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IDBARR

변곡점

mimnesko 2024. 3. 12. 11:12
마가복음 10:13-22

13 사람들이 예수께서 만져 주심을 바라고 어린 아이들을 데리고 오매 제자들이 꾸짖거늘
14 예수께서 보시고 노하시어 이르시되 어린 아이들이 내게 오는 것을 용납하고 금하지 말라 하나님의 나라가 이런 자의 것이니라
15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하나님의 나라를 어린 아이와 같이 받들지 않는 자는 결단코 그 곳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하시고
16 그 어린 아이들을 안고 그들 위에 안수하시고 축복하시니라
17 예수께서 길에 나가실새 한 사람이 달려와서 꿇어 앉아 묻자오되 선한 선생님이여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18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가 어찌하여 나를 선하다 일컫느냐 하나님 한 분 외에는 선한 이가 없느니라
19 네가 계명을 아나니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도둑질하지 말라, 거짓 증언 하지 말라, 속여 빼앗지 말라, 네 부모를 공경하라 하였느니라
20 그가 여짜오되 선생님이여 이것은 내가 어려서부터 다 지켰나이다
21 예수께서 그를 보시고 사랑하사 이르시되 네게 아직도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으니 가서 네게 있는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따르라 하시니
22 그 사람은 재물이 많은 고로 이 말씀으로 인하여 슬픈 기색을 띠고 근심하며 가니라

 

역사에는 나름의 분기점들이 있습니다.

사람들의 삶과 생활양식은 어떤 '역사적 사건'의 전과 후로 나뉠 때가 많고, 이로 인해 그 사건을 직접 경험한 세대와 간접 경험한 세대 사이에 보이지 않은 틈이 생기곤 합니다. 세계사로 볼 땐 1차 세계대전, 2차 세계대전이 그런 분기점이 되었습니다.

특히 2차 세계대전은  비단 사람들의 삶의 양식 뿐만 아니라 철학과 신학, 경제, 사회학 등에서도 이전과 이후를 나눌 수 있는 명확한 분기점이 되었습니다. 전쟁의 참상은 당시 '인간'에 대해 갖고 있었던 무한한 긍정, 지속가능한 미래, 그리고 다소 낭만적인 기대의 분위기를 한 순간에 침몰시켰습니다.  사람과 사람이, 또 국가와 국가가 단지 서로의 생각이 다르다는 이유 하나로, 특정한 인종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이유로 얼마나 참혹한 결과를 만들어낼 수 있는지를 함께 목격했기 때문입니다. 도저히 전쟁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는 거대한 상처가 인류에 남겨졌습니다. 

 

우리나라는 '광복(1945)' '한국전쟁(1950년)'이 그런 분기점이 될 수 있습니다. 이식된 '민주주의'의 체계는 익숙해질 틈도 없이 전혀 다른 사상의 체계로부터 공격을 받았으며, 이로 인해 유럽의 국가들이 몇 백 년 동안, 유혈과 무혈의 혁신을 통해 지난한 단계를 밟았던 시민 사회의 협의를 단 한 순간에, 심지어는 1, 2년 사이에 확립해야하는 상황에 놓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로 인해 군부의 독재나 문민정부의 출범 등은 거대한 작용과 반작용의 힘으로 한국 사회를 뒤흔들었습니다. 

이러한 정치, 사회적 갈등 위에 '국가부도의 사태'를 맞이하여 경제적으로도 거대한 분기점을 만들었습니다. 우리 주위에서도 어렵지 않게  IMF 이전과 이후를 나누는 분들을 만나게 됩니다. 돌아보면 한국 사회는 거대한 발전의 흐름 속에서 급격하게 바뀌는 수많은 '변곡점'을 통과하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우리는 역사를 예수님의 탄생을 기준으로, 즉 주전(BC : Before Christ)과 주후(AD : anno Domini)로 나눕니다.*

역사의 그 어떤 '변곡점'보다 가장 거대한 변화가 바로 그 순간 이뤄졌기 때문입니다. 동시에 예수님은 당시 유대인들에게도 말 그대로 혁명과도 같은 '변곡점'이었습니다.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아무런 이유도 없이 예수님에 대해 분노의 감정을 가졌던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은 당시 종교적 권력을 인정하지 않으셨고, 바리새인들이 독점하고 있던 율법의 해석에 대해서도 동의하지 않으셨습니다. 심지어 그들의 율법 해석이 그 본래의 의미와는 달리 변질되어 있다고 강하게 질책하시기도 하셨습니다. 

 


 

예수님을 찾아 온 사람은 유명한 질문("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을 합니다. 아마도 그는 이미 여러 명의 랍비들에게도 동일한 질문을 했을 것이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흡족할 만한 대답을 얻지 못했을 것입니다. 

 

 

네가 계명을 아나니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도둑질하지 말라, 거짓 증언 하지 말라,
속여 빼앗지 말라,
네 부모를 공경하라 하였느니라

 

마가복음 10:19

 

 

 

예수님의 대답은 다소 평범해 보입니다.  우리가 익히 잘 아는 계명이 등장합니다. 여섯 번째 계명에서부터 아홉 번째 계명이 나열됩니다. 그리고 새로운 의무("속여 빼앗지 말라")가 첨가된 후, 맨 마지막에 다섯 번째 계명이 덧붙여집니다. 그런데 당시 바리새인들에게 가장 중요하게 생각되었던 첫 번째부터 네 번째의 계명, 그리고 마지막 열 번째 계명이 언급되지 않습니다. 왜 이런 선택이 일어났을까요? 예수님께서 율법을 모르셨을리 없기 때문에 이러한 '선택'에는 분명한 '의도'가 있음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질문자는 예수님의 평범한(?) 답변에 대한 실망감을 애써 감추지도 않습니다. 

 

그가 여짜오되 선생님이여 
이것은 내가 어려서부터 다 지켰나이다

 

마가복음 10:19

 

 

율법을 지켜서 '영생'을 얻을 수 있다면, 이미 자신은 그 '영생'을 얻고도 남았을 것이라는 그의 자신감은 예수님이 미처 언급하지 않으셨던 첫 번째부터 네 번째 계명도 남김없이 모두 지켜왔음을 은근히 드러내고 있습니다. 만약 율법을 지키는 것이 영생을 얻는 유일한 방법이라면, 이미 자신에게는 차고도 넘칠 자격이 있다는 것입니다. 주위 사람들의 옅은 실망감도 눈에 보이는 것 같습니다.

"율법을 말하는 걸 보니, 저 분 역시 바리새파의 랍비 중 한 분이셨군." 

 

그러나 예수님은 율법을 '지키는 것'보다 그 율법이 의도하고 있는 '본래의 의도'를 아는 것이 더 중요함을 사람들에게 알려주고 싶으셨습니다. 예수님은 그 사람에게 언급하지 않으셨던 첫 번째 계명부터 네 번째 계명의 '의도'를 다음과 같이 요약하셨습니다. 

 

 

예수께서 그를 보시고 사랑하사 이르시되
네게 아직도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으니
가서 네게 있는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따르라 하시니

 

마가복음 10:21

 

 

예수님의 말씀은 선명합니다. "하나님만을 섬긴다는 것은 내 삶의 모든 필요를 공급하시는 분이 '하나님'이심을 인정한다는 것이다. 하나님 외의 다른 것이 내 앞에 놓일 때, 그것은 '우상'이 된다. 돈과 재산이 얼마나 쉽게 '우상'으로 변모하는지를 알면 모두들 깜짝 놀랄 것이다. 안식일을 거룩히 지킨다는 것 역시 내 삶의 질서를 드러내는 일이다. 당신의 우선순위가 무엇인가? 당신의 믿음을 정량화할 수는 없겠지만, 당신의 우선순위로 정성의 평가는 얼마든지 가능하다. 나에게로 굽힌 팔을 펴서, 주위 사람들 중에 가난한 사람, 억눌린 사람, 슬픈 마음을 가진 사람을 없게 하는 것이야 말로 하나님을 섬기는 일이다. 만약 그들을 보고도 못 본 척 한다면, 그게 바로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게 부르는 것이 아니겠는가?" 

 

이것이 율법의 본질입니다. 어려서부터 모든 율법을 다 지켰다고 자부했던 그는, "네게 있는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 그리하면 네가 그토록 원하던 '영생'을 얻게 될 것이다, 라는 예수님의 말씀에 당황했습니다. 그가 영생을 원했던 것은 자신이 '부유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가진 것이 많기에 오래 살고 싶었던 것입니다. 이 편안함과 안락함을 죽음에게 빼앗기고 싶지 않았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영생'을 '하늘 보화'로 바꿔 대답하셨습니다. 한 신학자의 지적처럼, 예수님의 이 대답은 당시 대중들이 가지고 있던 '영생'의 의미를 완전히 새롭게 했습니다. "우리가 은행에 저금하는 것은, 나중에 은행에 들어가서 살고자 하기 때문이 아니다. 아무도 그런 사람은 없다. 은행은 돈을 모으는 곳일 뿐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은행에 저금하는 것은, 나중에 꼭 필요한 곳에 그 돈을 사용하기 위해서이다." 하늘 나라는 우리가 받은 놀라운 은헤의 임시 저장소입니다. 내가 가장 필요한 바로 그 순간, 보화처럼 쌓여진 은혜의 힘을 빌릴 수 있습니다. 마치 적립된 예금을 찾는 것처럼, 그 은혜를 인출하게 됩니다. 

 

예수님은 돈이 많았던 그 사람이 가장 잘 이해하는 방식으로 설명해 주셨습니다. 자신의 '의'를 자랑하려고 했던 그 사람은, 귀신 들인 아이를 데려 온 아이의 아버지와 조금도 다르지 않습니다. 제 아무리 훌륭한 랍비라고 하더라도, 내가 묻는 질문에는 대답을 못하더라, 는 식의 자만감이 있었습니다. 두 사람 모두, 자신 앞에 계신 분이 '정확하게' 누구이신지 몰랐던 것입니다. 

 

"나의 믿음 없음을 용서해 주세요"라고 울부짖던 아이의 아버지나 슬픈 기색을 띄고 근심하며 돌아가는 재산가 모두 자신의 근원적인 문제의 해결을 원하는 것처럼 보였지만, 실제로는 자신이 주장하던 그 '근원적인 문제'가 무엇인지조차 몰랐습니다.

매주 예배를 드리지만, 여전히 '기독교인'은 결코 아닌 사람들이 주위에 많습니다. 매주 '기도'를 하지만, 그 기도의 내용이 정말 이뤄지는 것에 대해선 회의적인 사람들을 종종 만나게 됩니다. 생각해보면 그들이 가진 진정한 두려움은, "정말 하나님의 뜻을 알게 될까봐"가 아닐까요? 마치 예수님을 찾아온 아이의 아버지처럼, 또 재산가처럼, 내 생각과 너무나 다른 '하나님의 뜻'을 행여 발견하기라도 할까봐, 눈과 귀를 닫은 예배와 기도를 드리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물론 최근엔 중립적인 표현으로 BCE(Before Common Era), CE(Common Era)를 쓰는 경우가 많습니다. 우리나라에선 1961년부터 주전/주후로 BC/AD를 표현하기 시작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