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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보(捐補)와 헌금(獻金)

mimnesko 2024. 1. 29. 10:23
신명기 14:22~29

22 너는 마땅히 매 년 토지 소산의 십일조를 드릴 것이며
23 네 하나님 여호와 앞 곧 여호와께서 그의 이름을 두시려고 택하신 곳에서 네 곡식과 포도주와 기름의 십일조를 먹으며 또 네 소와 양의 처음 난 것을 먹고 네 하나님 여호와 경외하기를 항상 배울 것이니라
24 그러나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자기의 이름을 두시려고 택하신 곳이 네게서 너무 멀고 행로가 어려워서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 풍부히 주신 것을 가지고 갈 수 없거든
25 그것을 돈으로 바꾸어 그 돈을 싸 가지고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택하신 곳으로 가서
26 네 마음에 원하는 모든 것을 그 돈으로 사되 소나 양이나 포도주나 독주 등 네 마음에 원하는 모든 것을 구하고 거기 네 하나님 여호와 앞에서 너와 네 권속이 함께 먹고 즐거워할 것이며
27 네 성읍에 거주하는 레위인은 너희 중에 분깃이나 기업이 없는 자이니 또한 저버리지 말지니라
28 매 삼 년 끝에 그 해 소산의 십분의 일을 다 내어 네 성읍에 저축하여
29 너희 중에 분깃이나 기업이 없는 레위인과 네 성중에 거류하는 객과 및 고아와 과부들이 와서 먹고 배부르게 하라 그리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 손으로 하는 범사에 네게 복을 주시리라

 

 

언제부터 한국 교회가 '연보(eulogia)'라는 말 대신 '헌금(doron)'이란 용어를 대중적으로 사용했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성경의 '개역한글' 번역본에선 '헌금'이라는 단어가 거의 등장하지 않았다는 점을 미루어 볼 때, 아마도 개역개정 성경을 사용하게 된 이후부터가 아닐까 생각이 됩니다.  ― 실제로 개역개정역에선 과거 '연보'로 적혀 있던 구절을 '헌금'으로 바꿔 적은 곳이 8곳이나 됩니다. 개역한글번역에선 '연보'라는 단어가 13회, '헌금'이 2회밖에 사용되지 않았으니 꽤 많은 부분이 수정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물론 원어의 차이 때문에 번역을 바로잡은 부분도 있을 것 같습니다.

우선 '헌금'으로 번역한 여러 단어 중 고르반(gorban)은 '하나님께 드림이 되었다'라는 뜻입니다. 자주 사용되는 단어는 아니고, 구약성경에 두 번, 신약성경에도 단 두 번 정도 사용된 단어입니다. 신약성경에선 '예물'이라는 뜻의 도라(dora)가 좀 더 많이 사용되었는데 이 역시 모두 '하나님께 드림'이라는 뜻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런 해석이 그럼 왜 '헌물'이나 '예물', 또는 '드림'이라는 원어의 뜻 대신 굳이 '헌금(獻金)'이라고 번역했는지에 대한 설명으론 부족해 보입니다. 

두 번째론 '연보'라는 단어가 이전 세대의 단어이고 어렵고 생소하다는 것입니다. '겸비'(대하 7:14)라는 단어를 '스스로를 낮추고'라는 표현으로 수정한 것과 같은 맥락입니다. 하지만 '겸비'라는 단어가 실생활에서 전혀 사용되지 않는 단어인 반면 여전히 많은 교회에서 '연보', '연보함'이라는 단어를 불편함 없이 사용하고 있다는 점에서 충분히 만족스러운 답변이 되지는 않습니다. 

마지막으로 그 용례가 다르다는 이유입니다. 즉 '연보'라는 표현이 틀렸다는 입장입니다. 예물과 헌물은 모두 '하나님'께 드리는 것인데 반해, '연보'는 이웃과 나눈다는 '코이노니아'의 의미를 담고 있기 때문에 '연보'라는 말 대신 '헌금'으로 써야 옳다는 견해도 있습니다. 여러분의 생각은 어떠신가요?  

 

오늘 말씀은 잘 알려진 십일조 본문입니다. 모세가 '너' 혹은 '너희'로 지칭하는 것은 '이스라엘 백성'과 '제사장'들을 의미합니다. 즉 모든 이스라엘 백성이 매 년마다 토지 소산의 십분의 일을 하나님께 드리고, 매 삼 년 끝엔 그 해 소산의 십분의 일을 성읍에 저축하라는 것입니다. 십일조는 대표적인 '헌금'입니다. 22절에서 '드릴 것이며'의 주체는 물론 하나님입니다. 그러므로 십일조는 하나님께 드려지는 예물, 즉 고르반인 셈입니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본문 23절에선 그 예물이 어떻게 쓰여지는 지를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습니다. 

 

 

네 하나님 여호와 앞 곧 여호와께서 그의 이름을 두시려고 택하신 곳에서 네 곡식과 포도주와 기름의 십일조를 먹으며 또 네 소와 양의 처음 난 것을 먹고 네 하나님 여호와 경외하기를 항상 배울 것이니라

 

 

 

하나님께 드림이 되는 십일조를 함께 '먹으라'는 표현이 등장합니다. '여호와께서 그의 이름을 두시려고 택하신 곳', 즉 성소에 모여 토지 소산의 십분의 일인 곡식과 포도주, 그리고 기름을 함께 먹고 소와 양의 처음 난 것을 예배자들과 함께 나누라는 것입니다. 더욱 중요한 것은 이런 행위의 목적이 '네 하나님 여호와 경외하기'라는 것입니다. 즉 성소의 성직자, 예배자들과 함께 내 소산을 나누면서 하나님을 기억하게 되는 것이 바로 '십일조 본래의 정신'이라는 점입니다. 그래서 신학자 본회퍼는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를 이렇게 설명하기도 했습니다. 

 

우리와 신의 관계는 '신의 존재'에 참여함으로써 생기는,
남을 위한 새로운 삶을 의미하는 것이다.
초월적인 성격은 우리의 손이나 힘으로는 도저히 해낼 수 없는
어떤 과제에 있는 것이 아니라
가장 가까이 있는 '너' 안에 있는 것이다.

 

 

하나님의 존재에 참여한다는 것, 즉 하나님께 '드림이 된다는 것'이 '남을 위한 삶' 즉, 나와 가장 가까이 있는 성도와 함께 하는 삶을 의미한다는 그의 표현이야말로 신명기에서 모세가 강조하고자 했던 십일조의 의미를 가장 잘 설명하고 있습니다. 더불어 이것은 우리가 하나님께 드리는 예물이 '헌금'보다는 '연보'에 가깝다는 것을 알려줍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십일조를 감시하며 수납하는 분이 아닙니다. 오히려 십일조의 마음을 갖는 그 순간부터, 한 해의 소산을 돌아보며 하나님의 것을 구별하는 순간부터 그 '예물'을 받으시는 분입니다. 그리고 그 예물은 물이 흐르는 방향처럼, 자연스럽게 낮은 곳을 채우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서로서로가 보탬이 되라는 '연보'는 그래서 예물의 두 단어, 고르반과 에우로기아를 아우르고 있습니다. 

 

 

너희 중에 분깃이나 기업이 없는 레위인과
네 성중에 거류하는 객과
고아와 과부들이 와서 먹고 배부르게 하라
그리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꼐서
네 손으로 하는 범사에 네게 복을 주시리라

 

 

 

연보와 헌금을 구분하면서 이웃과 나누는 것을 하나님께 드리는 것과 냉정하게 분리하고 있는 사람들의 견해와는 사뭇 다른 하나님의 말씀이기도 합니다. 물론 과거 성소 시대가 아닌 우리 삶속에서, 십일조의 쓰임에 대해 한 개인이 자의적으로 판단하는 것은 그 자체로도 위험할 수 있습니다. 오랜 고민과 기도가 필요합니다. 나를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온전히 하나님만 드러내는 것이어야 그것을 '드림'이라고 부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쉽지 않은 일입니다. 그러나 쉽지 않다고 해서 기회조차 박탈하는 것은 교회의 횡포입니다. 그 본래의 의미조차 모른 채 오해하게 되고, 또 헌금 때문에 교회를 떠나게 된다면 큰 실수가 아닐 수 없습니다. '연보'는 훈련되어야 할 신앙의 습관입니다. 과부가 두 렙돈을 드린 사건(눅 20~21장)은 그런 점에서 우리에게 깊은 여운을 줍니다. 

 

눅 20:46~21:2

긴 옷을 입고 다니는 것을 원하며 시장에서 문안 받는 것과 회당의 높은 자리와 잔치의 윗자리를 좋아하는 서기관들을 삼가라 그들은 과부의 가산을 삼키며 외식으로 길게 기도하니 그들이 더 엄중한 심판을 받으리라 하시니라 예수께서 눈을 들어 부자들이 헌금함에 헌금 넣는 것을 보시고 또 어떤 가난한 과부가 두 렙돈 넣는 것을 보시고

 

예수님은 서기관들이 '과부의 가산을 삼키는 자'들이라며 신랄하게 비판하셨습니다. 그런데 그 '엄중한 심판을 받을 자'들이 득실거리는 곳에서 한 과부가 두 렙돈의 '헌물'을 드립니다. 예수님은그 즉시 과부가 다른 사람보다 많이 넣었다고 제자들에게 이야기해 주셨습니다.

사실 과부가 얼마의 헌물을 드렸는지를 아는 사람은 과부 그 자신과 예수님뿐이었습니다. 두 렙돈은 지금의 가치로도 1,000원이 채 안 되는 금액입니다. 과부는 하나는 이웃을 위해 그리고 하나는 하나님을 위해 드린다는 '연보'의 정신을 담아 두 렙돈의 헌물을 하나님께 드렸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다른 사람보다 많이 넣었다'는 예수님의 판단은 어떤 근거를 가지고 있었던 것일까요? 과부에게는 그 두 렙돈이 생활비의 '전부'였음을 예수님께서 아셨기 때문입니다.

 

신명기 말씀에 비춰본다면, 오히려 연보의 대상이고 십일조가 흘러가야 할 낮은 웅덩이었던 과부가 생활비 전부를 하나님께 드렸다는 것은, 삶 그 자체를 드렸다는 것과 다름이 없는 일이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리고 '고르반'은 원래 그런 의미입니다. 삶 전체를 드리고 그 작은 테두리를 떼어 증거로 남겨놓는 일, 그것이 바로 '십일조'이자 우리가 드리는 '헌물'입니다. 때문에 '나 자신'은 고스란히 남겨두고 '금'만 넣으면 될 것처럼 보이는 '헌금'이라는 단어의 오해는 '연보'라는 단어의 어려움보다 더 커 보입니다. 헌금 자체로는 그 과부가 서기관보다 더 많은 것을 드리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서기관들을 향한 예수님의 경고, "과부의 가산을 삼키는 자"들이란 바로 이런 의미가 아니었을까요? 

 

'연보'는 우리가 드린 헌물이 '하나님께 드림'이 되지 않았다는 의미가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께 드리는 모든 예물에 '연보'의 정신이 담겨야 함을 훈련하게 합니다. '헌금'이라는 단어에는 담을 수 없는 '가치'가 있습니다. 설령 알기 쉬운 번역을 위해 희생된 단어라고 해도 말입니다. 만약 어느 교회가 십일조의 정신, 연보의 정신을 바르게 설명하지 않고 오히려 "우리 교회에 십일조 하는 사람이 우리 교인"이라는 식의 횡포를 늘어놓는다면, 과연 그 목회자가 과거 예루살렘(헤롯)성전의 서기관과 무슨 차이가 있을까요? 과부의 가산을 삼키는 자, 라는 오명을 벗어날 수 있을까요? 그들을 향한 예수님의 서늘한 경고가 이 아침에 새로운 다짐이 됩니다. 

 

너희 보는 이것들이 날이 이르면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고 다 무너뜨려지리라
(눅 2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