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MEMBRANCE

waterman

mimnesko 2011. 3. 19. 19:21

Waterman Hemisphere Moonlight CT

 

늘 누군가에게 선물하던 만년필을 큰 맘 먹고 구입했다.
중요한 미팅 자리에서 필통꺼내 필기구를 꺼내는 일이 어쩐지 얼굴 뜨거운 일로 여겨질 무렵부터 만년필을 하나 사야겠다, 라는 호기를 부렸다. 종이 위에 사각거리며 잉크를 남기는 그 소리와 느낌이 좋아서 만년필은 오래전부터 위시리스트에 있었지만, 딱히 큰 필요가 없다는게 늘 뒷목을 잡곤 했는데, 이 정도는 나이에 걸맞는 소품이야, 라는 억지와 함께 마침 일이 있어 나간 차에 광화문 핫트랙에서 구입했다.

워터맨 헤미스피어는 만년필로는 매우 착한 가격(몽블랑을 검색해보라!)의 프랑스 제품이지만, 그립감부터 펜촉의 느낌까지 만년필의 기본이 제대로 잡혀 있다. 컨버터(위의 사진에서 만년필 옆에 있는 것이 잉크를 담을 수 있는 컨버터)와 카트리지를 겸용으로 사용할 수 있으며
과하지 않은 디자인은 이 제품이 3, 40대를 겨냥한 것임을 짐작케 한다.

Waterman의 만년필은 그립감이 좋다. 손에 쥐었을 때 느껴지는 느낌이 나름대로의 설득력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두툼한 펜은 그에 어울리는 안정감이 있고 헤미스피어처럼 얇은 펜 역시 손에 쥐었을 때 '딱 좋은 정도'라는 느낌을 준다. 비슷한 가격 대의 LAMY나 PARKER도 훌륭하지만, 개인적으론 워터맨의 그립감을 가장 선호했기 때문에 내가 쓸 펜이라면 당연히 Waterman이라고 생각했다.

헤미스피어의 스틸 디자인은 주위 사람들이 "꽤 파커스럽다"라고 말할 정도로 심플하다. 좀 두툼한 엑스퍼트 시리즈나 워터맨하면 떠오르는 에디슨 시리즈의 디자인과는 느낌이 사뭇 다른데 베이직 시리즈임에도 불구하고 상위 시리즈들의장점을 고스란히 담아내고 있다.

펜촉은 보통(F)보다 얇은 EF로 했는데, 판매원의 말처럼 생각보단 얇지 않았다. 흔히 만년필로 떠올릴 수 있는 보통의 느낌 정도. 필기감은 만족스러웠다. 잉크의 번짐도, 종위 위를 날렵하게 미끄러지는 펜촉의 느낌도 좋았다. 

그렇게 한참을 적다보니 최근에는 무언가를 '적는다는 것'이 '손'이 아닌 '자판'일 경우가 월등히 많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누군가에게 손으로 적은 편지를 보낸 적이 도대체 언제였는지. 또 누군가로부터 그런 편지나 엽서를 받은 것이 또 언제였는지. 우편함의 용도가 '청구서함'으로 변경된지도 꽤 오래인 듯 하다. 한참을 종이위에 낙서하다보니 어느새 수신인이 불명한 편지가 되어 있다. 그래 원래 글은 이렇게 쓰는 건데... 라는 생각이 든다. 누군가에게 낙서처럼 마음을 담기도 하고, 누군가에게 낙서처럼 고백을 하기도 했는데..

오랜만에 손으로 편지를 쓴다.
몇몇 사람의 주소를 알아내기 위해 다시 문자메시지를 보내야 한다는 웃지 못할 요즘의 상황이지만 청구서 대신 우표가 붙은 편지를 받는 건, 입장을 바꾸어도 기쁜 일임에 틀림없으니까. 설령 그 내용이 "이 펜 무지 좋아. 너도 사" 일지라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