며 천국의 열쇠를 가진 소망의 공동체입니다. 그러나 후안 카를로스 오르티즈 목사의 지적처럼, 교회가 그 본래의 기능을 상실하고 몸집만 불어난 '공룡'과 같이 되었다면 그 교회는 도구와 목적이 환치된 그 무엇이 되고 맙니다. 교회가 '성장'하는 것처럼 보일지 모르나, 그것은 그저 '살이 찌고 있는 것'에 불과합니다. 

 

예수님은 당신의 교회를 베드로의 고백 위에 세우셨습니다. 

오늘 우리는 우리의 교회를 무엇 위에 세우고 있을까요? 바로 그 지점부터 교회는 회복되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