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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스러기를 먹나이다

mimnesko 2023. 3. 2. 11:04
- 마태복음 15:21~39, 개역개정

21 예수께서 거기서 나가사 두로와 시돈 지방으로 들어가시니
22 가나안 여자 하나가 그 지경에서 나와서 소리 질러 이르되 주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내 딸이 흉악하게 귀신 들렸나이다 하되
23 예수는 한 말씀도 대답하지 아니하시니 제자들이 와서 청하여 말하되 그 여자가 우리 뒤에서 소리를 지르오니 그를 보내소서
24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나는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 외에는 다른 데로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노라 하시니
25 여자가 와서 예수께 절하며 이르되 주여 저를 도우소서
26 대답하여 이르시되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하지 아니하니라
27 여자가 이르되 주여 옳소이다마는 개들도 제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나이다 하니
28 이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여자여 네 믿음이 크도다 네 소원대로 되리라 하시니 그 때로부터 그의 딸이 나으니라
29 예수께서 거기서 떠나사 갈릴리 호숫가에 이르러 산에 올라가 거기 앉으시니
30 큰 무리가 다리 저는 사람과 장애인과 맹인과 말 못하는 사람과 기타 여럿을 데리고 와서 예수의 발 앞에 앉히매 고쳐 주시니
31 말 못하는 사람이 말하고 장애인이 온전하게 되고 다리 저는 사람이 걸으며 맹인이 보는 것을 무리가 보고 놀랍게 여겨 이스라엘의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니라
32 예수께서 제자들을 불러 이르시되 내가 무리를 불쌍히 여기노라 그들이 나와 함께 있은 지 이미 사흘이매 먹을 것이 없도다 길에서 기진할까 하여 굶겨 보내지 못하겠노라
33 제자들이 이르되 광야에 있어 우리가 어디서 이런 무리가 배부를 만큼 떡을 얻으리이까
34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에게 떡이 몇 개나 있느냐 이르되 일곱 개와 작은 생선 두어 마리가 있나이다 하거늘
35 예수께서 무리에게 명하사 땅에 앉게 하시고
36 떡 일곱 개와 그 생선을 가지사 축사하시고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니 제자들이 무리에게 주매
37 다 배불리 먹고 남은 조각을 일곱 광주리에 차게 거두었으며
38 먹은 자는 여자와 어린이 외에 사천 명이었더라
39 예수께서 무리를 흩어 보내시고 배에 오르사 마가단 지경으로 가시니라

 

기독교, 특히 개신교 신앙을 비판하는 사람들이 가장 빈번하게 언급하는 이유로는 '독선적인 신앙'을 들 수 있습니다. 개신교인들이 '배타적'이고 '독선적'이라는 비판입니다. 과연 그럴까요?

사실 모든 종교는 '배타적'입니다. 불가의 가르침과 유가의 가르침 역시 배타적입니다. 조선 초기 '숭유억불'을 정책의 기조로 삼았던 것은 당시 불가의 신앙형태가 새로운 국가를 조직하고 유지하려던 유가의 가르침과 상충하는 부분이 존재했기 때문입니다. 생각해보면 당연한 일입니다. 종교가 서로 배타적이라는 말의 뜻은 각 종교가 나름의 '경계'를 가지고 있다는 말과 같습니다. 더불어 대부분의 고등 종교는 그 경계 내에서 '신앙체계'라는 독선적 사고를 갖고 있습니다. 그것을 '교리'라고 말합니다. 교리를 집약한 것을 '경전'이라고 부릅니다. 그러므로 '교리'가 있고 '경전'이 있으며 그에 따른 '제사 행위'가 있는 모든 고등 종교는 상호배타적일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유독 개신교 기독교가 '배타적'이며 '독선적'이라는 비난의 칼날에 정조준되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슬프게도, 그것은 일부 교파의 목회자들이나 신자들이 갖고 있는 '경계에 대한 무지함' 때문입니다. 이런 소수의 '무지함'이 개신교 전체에 대한 대중적인 오해를 양산하고 있는 것입니다.

 

앞서 말한 바와 같이 모든 고등 종교는 나름의 '경계'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모든 종교가 이 '경계'를 '그 어느 것도 넘을 수 없는 높은 성벽'으로 규정하지는 않습니다. 경계가 있다는 것, 그것은 대화할 수 있는 '경계밖의 대상이 있다'라는 근거이지 경계 밖의 모든 대상을 '적'으로 간주하겠다는 의미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성문을 활짝 열지 않고도 경계밖의 대상과의 '대화'는 얼마든지 가능합니다. 동시에 그것은 자신의 경계 안을 견고하게 지킬 수 있다는 자신감의 표현이기도 합니다. 이런 점을 미루어 볼 때, 기독교가 다른 종교보다 더욱 배타적이거나 더욱 독선적일 이유는 전혀 없습니다. 오히려 그와는 반대로, 타종교에 대해 넓게 열린 마음으로 스스로의 신앙체계를 견고하게 지켜가는 단단한 믿음의 공동체가 바로 기독교 공동체입니다. 오늘 마태복음 속 예수님의 모습이 가장 적절한 예시입니다. 

 

예수님은 이방인들이 주로 거주하던 두로와 시돈 지역을 다니셨습니다. 그곳에서 귀신 들린 딸이 있는 가나안 여인을 만나셨습니다. 여인은  예수님께 "나를 불쌍히 여겨 달라"고 간청을 합니다. 그 요란한 간청은 제자들의 마음마저 불편하게 했습니다. 그녀를 향한 예수님의 대답은 우리를 당황하게 합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셨다. 
"자녀들의 빵을 집어서, 개들에게 던져 주는 것은 옳지 않다."
(마 15:26, 새번역)

 

유대인을 '자녀'로 이방인 여인을 '개'라고 호칭하는 예수님의 모습은 낯섭니다. 그러나 그것이 당시 유대인들의 상식이었습니다. 예수의 제자들에게도 당연했고, 주위 사람들도 이미 알고 있는 사실입니다. 심지어 소리지르며 간청하던 그 여인조차 '알고 있던 일'이었습니다. 때문에 "다윗의 자손이여"라고 예수님을 불렀던 것입니다. 우리에겐 낯선 예수님의 대답이, 그러나 당시 누구에게도 '상처가 되는 일'은 아니었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그녀의 대답은 더욱 놀랍습니다. 

 

그 여자가 말하였다. 
"주님, 그렇습니다. 그러나 개들도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는 얻어먹습니다."
(마 15:27, 새번역)

 

빵의 부스러기라도 좋습니다. 어차피 떨어져 버려지는 것이라도 좋습니다. 그 부스러기만으로도 충분할 것 같습니다. 여인의 대답은 예수님을 비롯한 주위 사람들을 놀라게 합니다. 그러나 그 놀라움은 이어지는 예수님의 말씀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습니다.

 

 

그제서야 예수께서 그 여자에게 말씀하셨다. 
"여자여, 참으로 네 믿음이 크다. 네 소원대로 되어라." 바로 그 시각에 그 여자의 딸이 나았다.
(마 15:28, 새번역)

 

예수님의 이적과 기사가 '국적'에 제한되지 않음을 선포하는 듯한 이 놀라운 선언은 의심할 여지 없이, 바로 이어지는 이적들의 '서사'가 됩니다. 더불어 하나님의 기준이 '국적'이 아니라 '믿음'에 있음을 선포하는 이 말씀 속 어디에도 배타성과 독선적 교리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조차 눈금으로 계측되는 정량의 평가가 아니라, '크고 적음'으로 구분되는 정성의 평가 속에 하나님 나라가 도래하고 존재한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기독교 신앙의 '경계'가 바로 이것입니다. 하나님나라를 희구하는 강렬한 믿음의 토대 위에 기독교 신앙은 세워졌고 국적과 계급이 아닌 그 신실함 위에 교회가 세워졌습니다. 

 

다리를 저는 자, 앞을 못 보는 자, 말 못하는 사람 등 여러 병자들이 '국적'에 상관없이 치유되었습니다. 심지어 예수님을 말씀을 듣기 위해 각양각처에서 모인 4천 여 명의 사람들도 '아무런 차별 없이' 단체 급식에 참여했습니다. 그들은 자신의 믿음의 크기 대로 나음을 얻고 자신의 믿음의 크기 대로 포만감을 얻었습니다. 그리고 그 '차별 없는' 은혜로 원래부터 '이방인'이었던 우리 역시 구원을 얻었습니다.

때문에 누군가 믿음의 국적을 정하고, 그 경계 밖의 사람들을 '적'으로 대한다면 그것은 예수님의 사역을 정면으로 거부하는 '비(非)기독교적 행위'이며 '반(反)복음'입니다. 우리 역시 주인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던 자들이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예수님이 아니었다면 나을 수 없는 질병에 갇혔을 자들이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 분의 은혜가 아니었다면 일곱 덩이의 떡과 두 마리의 물고기로 배를 채울 수 없었을 광야의 굶주린 자들이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