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MEMBRANCE

말도 많고 탈도 많은 '자유'

mimnesko 2023. 9. 15. 11:42

최근처럼 '자유'라는 말을 많이 들어본 기억이 있을까? 

'민주주의'라는 말도 '자유민주주의'로 고쳐 불러야 한다는 이상한 논리가 횡횡하더니, 이젠 '자유'가 모든 논리를 때려잡는 몽둥이로 자리하고 있다. 늘 그렇듯, 어떤 특정한 단어가 도드라진다는 것은 그 반대의 현상이 만연하다는 방증이기도 하다. 가령 '자연 보호'라는 구호가 자주 눈에 띈다면, 그것은 '자연 파괴'가 일상화되어 있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모두가 잔디를 보호한다면 굳이 푸른 잔디밭 앞에 '출입금지'라고 팻말을 세울 이유가 없기 떄문.

 

그러니 최근 '자유' 열풍은 반대로 우리 주위에 '자유'의 반대 개념이 만연하다는 뜻일텐데, 문제는 그것이 무엇인지가 명확하기 않다는 것이다. 당장 '자유'의 반대말을 머리속에 떠올려 보자. '부자유', '구속', '방종' 등등이 떠오른다. 그렇다면 현재 우리 주위에 '부자유'나 '구속', '방종'이 넘쳐나고 있다는 뜻이다. 과연 그런가? 

 

소위 '자유민주주의' 국가에서 개인이 의사결정의 '부자유'를 가질 리 없다. 점심 메뉴를 고르기 위해 누군가의 허락을 받아야 하는 사회가 아니다. 또한 위법한 사실 없이 구속을 당하거나 제한을 받는 사회도 아니다. 피의자조차도 무죄추정의 원칙 아래 '구속적부심'을 받을 수 있다. 그러니 '구속'이 넘쳐난다고 볼 수도 없다. 한국 사회에서 개인은 정해진 법의 테두리 안에서는 개인의 자유를 침해당하지 않는다. 즉, 개인의 일탈이나 범법 행위가 아니라면 개인의 '자유'를 어떤 형태로든 제한할 수 없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방종'도 자연스럽게 소거된다. 이상한 일이다. '자유'를 강조하고 있는데 그 반대의 상황이 잘 관찰되지 않는다. 다시 말해 모든 사람들이 한결 같이 자연보호를 하고 있는데, 갑자기 텔레비전에서 '자연보호'를 하자는 캠페인을 벌이고 있는 상황이다. 아무도 잔디밭에 들어갈 생각을 하지 않는데 잔디밭 주위에 온통 '잔디를 보호해 주세요'라는 팻말을 못밖고 있는 웃지 못할 상황인 것이다. 

 

그럼 한 가지 가능성이 남았다. '자유'라는 단어의 '오용'이다. 자유의 정확한 의미를 이해하지 못한 채 잘못 사용하고 있다는 것이다. 한국 사회 내에 무언가 '불편한 상황'이 발생하고 있는데 그 불편함을 일거에 해소할 수 있는 몽둥이로 누군가 '자유'라는 단어를 선택했다는 뜻이 된다. 그렇다면 도대체 이 말도 많고 탈도 많은 듯 보이는 '자유'가 무엇일까? 

 

칸트는 자유에 대해 "방종이 아니라 도덕적으로 잘 질서지워진 내적 구조"라고 설명했다. 어려운 이야기다. 칸트의 '자유'를 이해하기 위해선 그가 말하는 '행복'을 이해해야 한다. 행복이란 '경험적'이다. 당연하다. 먹어봤더니 맛있다. 그래서 행복해질 수 있다. 경험해보지도 못한 것을 행복의 기준으로 삼을 순 없다. 인간은 경험한 쾌락을 추구하기 마련이다. 반면 인간의 자유는 경험 이전의 것, 즉 선험적이다. 칸트는 자신의 책 "실천이성비판"에서 "자유는 도덕법칙의 존재 근거이며, 동시에 도덕법칙은 자유의 인식근거"라고 설명했다. 인간은 자신이 경험한 행복을 위해 달려가고 있지만, 동시에 배우지 않고도 알고, 경험하지 않았지만 알고 있는 어떤 '도덕적인 법칙'에 의해 멈춰설 수 있다. 이걸 어려운 말로 '사유필연성'이라고 한다. 인간은 선험적인 어떤 기준, 즉 도덕의 기준을 이미 알고 있으며(초월론적), 그 기준이 쾌락을 추구하는 행복에 우선된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보자. 어떤 사람이 식욕을 주체할 수 없다. 특히 떡볶이에 푹 빠져 있다. 머리속에 온통 떡볶이 생각뿐이다. 그의 모든 삶은 '떡볶이'를 위해 존재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는 자신의 경험에 기반한 그 '쾌락'을 만족시키기 위해 최선의 노력을 다한다. 그런데 갑자기 누군가 나타나 앞으로 "떡볶이"를 먹는 사람은 모두 죽이겠다고 으름장을 놓았다. 실제로 죽은 사람도 나왔다. 그런 상황에서도 '쾌락'을 위해 떡볶이를 먹을 수 있을까? 그럴 수 없다. 어떤 쾌락도 '죽음' 앞에선 무력화 된다. 행복의 반대편엔 '죽음'이 있다. 

그런데, 그 떡볶이를 좋아하던 사람이 건널목을 건너는 어린 아이로 돌진해 오는 차를 발견했다. 그 짧은 순간에 그는 어린 아이를 구한다면 본인이 죽을 수도 있다는 사실을 인지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본능적'으로 몸을 던져 아이를 구한다. 어떤 쾌락도 그 안에는 없다. 당연히 행복도 없다. 죽음은 '행복'의 반대편에 있다. 그런데 어떻게 이런 '선택'이 가능한가? 칸트는 이것이 '자유'라고 설명한 것이다. 때문에 자유는 도덕(윤리) 법칙의 존재 근거이자 동시에 도덕(윤리) 법칙은 자유의 인식 근거이다. 우리는 '선험적'인 도덕규칙을 알 수 없으나, 오직 '자유'를 통해서 그 법칙을 인식하게 되는 것이다. 

 

칸트는 당시 홉스(Thomas Hobbes, 1588~1679)로 거의 전쟁터가 되어버린 인간의 '윤리'와 그리고 흄(David Hume, 1711~1776) 덕분에 바닥까지 끌어내려진 '인식'에 대해 각각 '순수이성비판'과 '실천이성비판'으로 응답했다. 인간이 선험적이 도덕을 추구하고 그것을 '자유'로 구체화시킬 때 비로소 인간은 참다운 행복을 추구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자유는 '도덕적으로 책임을 질 수 있는'이라는 전제 속에 파악되어야 한다. 이것이 칸트가 말하는 정언명령의 제1정식이다. 

 

너의 의지와 준칙이 항상 그리고 동시에 보편적 입법의 원리가 될 수 있도록 행위하라

 

 

자유란 타율적이지 않다. 어린 아이의 목숨을 구하기 위해서 뛰어드는 데 누군가의 명령이 필요한 것이 아니다. 우리는 자유를 통해서만 도덕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때문에 칸트는 제2정식에서 "너 자신의 인격에 있어서나 다른 모든 사람의 인격에 있어서나 인간(성)을 언제나 동시에 '목적'으로 대하고 결코 한낱 수단으로 사용하지 않도록 행위하라."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개인의 인격을 그가 가진 외적 요소로 판단하지 말라는 것이다. 모든 인격은 동등학게 '목적'이다. 

 

칸트에게 있어 '자유'의 반대는 정언명령을 어긋나는 '비도덕'이다. 보편하고 타당하지 않은 비도덕은 소수의 권리를 위해 다수의 행복을 묵살하는 것이다. '사회적 비용'이란 표현으로 소수의 희생을 미화하는 것이다. 때문에 사회적 약자의 죽음에 힘있는 사림이 책임을 회피하는 것이다.

 

특정 집단의 유익과 유리를 위해 다수의 의견을 비트는 것, 그런 점에서 '비도덕'은 '파시즘'적이다.

당연히 파시즘에는 '자유'란 존재하지 않는다. 때문에 최근 부르짖는 '자유'는 우리 사회가 급속도로 '전체주의화'되고 있다는 방증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소수 집단의 우월주의가 다수를 권력과 재력으로 지배하는 파시스트 사회가 마침내 도래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이미 인류에 거대한 상처를 남기고 철저히 실패한 히틀러와 괴벨스의 망령이 다시 떠도는 것은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