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IDBARR

거룩히 구별한 이 성전이라도

mimnesko 2023. 9. 26. 10:57
열왕기상 9:1-9

1 솔로몬이 여호와의 성전과 왕궁 건축하기를 마치며 자기가 이루기를 원하던 모든 것을 마친 때에
2 여호와께서 전에 기브온에서 나타나심 같이 다시 솔로몬에게 나타나사
3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네 기도와 네가 내 앞에서 간구한 바를 내가 들었은즉 나는 네가 건축한 이 성전을 거룩하게 구별하여 내 이름을 영원히 그 곳에 두며 내 눈길과 내 마음이 항상 거기에 있으리니
4 네가 만일 네 아버지 다윗이 행함 같이 마음을 온전히 하고 바르게 하여 내 앞에서 행하며 내가 네게 명령한 대로 온갖 일에 순종하여 내 법도와 율례를 지키면
5 내가 네 아버지 다윗에게 말하기를 이스라엘의 왕위에 오를 사람이 네게서 끊어지지 아니하리라 한 대로 네 이스라엘의 왕위를 영원히 견고하게 하려니와
6 만일 너희나 너희의 자손이 아주 돌아서서 나를 따르지 아니하며 내가 너희 앞에 둔 나의 계명과 법도를 지키지 아니하고 가서 다른 신을 섬겨 그것을 경배하면
7 내가 이스라엘을 내가 그들에게 준 땅에서 끊어 버릴 것이요 내 이름을 위하여 내가 거룩하게 구별한 이 성전이라도 내 앞에서 던져버리리니 이스라엘은 모든 민족 가운데에서 속담거리와 이야기거리가 될 것이며
8 이 성전이 높을지라도 지나가는 자마다 놀라며 비웃어 이르되 여호와께서 무슨 까닭으로 이 땅과 이 성전에 이같이 행하셨는고 하면
9 대답하기를 그들이 그들의 조상들을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신 그들의 하나님 여호와를 버리고 다른 신을 따라가서 그를 경배하여 섬기므로 여호와께서 이 모든 재앙을 그들에게 내리심이라 하리라 하셨더라

 

지난 해, 국민일보와 사귐과섬김 부설 코디연구소는 일반 시민들을 대상으로 "각 종교를 상징하는 단어"를 묻는 조사를 진행했습니다. 그 결과 가톨릭의 경우엔 '도덕적, 헌신적, 희생적'이란 답변을, 불교는 '포용, 상생, 보수적'이라는 답변을 받았다고 합니다. 반면 기독교를 상징하는 단어로는 "배타적, 물질에 집착, 이기적, 위선적, 세속적"이란 답변이 가장 많았다고 합니다. 어느 정도 예상했음에도 충격적인 결과가 아닐 수 없습니다. 언제부터 '배타적, 물질 집착, 이기적, 위선적, 세속적'이 기독교를 지칭하는 단어가 되었을까요? 

 

이 리포트를 전한 기사는 '마을목회'의 중요성을 강조하면서 위의 통계를 인용했습니다. (기사 원문)

교회가 '마을'을 위해 섬기고 봉사하는 것으로 위의 암울한 단어들에게서 벗어날 수 있지 않겠느냐는 일말의 희망을 담고 있는 기사였습니다. 과연 그럴까요? 돌이켜보면 한국 교회가 교회 밖 이웃을 향한 봉사나 섬김에 인색했던 적은 없었습니다. 많은 교회들이 스스로의 건강함의 척도를 이 '봉사'와 '섬김'에 두는 경우도 많습니다. 지역아동센터, 아동돌보미시설, 어린이집, 문화센터, 돌봄센터, 무료급식소 등을 위탁 운영하는 대부분의 주체가 교회입니다. 이를 위한 사회적 지출 역시 적지 않습니다. 위탁 운영이란 말 그대로 '운영비'를 부담하는 사업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왜 이런 결과를 얻게 된 것일까요? 남 모른 선행들이 잘 알려져 있지 않아서 '오해'를 받고 있는 것일까요? 

 

저는 이런 '오해'는 교회 내에서도 광범위합니다. 마치 교회의 정체성이 '섬김'이나 '봉사'에 있는 것처럼 생각하는 경우가 많고 그것이 미비할 때 '교회로서의 기능'을 다하지 못한 것처럼 생각하는 성도들도 많습니다. 교회의 '사회적 기능'을 교회의 정체성과 동일시하는 경우입니다. 하지만 이것은 교회에 대한 본질적인 오해입니다. 신학자 스텐리하우어워스가 날카롭게 지적한 것처럼, 교회는 '봉사단체'가 아닙니다. 이 간단한 문장에 선뜻 동의하기 어렵다면, 우리는 세상으로부터 "배타적이고 물질에 집착하며 이기적이고 위선적이며 세속적인 집단"이라는 오명에서 영원히 자유로울 수 없을 지도 모릅니다.

 

교회는 이 땅에 도래하실 하나님의 나라를 바라보는 유일한 통로입니다. 교회 외에는 어떤 통로도 없습니다. 구제와 봉사는 다른 종교단체에서도 얼마든지 할 수 있습니다. 정부나 정부의 지원을 받는 단체들을 통해서도 이와 비슷한 사업이 진행될 수 있습니다. 교회가 사명감을 가지고 그 일에 동참하는 것은 자연스럽고 당연한 일이지만, 구제나 봉사, 사회적 기능이 교회의 정체성이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교회를 향한 사람들의 비판 역시, 교회의 '사회적 기능'을 향하는 것이 아닙니다. 

 

마치 배가 아파서 병원엘 갔는데 배꼽 위에 밴드 하나를 붙여주는 식의 미봉책으로는 교회를 항한 사회의 차가운 시선을 바꾸기 어렵습니다. 무엇보다 그 시선을 바꾸는 것이 교회의 본분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교회가 본연의 기능, 즉 하나님 나라의 통로로서의 기능, 스탠리하우어워스의 표현대로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자 잠시 이 땅에서 거주민으로 살아가는' 성도들의 삶을 통해서 구현되는 하나님 나라의 모습이 회복한다면 사회적인 평가는 얼마든지 바뀔 수 있습니다. 위의 단어들을 곰곰히 곱씹어 본다면, 그 하나 하나가 하나님 나라의 모형으로서의 교회가 가져야 할 중심에 닿아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솔로몬이 성전 건축을 마쳤습니다. 유능한 건축자와 같이, 사전에 충분히 연습된 숙련공들과 치밀한 설계를 통해 최고의 성전을 봉헌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경고는 엄중합니다. 

 

만일 너희나 너희의 자손이 아주 돌아서서 나를 따르지 아니하며 내가 너희 앞에 둔 나의 계명과 법도를 지키지 아니하고 가서 다른 신을 섬겨 그것을 경배하면 내가 이스라엘을 내가 그들에게 준 땅에서 끊어 버릴 것이요 내 이름을 위하여 내가 거룩하게 구별한 이 성전이라도 내 앞에서 던져버리리니 이스라엘은 모든 민족 가운데에서 속담거리와 이야기거리가 될 것이며

 

 

성전의 웅장한 규모가 오히려 사람들의 놀림감이 될 수 있다. 내가 그렇게 할 것이다,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은 교회가, 그리고 이 땅의 거류민이며 동시에 하나님 나라의 성전을 품고 살아가는 모든 사람들에게 경각을 줍니다.

만약 우리가 세운 높은 첨탑과 아름다운 건축양식이 세상 사람들의 비판과 멸시와 조롱의 대상이 된다면, 우리가 돌아봐야 하는 것은 교회가 미처 다하지 못한 사회적 기능이 아니라, 우리 공동체가 '하나님의 계명과 법도'를 명확히 따르고 있는가, 하는 점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서 성도 한 사람 한 사람이 충분히 신앙적으로 성숙되어 있는가. 개인의 삶을 이끌어가고 명확히하는 가치의 기준이 온전하게 하나님 나라에 놓여 있는가. 교회를 섬기는 직분자들이나 성직자들이 충분히 이러한 '헌신'에 자발적으로 충성하며 복종하고 있는가. 이러한 내적 점검이 정기적으로 이뤄지고 있는가, 하는 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