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IDBARR

그건 니 생각이고

mimnesko 2024. 2. 1. 10:19
신명기 16:18~17:13

18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주시는 각 성에서 네 지파를 따라 재판장들과 지도자들을 둘 것이요 그들은 공의로 백성을 재판할 것이니라
19 너는 재판을 굽게 하지 말며 사람을 외모로 보지 말며 또 뇌물을 받지 말라 뇌물은 지혜자의 눈을 어둡게 하고 의인의 말을 굽게 하느니라
20 너는 마땅히 공의만을 따르라 그리하면 네가 살겠고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주시는 땅을 차지하리라
21 네 하나님 여호와를 위하여 쌓은 제단 곁에 어떤 나무로든지 아세라 상을 세우지 말며
22 자기를 위하여 주상을 세우지 말라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미워하시느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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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흠이나 악질이 있는 소와 양은 아무것도 네 하나님 여호와께 드리지 말지니 이는 네 하나님 여호와께 가증한 것이 됨이니라
2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주시는 어느 성중에서든지 너희 가운데에 어떤 남자나 여자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목전에 악을 행하여 그 언약을 어기고
3 가서 다른 신들을 섬겨 그것에게 절하며 내가 명령하지 아니한 일월성신에게 절한다 하자
4 그것이 네게 알려지므로 네가 듣거든 자세히 조사해 볼지니 만일 그 일과 말이 확실하여 이스라엘 중에 이런 가증한 일을 행함이 있으면
5 너는 그 악을 행한 남자나 여자를 네 성문으로 끌어내고 그 남자나 여자를 돌로 쳐죽이되
6 죽일 자를 두 사람이나 세 사람의 증언으로 죽일 것이요 한 사람의 증언으로는 죽이지 말 것이며
7 이런 자를 죽이기 위하여는 증인이 먼저 그에게 손을 댄 후에 뭇 백성이 손을 댈지니라 너는 이와 같이 하여 너희 중에서 악을 제할지니라
8 네 성중에서 서로 피를 흘렸거나 다투었거나 구타하였거나 서로 간에 고소하여 네가 판결하기 어려운 일이 생기거든 너는 일어나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택하실 곳으로 올라가서
9 레위 사람 제사장과 당시 재판장에게 나아가서 물으라 그리하면 그들이 어떻게 판결할지를 네게 가르치리니
10 여호와께서 택하신 곳에서 그들이 네게 보이는 판결의 뜻대로 네가 행하되 그들이 네게 가르치는 대로 삼가 행할 것이니
11 곧 그들이 네게 가르치는 율법의 뜻대로, 그들이 네게 말하는 판결대로 행할 것이요 그들이 네게 보이는 판결을 어겨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말 것이니라
12 사람이 만일 무법하게 행하고 네 하나님 여호와 앞에 서서 섬기는 제사장이나 재판장에게 듣지 아니하거든 그 사람을 죽여 이스라엘 중에서 악을 제하여 버리라
13 그리하면 온 백성이 듣고 두려워하여 다시는 무법하게 행하지 아니하리라

 

 

지금은 안타깝게도 해체를 했지만, '장기하와 얼굴들'이라는 매력 만점의 밴드는 탁월한 연주 실력만큼이나 개성 넘치는 멜로디와 노랫말로 잘 알려져 있습니다. '싸구려 커피'라는 곡에서도 '눅눅한 비닐 장판에 발바닥이 쩍 달라붙었다 떨어진다'라는, 경험이 없이는 절대로 쓸 수 없는, 그러나 듣는 순간 바로 알아차릴 수 있는 정겨운 노랫말이 담겨 있습니다.  

 

그 중 제가 좋아했던 넘버는 오늘 묵상의 제목과 같은 '그건 니 생각이고'였습니다. 이 곡을 들을 때마다 누군가 귀에 고스란히 전달해주고 싶다는 강한 충동(?)을 느끼곤 했습니다.  "......알았어 알았어 뭔 말인지 알겠지마는, 그건 니 생각이고"라는 노랫말에 통쾌함을 느끼는 사람이 비단 저뿐만은 아니었을 것 같습니다. 

 

정말 많은 사람들은 '자기 생각'으로 살아갑니다. 당연해 보이는 이 말이 당연하지 않은 것은, 사회란 다양한 사람들의 '생각'이 모인 거대한 저수조와 같기 때문입니다. 만약 모두가 '자기 생각'대로만 살아간다면 어떤 일치나 합의를 얻어내기 어려울 것이 분명합니다. 홉스(Thomas Hobbes)의 예리한 지적처럼 "만인이 만인에 대한 투쟁"만이 가득하겠지요. 그래서 여러 철학자들이 이러한 '사회적 합의'에 대해 다양한 의견을 내놓았습니다. 우선 논의의 '대전제'가 필요했습니다. 우리가 '어디'에 도달하기 위해 합의를 해야하느냐, 하는 문제입니다. 대부분의 철학자들은 그것을 '정의'라고 보았습니다. 조금 더 폭넓게 말한다면 '공공선'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문제는 남습니다. '그렇다면 정의(justice)는 누가, 어떻게 정의(define)하는가?'입니다. 어떤 학자는 다수에게 행복을 주는 것이 '정의'라고 말합니다. 또 어떤 사람은 공동체에게 도움이 되는 것을 '정의'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이러한 정의에도 '법적인 정의', '분배의 정의' 등등 다양한 논의가 이뤄집니다. 과연 '정의'가 사회 다수의 합의로 만들어질 수 있는 걸까요? '공공선'이라는 것이 정말 존재하기는 하는 걸까요? 

 

홉스가 경제적인 정의에 대해 깊은 회의를 드러냈다면, 흄(David Hume)은 사람들이 '사고한다는 것' 즉 '인식론' 자체에 대해 깊은 회의를 드러냈습니다. 두 사람의 걸출한 철학자들에 의해, 인간은 공공선을 알 수도 없고(경험한 적이 없기 때문에), 따라서 그것을 추구할 수도 없는(서로의 이기심의 크기가 줄지 않기 때문에), 말 그대로 '야수'와 다를 바가 없는 상황이 되고 말았습니다. 과연 17세기의 인간은 모두 다 그 모양이었을까요? 

 

두 사람의 철학자들이 소거했던 한 가지 가능성은 바로 '종교'였습니다.

보다 정확히 말한다면 이미 실패한 것이 명백해 보이는 이 '종교적 경험'을 대신할 수 있는 '실질적이고 실증가능하며 동시에 선험적인' 사회적 이상이 필요하다는 주장입니다. 존 로크나 루소, 또 칸트나 헤겔에 이르기까지 이 철학자들의 영향력은 이어졌습니다. 인류가 근대에서 현대로 넘어가기 위해선, 이들의 '지팡이'가 꼭 필요했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자본'이 모든 가치를 집어삼키고 있는 세상입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자본이 곧 정의다"라는 자조섞인 말을 하기도 하지만, 조금만 생각해봐도 그 말의 의미가 "우리는 지금 방향을 잃었다"라는 것임을 눈치챌 수 있습니다.  '자본'은 '정의' 혹은 '공공선'의 수단이 될 수 있을지 몰라도(아주 긍정적으로 해석했을 경우) 그 자체가 될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더 이상 '공공선'이나 '정의'는 아무런 의미가 없을까요? 아닙니다. '정의란 무엇인가'라는 어려운 책이 세계적인 베스트셀러가 되었던 이유는 지금 우리에게 어떤 '나침반'이 필요하다는 방증이기도 합니다. 이대로 흘러가서는 안 된다는 본능적인 거부감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종교'에서는 이 문제가 너무 쉽게 해결됩니다. '공공선'과 '정의'가 바로 하나님 자신이기 때문입니다. 비단 신학자가 아니더라도 이 점을 부인하기는 어렵습니다.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이 우리의 '선' 그 자체이며, '정의'이고, '사물 그 자체'(칸트의 말을 빌리자면)이며 동시에 '초인'(헤겔의 생각과는 좀 다르겠지만)입니다. 이 간단한 해결이 철학자들에게 불편했던 것은 그럼 도대체 어떻게 굴곡없이, 오차없이 '하나님의 정의'를 알고 실천할 수 있는가, 라는 문제 때문이었습니다.

과거 광야 성막시절에는 가능할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께 직접 물어보면 되기 때문입니다. 절대 '선'이신 하나님의 결정에는 추호의 오차도 없습니다. 그분은 상황뿐 아니라 그 상황에 선 사람들의 중심을 꿰뚫어 봅니다. 그 분 앞에서는 모든 것이 명확해집니다. 하나님은 당신을 직접 대면할 수 없는 사람들에겐, 대리인들을 통해 당신의 뜻을 전합니다. 

 

 

레위 사람 제사장과 당시 재판장에게 나아가서 물으라 
그리하면 그들이 어떻게 판결할지를 네게 가르치리니
(9절)

 

 

 

레위 사람 제사장과 재판장이 하나님의 대리인들입니다. 하나님이 그들을 통해 말씀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과연 사람들은 대리인들을 통해 전해진 '하나님의 정의'에 순종했을까요? 아닙니다.  오히려 그 판결을 '자기 식대로' 해석하고 '좌로나 우로' 치우치는 결정을 내리게 됩니다. 

 

 

곧 그들이 네게 가르치는 율법의 뜻대로, 
그들이 네게 말하는 판결대로 행할 것이요 
그들이 네게 보이는 판결을 어겨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말 것이니라
(11절)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할까요? 어떻게 절대 '선'이신 하나님의 판결을 어기고 자기 식대로 생각할 수 있는 것일까요? 어떻게 '정의' 그 자체이신 하나님의 판결에 반기를 들 수 있는 걸까요? 아마도 사람들은 레위 제사장과 재판장의 판결을 전능하신 하나님의 결정이 아니라 하나의 '의견' 정도로 여겼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자신있게 말하는 거죠. "그거 니 생각이고...." 하나님은 이러한 사람들의 행위를 '무법'이라고 단정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대처는 단호합니다. 

 

 

사람이 만일 무법하게 행하고 
네 하나님 여호와 앞에 서서 섬기는 제사장이나 재판장에게 듣지 아니하거든 
그 사람을 죽여 이스라엘 중에서 악을 제하여 버리라
그리하면 온 백성이 듣고 두려워하여 다시는 무법하게 행하지 아니하리라
(12~13절)

 

 

C. S. 루이스의 지적처럼, 어쩌면 공공선은 사람들의 합의나 논의로 도달할 수 있는 지점이 아닐 지 모릅니다. 소위 '사회적 합의'라는 것이 '차선'보다는 '차악'에 가깝다는 걸 인지하는데 많은 시간과 노력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지금 세계에서 벌어지고 있는 전쟁의 속내만 들여다봐도 알 수 있는 일입니다. '이미 실패한 것이 명백해 보였던' 하나님을 떠난 사람들의 현실은 오히려 '실패가 명백해' 보이지만, 어느 누구도 그것을 '실패'라고 말하지 못하는 아이러니 속에 놓여 있습니다. 딱히 대안이 없기 때문입니다. 물론 이러한 상황을 교회가 자초한 점도 적지 않습니다. 

 

레위 제사장이나 재판장에게 맡겨졌던 이 놀라운 사명은 이후 교회에 위임되었습니다. 한스 콘첼만이 지금의 시대를 '교회의 시대'라고 말한 의미가 이것입니다. 이젠 교회가 '하나님의 거룩한 뜻'으로 세상 가운데 서야 할 때라는 것입니다. 세상의 빛으로 오셨던 '예수 그리스도'를 경험했던 교회 만이 세상 가운데 참 진리, 참 생명, 참된 선이 무엇인지 말해 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교회 속에도 수없이 많은 '내 생각'들이 난무합니다. 저마다 하나님의 뜻이라고 주장하지만, 들으면 들을 수록 하나님의 뜻과는 거리가 있어 보이는 말들이 넘쳐 납니다. 종교적인 결의와 자기의 신념을 구분하지 못하는 목회자들이 오히려 세상 속에 있어야 할 교회의 자리를 협소하게 합니다. 예수가 없는 설교는 공허하고, 신학의 고민이 없는 선포는 무모하기 짝이 없습니다. 

 

어쩌면 하나님께서 지금 우리에게 정말 하고 싶은 말씀은 이것이 아닐까요?

그건 니 생각이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