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MEMBRANCE

고린도전서(15) : 부활의 몸

mimnesko 2012. 7. 31. 20:39

35 누가 묻기를 죽은 자들이 어떻게 다시 살아나며 어떠한 몸으로 오느냐 하리니

36 어리석은 자여 네가 뿌리는 씨가 죽지 않으면 살아나지 못하겠고

37 또 네가 뿌리는 것은 장래의 형체를 뿌리는 것이 아니요 다만 밀이나 다른 것의 알맹이 뿐이로되

38 하나님이 그 뜻대로 그에게 형체를 주시되 각 종자에게 그 형체를 주시느니라

 

 

죽음 그리고 부활

고린도교회의 뜨거운 논쟁 중 하나는 죽음과 부활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희랍철학과 해상무역이 무역이 융성했던 고린도(고린도는 그리스의 도시 중 하나입니다)에서 '죽은 사람의 부활'이라는 것을 이야기하는 것은 어쩌면 '비현실적'인 생각으로 보였을 것입니다. 때문에 고린도교회에선 이를 둘러싼 여러 견해가 촘촘하게 대립했을 것이라는 어렵지 않게 상상해볼 수 있습니다.

예수 시대에도 사두개인들은 '부활'을 부정하던 대표적인 유대의 분파였습니다. 정치/종교적 지도자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던 제사장의 그룹이었지만, 현세적인 세계관으로 내세의 삶을 인정하지 않았고, 내세에로의 관문과도 같던 부활에 대해선 냉소적인 반응을 보였습니다. 이런 유대의 그룹이 당시 고린도교회 내에도 있었을 것이라 생각하는 것은 어렵지 않습니다.

 

부활의 몸

영지주의적인 편향으로 인해 육적인 것을 '저급'하게 생각하던 사람들과 더불어, 오히려 지나치게 '현세적' 관점을 가진 사람들은 부활의 논쟁 역시 '현세적인 관점'에서 풀어갔습니다. 예를 들어 아이가 죽어선 어떤 모습으로 부활하는가? 날 때부터 절름발이었던 사람은 역시 절름발이로 부활하는가? 하는 등의 질문입니다. 이것은 기독교를 비판적으로 바라보는 진영에서 빈번하게 등장하는 이야기들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이런 사람들의 '현세적인 시선'에 대해 '어리석은 자'라고 단호하게 비판합니다.

 

사실 도시에 살아가는 사람들은 씨앗의 모양만 보고 어떤 식물이나 나무의 씨앗인지 알기 어렵습니다. 겨자씨만 하더라도 정작 씨는 좁쌀만큼이나 작고 볼품없다고 합니다. 그러나 막상 땅에 심기워 스스로 죽고(바울의 시선에서 볼 때), 다시 새로운 생명으로 부활하기 시작하면서 거대한 나무로 성장하게 됩니다. 씨앗만 놓고 볼 때는 그것이 겨자나무의 씨앗인지, 아니면 포도나무의 씨앗인지를 쉽게 구별하기 어렵다는 뜻입니다. 또한 정작 나무와 풀이 될 땐 씨의 모습이 남아 있지 않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이것은 현실의 삶과 부활의 삶이 얼마나 큰 간격으로 나뉘어 있는지를 분명하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현실의 삶의 '연장선'으로 천국의 삶을 만나는 것이 아니라, 현실의 삶과는 '전혀 다른' 그러나 그 영의 의식만큼은 온전히 연결되어 있는 새로운 삶을 부활을 통해 누릴 수 있습니다. 마치 겨자씨로 심기웠다가 겨자나무로 성장하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새로운 삶의 소망

부활은 기대와 소망의 삶입니다. 그것은 우리에게 다만 이생뿐의 삶이 아니라 영원한 생명이 보장되어 있음을 약속하여 주는 새로운 삶에 대한 소망입니다. 부활신앙이란 우리가 죽음으로 말미암아 오히려 생명을 얻는 역설의 삶을 보여주며, 그 첫 열매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였습니다. 예수는 죽었으나 부활했고 영원한 생명을 누렸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동시에 우리 크리스찬의 삶을 통해 믿지 않는 세상이 부활을 경험하고 새로운 생명을 경험하게 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아무런 가망없던 사람이 새로운 사람이 되며, 죽음뿐인 삶이 생명으로 가득하게 됩니다. 하나님을 떠난 죄악의 삶이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생명의 삶으로 돌이켜지는 것을 의미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