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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

mimnesko 2024. 3. 13. 09:49
마가복음 11:1~11

1 그들이 예루살렘에 가까이 와서 감람 산 벳바게와 베다니에 이르렀을 때에 예수께서 제자 중 둘을 보내시며
2 이르시되 너희는 맞은편 마을로 가라 그리로 들어가면 곧 아직 아무도 타 보지 않은 나귀 새끼가 매여 있는 것을 보리니 풀어 끌고 오라
3 만일 누가 너희에게 왜 이렇게 하느냐 묻거든 주가 쓰시겠다 하라 그리하면 즉시 이리로 보내리라 하시니
4 제자들이 가서 본즉 나귀 새끼가 문 앞 거리에 매여 있는지라 그것을 푸니
5 거기 서 있는 사람 중 어떤 이들이 이르되 나귀 새끼를 풀어 무엇 하려느냐 하매
6 제자들이 예수께서 이르신 대로 말한대 이에 허락하는지라
7 나귀 새끼를 예수께로 끌고 와서 자기들의 겉옷을 그 위에 얹어 놓으매 예수께서 타시니
8 많은 사람들은 자기들의 겉옷을, 또 다른 이들은 들에서 벤 나뭇가지를 길에 펴며
9 앞에서 가고 뒤에서 따르는 자들이 소리 지르되 호산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10 찬송하리로다 오는 우리 조상 다윗의 나라여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 하더라
11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이르러 성전에 들어가사 모든 것을 둘러 보시고 때가 이미 저물매 열두 제자를 데리시고 베다니에 나가시니라

 

 

예수님의 생애를 담은 복음서, 즉 마태, 마가, 누가, 요한복음의 내용 중 무려 30%가 고난주간과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을 다루고 있습니다. 마태복음은 총 28장 중 7장을, 마가복음은 16장 중 5장을, 누가복음은 24중 4장을, 그리고 요한복음은 21장 중 9장을 고난 주간에 할애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공생애 기간이 3년 정도였음을 생각해 본다면 압도적인 기록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것은 이 땅의 가장 낮은 곳으로 오셨던 예수님의 삶 중에서 가장 중요한 시간이 바로 이 고난 주간이었음을 복음서 기자들이 동일하게 받아들이고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주가 쓰시겠다 하라

 

앞서 이야기한 것처럼, 예수님의 예루살렘의 입성은 네 복음서가 모두 다루고 있는 놀라운 사건입니다. 
이 사건은 나귀 새끼에 얽힌 신비한 일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예수님은 감람산*에서부터 이 여정을 시작하셨는데, 맞은 편 마을로 제자 둘을 보내어 ‘아무도 타보지 않은 나귀 새끼’를 끌고 오라고 하신 것입니다. 스가랴 9장의 예언을 떠올리게 하는 이 말씀은 매우 신비롭습니다. ‘아무도 타보지 않은’ 나귀(민 19:2‘ 신 21:3)를 특별히 지정하시고, 나귀를 순순히 내줄 리 없는 주인을 향해선 ‘주가 쓰시겠다 하라’는 특별한 명령을 하셨던 것입니다. 이런 이유로 마치 이 나귀 새끼는 하나님께 드림이 된 예물, 즉 고르반(קָרְבָּן)을 떠올리게 합니다(막 7:11).

 

고난 주간이 ‘고르반’의 선언으로 시작되는 것에는 깊은 의미가 있습니다. 고난 주간이야말로 예수님께서 스스로 하나님께 드림이 된 놀라운 여정이었기 때문입니다. 더불어 우리의 삶 역시, 십자가의 길을 따라 하나님께 드림이 되어야 함을 상기시켜 줍니다(레 27:28). 오늘 우리의 삶은 충분히 하나님께 드려지고 있을까요? 내 삶은 기꺼이 ‘주가 쓰시겠다’ 하실 만큼 구별되어 있는지, 혹시 우리 삶의 유익을 위해 주님을 ‘사용’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돌아보게 됩니다.

팀 켈러는 자신의 책 "탕부 하나님"에서 흔히 탕자의 비유로 알려진 누가복음 15장을 새롭게 바라보며 둘째 아들뿐 아니라 큰 아들 역시 '잃어버린 아들'이었음을 지적합니다. 

 

예수님이 무엇을 가르치고 계신지 이제 알겠는가?
두 아들 중 누구도 아버지를 사랑하지 않았다.
둘 다 아버지를 이용해 이기적인 목표를 이루려 했을 뿐이지
아버지를 사랑해서 즐거워하고 아버지를 위해 섬긴 게 아니다.
하나님께 반항해 그분과 멀어지는 길이 두 가지라는 뜻이다.
하나는 그분의 규율을 어기는 것이고,
또 하나는 모든 규율을 열심히 시키는 것이다. 

 

티모시 켈러 "탕부 하나님" 68쪽

 

 

길고 험한 오르막길

 

큰 명절을 맞아 예수살렘을 여행을 온 여행자들을 환영하던 시편 118편 25~26절의 찬양은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을 더욱 독특한 사건으로 만들어 주고 있습니다. 예수님과 제자가 이동했던 여리고부터 예루살렘까지의 여정은 실제로 ‘길고 험한 오르막길’입니다. 여리고는 해수면보다 무려 250미터나 낮은 도시이고, 그로부터 불과 15킬로미터 떨어져 있는 예루살렘은 해발 900미터에 위치해 있습니다. 그래서 이 가파른 여정의 끝에 마침내 당도한 순례자들에게 예루살렘의 사람들은 시편 118편을 외치며 환영하곤 하였습니다. 비록 시편 118편이 순례자나 랍비들을 위한 환호성이었다고 하더라도 ‘오는 우리 조상 다윗의 나라여!’라는 10절의 외침은 의미심장합니다.

분명 마가복음서의 저자는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을 마치 ‘장차 오실 왕’의 귀환처럼 묘사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나귀를 타고 오시는 예수님 앞에 자신의 겉옷을, 또 들에서 벤 나뭇가지를 늘어놓습니다. 의심할 여지없이 이것 역시 왕을 향한 태도입니다.

세상의 가장 낮은 곳으로 오셨던 예수님을 향해 ‘가장 높은 곳에 계신 이여, 우리를 구원하소서’라고 외치는 이스라엘 사람들의 외침이 절묘한 대조를 이룹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7일 뒤, 예루살렘에서도 높은 언덕, 골고다에서 바로 그 이스라엘 백성들에 의해 십자가에 달리셨기 때문입니다.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

 

여리고로부터 예루살렘 성전(hieron)**으로 이르는 가파른 언덕길은 마치 예수님의 생애를 축약해 놓은 것만 같습니다.

올림픽 시상대의 가장 높은 자리가 그러하듯, ‘가장 높은 곳’은 종종 영광의 자리로 비유되곤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오르신 가장 높은 곳은 유월절 어린양의 자리였고 죽음으로써 죽음을 대신하는 대속의 자리였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간절한 바람,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는 남김없이 이뤄졌습니다. 예수님은 가장 높은 곳에서 가장 큰 희생으로 우리를 구원하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우리에게 ‘가장 높은 곳’이란 영광의 자리가 아니라 '낮아짐의 자리'입니다. 종려주일은 이러한 ‘역설’을 일깨우는 절기입니다. 우리의 약함을 강함으로, 우리의 가난함을 부요함으로 바꾸시는 ‘역설’의 하나님을 만나는 소중한 주일입니다. 우리 삶에 고난과 고통이 닥칠 때마다, 역설의 하나님을 기억합니다. 목숨으로 목숨을 대신하셨던 고난의 주님을 기억합니다.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

 

 

 

                                  

 

* 감람산은 예루살렘의 입성의 출발점이 됩니다. 이는 스라갸서의 예언(14:4)을 실행에 옮기고자 하는 예수님의 관심이 구체화된 것으로 이후 나귀 새끼를 타고(9:9) 오시는 메시아의 모습과 자연스럽게 이어집니다.

 

** 마가는 제의적 의미의 ‘성전’(naos) 대신 물리적인 건물을 의미하는 ‘성전’(hieron)이란 단어를 사용하면서, 헤롯 성전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을 드러내고 있습니다(13:1-2; 14:14; 15:38). 헤롯의 성전은 스룹바벨의 제2성전을 개조하여 AD 64년에 완공되었으나 불과 6년 후인 70년, 로마군에 의해 완전히 파괴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