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IDBARR

깨어 있으라

mimnesko 2024. 3. 21. 13:50
마가복음 13:28~37

28 무화과나무의 비유를 배우라 그 가지가 연하여지고 잎사귀를 내면 여름이 가까운 줄 아나니
29 이와 같이 너희가 이런 일이 일어나는 것을 보거든 인자가 가까이 곧 문 앞에 이른 줄 알라
30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이 세대가 지나가기 전에 이 일이 다 일어나리라
31 천지는 없어지겠으나 내 말은 없어지지 아니하리라
32 그러나 그 날과 그 때는 아무도 모르나니 하늘에 있는 천사들도, 아들도 모르고 아버지만 아시느니라
33 주의하라 깨어 있으라 그 때가 언제인지 알지 못함이라
34 가령 사람이 집을 떠나 타국으로 갈 때에 그 종들에게 권한을 주어 각각 사무를 맡기며 문지기에게 깨어 있으라 명함과 같으니
35 그러므로 깨어 있으라 집 주인이 언제 올는지 혹 저물 때일는지, 밤중일는지, 닭 울 때일는지, 새벽일는지 너희가 알지 못함이라
36 그가 홀연히 와서 너희가 자는 것을 보지 않도록 하라
37 깨어 있으라 내가 너희에게 하는 이 말은 모든 사람에게 하는 말이니라 하시니라

 

 

1931년 허버트 윌리엄 하인리히(Herbert William Heinrich)는 "산업재해 예방 : 과학적 접근"이라는 책을 발표했습니다. 당시 트래블러스 보험사의 손실통제 부서에 근무하고 있었던 그는 여러 산업재해를 분석하다가 특이한 규칙성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1건의 중대한 산업재해가 발생하기 전 최소 그와 비슷한 이유로 발생했던 경미한 재해가 29번 있었고, 재해까지 이어지지는 않았으나 충분히 가능성이 있었던 사고가 무려 300번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는 이러한 통계를 바탕으로 대규모의 산업재해와 경미한 수준의 사고 사이에 존재하는 1:29:300의 비율을 제시하였습니다. 산업재해를 이야기할 때 결코 빼놓지 않고 거론되는 '하인리히의 법칙'이 바로 이것입니다. 

하인리히의 법칙이 알려주는 것은 우리가 뉴스에서 접하게 되는 대형 사고가 어느 날 갑자기 벌어질 확률이 대단히 낮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이미 여러 차례의 징조가 있었고 또 그와 흡사한 몇 번의 사고가 있은 후에야 돌이킬 수 없을 정도의 큰 사고로 이어진다는 것입니다. 바꿔 말하면 우리에게는 한 번의 대형재해를 막을 수 있는 29번의 기회가 있었고, 한 번의 대형 재해를 막을 수 있는 무려 300번의 징조가 있었다는 이야기입니다. 

사고는 늘 갑작스럽습니다. 
하지만 대형 화재가 발생하여 건물을 시커멓게 태우는 장면을 볼 때마다, 플라스틱처럼 흐물흐물 녹아내리는 강철 프레임을 볼 때마다, 우리는 대부분의 화재가 '인재'임을 알고 있습니다. 화재 경보기가 꺼져 있었거나, 몇 번의 누전 사고에도 불구하고 전선을 교체하지 않았거나, 소방의 위험이 있다는 걸 알면서도 대비책을 마련하지 않았다거나 하는 식의 보도가 이어지기 마련이기 때문입니다. 300번의 징조가 있다해도, 29번의 사고가 있었다 해도, 그래서 그 한 번의 사고는 늘 벼락 같이, 급작스럽게 우리에게 다가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네 번이나 "깨어 있으라(ἀγρυπνεῖτε)"고 경고하셨습니다. 그리고 제자들의 사명이 마치 '문지기'의 사명과도 같다고 비유하셨습니다. 문지기의 사명은 주인의 가산을 여러 위험으로부터 지키는 일입니다. 문지기가 깨어 있어야 하는 이유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깨어 있으라고 명령하신 것은, 깨어 있는 것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깨어서 이 시대의 징조를 살피라는 의미였을 것입니다. 

깨어 있으라 내가 너희에게 하는 이 말은 모든 사람에게 하는 말이니라 하시니라
마가복음 13:37

 

 

더불어 그 명령은 비단 제자들에게만 주어진 것이 아니었습니다. 마치 제3의 벽을 허무는 영화처럼, 예수님은 돌연 이천 년 후의 우리의 눈을 가만히 바라보시며 말씀하고 계신 것만 같습니다. '조심하고 깨어 있으라' 이 부름을 우리 역시 받았다는 사실을 기억하는 것은 중요합니다. 시대의 전조를 유심히 바라보며, 우리가 눈을 부릅뜨고 지켜야 할 것을 무엇인지를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그것이 오늘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문지기'의 사명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교회에 맡기신 '권한'이 무엇인지 이해하고, 그 사명을 완수하기 위해 깨어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정작 교회는 "깨어 있으라"에만 머무르고 있는 것 같습니다. 도둑들이 주인의 재산을 훔치고, 창고를 약탈하는 순간에도 그저 "깨어 있음"에 만족하고 있는 문지기를 보는 것만 같습니다. 그래서 주인이 돌아와 그 황망한 흔적들을 발견하고 우리에게 그 이유를 물었을 때, "저는 주인님의 말씀처럼 깨어 있었습니다. 그건 틀림없습니다."라고 밖엔 대답할 수가 없을 것입니다. 

깨어 있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지키는 일입니다. 지키기 위해선 시대의 징조를 읽어야 합니다. 300번의 경고와 29번의 구체적인 소리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기어이 일어나고야 마는 1번의 대형 사고 앞에서, 고작 내가 받은 것이 한 달란트 뿐이어서 뭐 어쩔 도리가 없었다는 핑계만 가득하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마음과는 이미 너무 멀리 떨어져 있는 것일지도 모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