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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령과 약속의 은 나팔

mimnesko 2023. 1. 17. 11:38

- 민수기 10:1~10

 

군대에서 받는 여러 훈련 중에 매우 귀찮은 훈련 중 하나가 '전투준비태세'라는 훈련입니다. 사실 군대에서 경험하는 강도 높은 훈련(유격훈련이나 혹한기 훈련 등)도 힘들고 귀찮긴 하지만 전투준비태세, 보통 준비태세라고 부르는 이 훈련에는 비할 바가 못 됩니다.

이 훈련은 말 그대로 '전쟁이 일어났다'라는 가정에 따라 가장 신속하게 전투에 임하는 모든 과정을 훈련하는 것입니다. 사이렌이나 구두로 '데프콘'이 발령되면 그게 언제든 간에(밤이든 낮이든), 신속하게 개인 짐을 꾸려서 작전 지역으로 가는 차량에 탑승을 완료해야 합니다. 이 과정에 파기할 물건들과 후송할 물건, 여러 집기들에 대한 표기도 마쳐야 하고 전쟁에 필요한 모든 물자들을 확보해야 합니다. 여기에 '적이 화생방 무기를 사용하며 인근 지역이 오염되었다'라는 '화생방'까지 같이 발효가 되는 날엔 이 모든 과정을 방독면을 쓰고 해야 합니다. 이건 정말 해본 사람만 그 고통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군 생활을 하던 중, 실제로 이 '전투준비태세'가 발효된 적이 있었습니다. 한창 작계 지역에서 땅을 파고 있던 때, 갑작스런 데프콘이 발효된 것입니다. '이 모든 일이 실제상황이다'라는 전문을 들었을 때의 놀라움은 지금도 생생합니다. 모든 병사들은 훈련에 따라 완전무장을 하고 전투를 준비했습니다. 부대의 탄약고에서는 실제로 전시용 탄이 불출되었습니다. 설렁설렁 짬밥만 늘려가는 줄 알았던 고참들의 대응은 놀랍도록 기민했습니다. 적확하게 자신들의 위치를 이해하고 있었고, 또 후임병들이 당황하지 않도록 조언해 주기도 했습니다. 웃픈 일이지만, 오히려 가장 당황하고 허둥대던 사람들은 이제 막 임관한 장교들인 경우가 더 많았던 것 같습니다. 

 

훈련은 실전처럼, 실전은 훈련처럼. 귀가 아프도록 들었던 이야기지만 막상 실제 상황이 벌어지자 평소의 훈련량이 유감없이 드러나게 되는 것을 목격했습니다. 귀찮아도 꼭 이 훈련을 해야하는 이유를 생생하게 경험한 셈이었습니다. 이 모든 상황이 단 한번의 시그널, 즉 사이렌이나 구호 한 번으로 이뤄지고 있다는 사실도 경이롭기까지 했습니다. 

 

성경에는 두 종류의 나팔이 소개되고 있습니다. 하나는 오늘 본문에서 등장하는 은 나팔입니다. 히브리어로 하초츠라(h.as.os.erah, trumpet)라는 이 나팔은 요세프스의 기록에 따르면, 길이가 1규빗 정도였고 끝은 종 모양이었다고 합니다. 2세기 유대 주화에 이 나팔의 모양이 새겨져 있기도 합니다. 또 하나는 호른과 비슷한 모양인 양각나팔, 즉 쇼페르(so.par)입니다. 이름 그대로 양의 뿔로 만든 이 나팔은 '신호'나 '선포'를 나타낼 때 쓰였습니다. 깊게 울리는 음과 멀리 퍼지는 특성으로 전쟁 시 좋은 신호용 도구로 사용되기도 하였습니다(수 6:6, 20, 삼상 13:3, 삼하 2:28).

 

AD 2세기 유대 주화에 새겨져 있는 나팔

 

 

이 나팔의 날카롭고 우렁찬 소리에 맞춰, 마치 신호에 따라 군인들이 '전투준비태세'에 돌입하는 것처럼, 수백 만 명이 이스라엘 백성들이 정돈된 모습으로 움직이고 멈추는 것을 날마다 훈련했을 것입니다. 그들의 광야는 목적지나 도착지가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광야는 과정이었고 시험이었으며 전쟁터였습니다. 때문에 백성들이 정확한 신호를 구별하는 일은 그 어느 것보다 중요했습니다. 나팔 소리에 따라 회중은 움직이고 멈췄습니다. 또 지휘관이 한 자리에 모이기도 하고 전쟁을 위해 온 지파가 출병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은 나팔의 소리가 '명령'만을 위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전쟁만을 위한 것도 아니었습니다. 만약 그랬다면 그 소리는 불안과 동요의 상징이 되고 말았을 것입니다. 다시 전쟁이 시작되는 구나, 하는 걱정의 소리가 되고 말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 말씀은 나팔이 가진 가장 중요한 또 하나의 '역할'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또 너희 땅에서 너희가 자기를 압박하는 대적을 치러 나갈 때에는 나팔을 크게 불지니 그리하면 너희 하나님 여호와가 너희를 기억하고 너희를 대적에게서 구원하시리라, 또 너희의 희락의 날과 너희가 정한 절기와 초하루에는 번제물을 드리고 화목제물을 드리고 나팔을 불라. 그로 말미암아 너희의 하나님이 너희를 기억하시리라 나는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니라. (민수기 10:9~10)

 

나팔의 소리는 '너희의 하나님이 너희를 기억'하신다는 것을 의미했습니다. 그 어떤 전쟁이든지 하나님께서 함께하겠다는 약속의 상징이며 기억의 표시였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명령'과 '약속'은 같은 음, 같은 소리로 이스라엘 백성에게 전해졌던 것입니다. 이 약속과 명령은 이후 신약성경에서도 동일하게 찾을 수 있습니다. 

 

보십시오, 내가 여러분에게 비밀을 하나 말씀드리겠습니다. 우리가 다 잠들 것이 아니라, 다 변화할 터인데, 마지막 나팔이 울릴 때에, 눈 깜박할 사이에, 홀연히 그렇게 될 것입니다. 나팔소리가 나면, 죽은 사람은 썩어 없어지지 않을 몸으로 살아나고, 우리는 변화할 것입니다.
(고전 15:51~52, 새번역)

 

나팔은, 광야 민족에게 그랬던 것처럼 다시 한 번 '명령'과 '약속'으로 나타납니다. 모든 전쟁의 마침이 되는 주님이 오실 때, 우리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들었던 그 은 나팔의 소리를 듣게 될 것입니다. 그 웅장한 소리는 빛과 소금의 크리스천으로 부끄럼없이 살아가야 한다는 하나님의 명령임과 동시에, 우리의 낱낱의 삶을 기억하시고 축복하시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의 약속이기도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