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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 안의 원

mimnesko 2024. 3. 7. 09:00

 

마가복음 9:38~50

38 요한이 예수께 여짜오되 선생님 우리를 따르지 않는 어떤 자가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내쫓는 것을 우리가 보고 우리를 따르지 아니하므로 금하였나이다
39 예수께서 이르시되 금하지 말라 내 이름을 의탁하여 능한 일을 행하고 즉시로 나를 비방할 자가 없느니라
40 우리를 반대하지 않는 자는 우리를 위하는 자니라
41 누구든지 너희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여 물 한 그릇이라도 주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가 결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
42 또 누구든지 나를 믿는 이 작은 자들 중 하나라도 실족하게 하면 차라리 연자맷돌이 그 목에 매여 바다에 던져지는 것이 나으리라
43 만일 네 손이 너를 범죄하게 하거든 찍어버리라 장애인으로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두 손을 가지고 지옥 곧 꺼지지 않는 불에 들어가는 것보다 나으니라
44 (없음)
45 만일 네 발이 너를 범죄하게 하거든 찍어버리라 다리 저는 자로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두 발을 가지고 지옥에 던져지는 것보다 나으니라
46 (없음)
47 만일 네 눈이 너를 범죄하게 하거든 빼버리라 한 눈으로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두 눈을 가지고 지옥에 던져지는 것보다 나으니라
48 거기에서는 구더기도 죽지 않고 불도 꺼지지 아니하느니라
49 사람마다 불로써 소금 치듯 함을 받으리라
50 소금은 좋은 것이로되 만일 소금이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이를 짜게 하리요 너희 속에 소금을 두고 서로 화목하라 하시니라

 

 

주일 아침, 말끔한 차림의 청년 두 명이 교회 문 앞에 서있었습니다. 무슨 일인지 물었더니 OO이를 데리러 왔다는 대답이 돌아왔습니다.  OO이는 당시 교회에 출석하던 청년이었습니다. '데리러 왔다'는 말이 무슨 뜻인지 물었습니다. 그랬더니 말 그대로 '데리러 왔다'고 대답했습니다. 

 

"OO이는 이제 곧 예배를 드릴텐데, 그럼 예배 후에 만나시겠어요?"

"아닙니다. 그 전에 OO이를 데려가야 합니다."

"무슨 뜻이죠, 그건?"

"OO이는 대학시절 저희 모임에서 온전한 예배를 드려왔습니다. 그런데 졸업한 후엔 이곳에서 주일을 보낸다는 소식을 듣고 데리러 왔습니다." 

"여기가 교회란 건 알고 있죠?"

"교회라고 해서 다 교회는 아니니까요."

"....진심입니까?"

"물론 진심입니다. 정말 하나님이 계신 곳에서 예배를 드려야 합니다."

 

저는 확신에 찬 두 청년을 가만히 쳐다 보았습니다. 도대체 누가 이 청년들에게 그런 '확신'을 심어준 것일까? 도대체 누가 무슨 기준으로 교회를 조각조각 나누고 있는 것일까? 저는 정중히 두 청년에게 "그런 이유라면 저는, OO이를 여러분들 모임에 보내긴 어려울 것 같습니다만, 스스로 판단할 수 있는 OO이에게 물어보는 건 어떨까요."라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청년들은 "이미 공동체를 떠나 온전히 판단할 수 있는 상태가 아닙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그 때 처음 가슴 깊은 곳에서 울컥하는 마음이 올라오는 것을 느꼈습니다. 

 

나중에 듣고 보니 두 청년은 OO이가 재학했던 대학교 내 선교단체 선배들이었습니다. 그 선교단체에서는 기존의 '교회'들은 모두 타락했기 때문에 그곳에서 예배를 드려서는 안 된다고 학생들에게 가르쳤다고 합니다. 그래서 주일이면 그 기독단체의 중앙 본부에 모여 함께 예배를 드린다고도 했습니다. 무엇보다 놀라웠던 건 그들의 태도에서 역력히 드러나는 이스라엘 백성들 못지 않은 '선민의식'이었습니다. 오직 자신들의 단체만이 '온전한 교회'라는 생각이었습니다. 

 

오랜 시간이 지났지만, 지금도 종종 그런 신앙인들을 보게 됩니다. 신학적으론 '열광주의자' 정도로 분류할 수 있는 그들은 복음과 교회와 예배를 독점합니다. 자신들에게만 그 '정당성'이 있다고 주장하며, 이에 대한 모든 반작용을 '핍박'으로 이해합니다. 사실 대부분의 '이단'들이 비슷한 프로세스를 가지고 있습니다. 한 발자국 떨어져서 보면 말도 안 되는 비상식의 일들이 '신앙'이라는 미명 하에 폭력적으로 이뤄집니다. 이들의 이너 써클은 견고하고 조직적이며, 단호하고 차별적입니다. 

 


 

 

예수님의 메시아 되심을 확인한 제자들은, 예수님을 '독점'하고자 했습니다. 예수님의 관심은 '하나님 나라'였으나, 이들의 관심은 '지상의 왕국'이었습니다. 예수님의 관심은 '회개와 구원'이었으나, 이들의 관심은 '성공과 명예'였습니다. 이들의 욕심은 집요했습니다. 주위 누군가가 예수님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는 것을 찾아가 금지시킬 정도였습니다. 

 

 

요한이 예수께 여짜오되 
선생님 우리를 따르지 않는 어떤 자가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내쫓는 것을 우리가 보고 
우리를 따르지 아니하므로 금하였나이다

 

마가복음 9:38

 

 

이 의기양양한 제자들의 말에 예수님은 찬물을 끼얹습니다. "금하지 말라".

기대와 달랐던 예수님의 대답에 제자들은 할 말을 잃었습니다. 그럼 저들에게까지 우리의 몫을 나눠야 한단 말이야? 마치 그렇게 항변하는 듯한 그들의 속마음이 눈에 보이는 것만 같습니다. 예수님은 대답하셨습니다. 

 

 

또 누구든지 
나를 믿는 이 작은 자들 중 
하나라도 실족하게 하면 
차라리 연자맷돌이 그 목에 매여 
바다에 던져지는 것이 나으리라

 

마가복음 9:42

 

예수님은 제자들의 비좁은 마음을 꿰뚫어 보셨습니다. 교회를 자신의 소유라고 여기는 마음. 특정한 형태의 믿음만이 바른 것이라고 주장하는 태도. 저를 찾아왔던 두 청년의 눈 속에서 제가 보았던 것이 바로 이것이었습니다. 어느 신학자는 "요한의 태도는 오늘날까지도 교회를 괴롭히는 증상이다. 누구나 그렇지만 특히 전임 성직자나 신학자들은 교회가 우리 소유라고 생각하기 쉽다. 평생 특정 전통이나 형식 안에서만 예배하고 기도한 사람들은 이것이 '옳은 방식'이라고 생각하기 쉽다. 그렇다고 다른 형식보다 더 풍성하고 만족스러운 형식이 없다는 말은 아니다. 그러나 이 세상에는 기본적인 신학 교육이나 훈련을 전혀 받은 적이 없는 사람들 중에도 예수님이 '나를 믿은 이 작은 사람들'이라고 언급하실 그리스도인들이 수없이 많다. 훈련과 교육을 받은 사람들이 조금이라도 이들을 배제하려 한다면 그들은 심각하 문제에 처할 것이다."라고 지적했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볼 때, 손을 자르고 눈을 빼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차별과 배제의 마음에 주시는 엄중한 경고이기도 합니다. 그 직접적인 의미는 "예수님이 왕이 되셨을 때 품을 명예욕 때문에 제자 위치에서 탈락하지 않도록 조심하라"는 뜻이기도 합니다. 그들의 특권 의식, 선민 의식은 깊고도 집요했습니다. 하지만 정작 십자가 앞에서 우리는 그들이 어떻게 행동했는지를 이미 알고 있습니다.

 

혹시 우리에게는 이런 '차별과 배제'의 마음을 없을까요? 예수님의 제자가 된다는 것은, 물론 세상이 감당하기 어려운 축복의 특권이 존재하지만, 그것이 차별과 배제의 탑 위에 세워지지는 않습니다. 의사는 히포크라테스의 선서를 합니다. 판사나 검사는 법 앞에서 만민이 평등하다는 엄숙한 선언을 합니다. 만약 의사와 판사의 목적이 그저 '돈'이라면 우리는 그들의 의술을 끊임없이 의심해야 하고 그들의 판결을 회의해야만 합니다. 예수님의 제자 역시 다르지 않습니다. 제자의 길의 목적이 '예수님을 따르는 것', '예수의 길을 이뤄가는 것'에 있지 않고 명예와 돈에 머문다면(얼마나 많은 목회자들이 이 위험에 노출되어 있을까요), 그들의 제자 됨은 끊임없이 의심받게 될 것입니다. 심지어 눈과 손이 없어지는 것이 더 나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차별과 배제는 필연적으로 '혐오'를 동반합니다. 교회가 세상을 차별의 눈으로 보았을 때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제는 반대로 세상의 차별과 배제의 시선을, 그 '혐오'를 교회가 견뎌야 합니다. 우리가 간구해야 할 것은 교회가 더욱 단단한 '이너 써클' 원 안의 원을 만들어 더 큰 차별과 배제를 만드는 것이 아님은 너무나도 분명합니다. 그러나 이 일은 참 어렵고 힘든 일입니다. 정말 강한 사람만이 주위의 경계를 무너뜨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엔딩노트는 그것을 분명히 합니다.

 

"강하고 담대하라. 실족하지 말라.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 화목의 소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