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IDBARR

축복과 저주 사이

mimnesko 2023. 3. 10. 11:33
마태복음 19:1~12

1 예수께서 이 말씀을 마치시고 갈릴리를 떠나 요단 강 건너 유대 지경에 이르시니
2 큰 무리가 따르거늘 예수께서 거기서 그들의 병을 고치시더라
3 바리새인들이 예수께 나아와 그를 시험하여 이르되 사람이 어떤 이유가 있으면 그 아내를 버리는 것이 옳으니이까
4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사람을 지으신 이가 본래 그들을 남자와 여자로 지으시고
5 말씀하시기를 그러므로 사람이 그 부모를 떠나서 아내에게 합하여 그 둘이 한 몸이 될지니라 하신 것을 읽지 못하였느냐
6 그런즉 이제 둘이 아니요 한 몸이니 그러므로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나누지 못할지니라 하시니
7 여짜오되 그러면 어찌하여 모세는 이혼 증서를 주어서 버리라 명하였나이까
8 예수께서 이르시되 모세가 너희 마음의 완악함 때문에 아내 버림을 허락하였거니와 본래는 그렇지 아니하니라
9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누구든지 음행한 이유 외에 아내를 버리고 다른 데 장가 드는 자는 간음함이니라
10 제자들이 이르되 만일 사람이 아내에게 이같이 할진대 장가 들지 않는 것이 좋겠나이다
11 예수께서 이르시되 사람마다 이 말을 받지 못하고 오직 타고난 자라야 할지니라
12 어머니의 태로부터 된 고자도 있고 사람이 만든 고자도 있고 천국을 위하여 스스로 된 고자도 있도다 이 말을 받을 만한 자는 받을지어다

 

결혼은 한 사람의 인생에 있어 매우 중요한 의식이며 과정입니다. 

생면부지의 두 사람이 만나 사랑을 키워가는 과정이 결혼의 가장 애틋하고 아름다운 장면이라면, 양 가의 부모님이 첫 인사를 나누는 상견례부터 결혼예식 전후에 벌어지는 온갖 종류의 '일'들은 '결혼'이라는 형식적 과정이 얼마나 복잡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장면입니다. 최근에는 가까운 지인들과 함께하는 '스몰 웨딩'이 유행이라곤 합니다만, 여전히 대부분의 결혼식은 누구나 상상할 수 있는 장소와 순서에 따라 진행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몇 해 전 통계입니다만, 두 사람이 결혼에 이르기까지 필요한 모든 경비를 계산하면 평균 2억 7천 만원 정도가 된다고 합니다. 두 사람의 애틋한 사람이 신혼집, 혼수, 예식장, 식사, 스드메의 고단한 과정을 무사히 통과하려면 사회적으로 거금이 지출되어야 한다는 뜻이지요. 때문에 부모의 조력이 없이는 결혼식을 올리는 것 자체가 하나의 모험이기도 합니다. 부모님의 입장으론 지금까지 뿌린 씨앗(?)을 일거에 회수해야 하는 추수의 기회이기 때문에 종종 축의금의 분배를 놓고(법적으론 부모님의 소유라고 합니다) 결혼식 직후부터 가정의 불화가 시작되는 안타까운 일이 벌어지기도 합니다. 

 

이처럼 거금의 사회적 비용뿐 아니라 정신적인 소모가 필요하기 때문에 최근에는 오히려 '비혼'을 선언하는 청년들이 늘어나고 있습니다. 내가 감당할 수 있는 수준에서, 내가 감당할 수 있는 반려동물과 함께 내가 감당할 수 있는 삶을 조용히 살겠다는 생각입니다. 그것의 옳고 그름을 떠나 그런 생각을 하는 청년들이 많아진다는 것 자체가 사회의 빈약한 안전망, 체면을 중시하는 문화, 결혼 그 자체가 '목적'이 되어버리는 왜곡된 결혼관 등을 반영하는 모습이기도 합니다. 

 

사실 '비혼'은 오늘 본문 속 예수님의 말씀처럼 2천 년 전에도 있었습니다. 선천적으로든 사회적으로든, 또는 종교적인 이유로든 비혼을 선택할 수 있는데, 단서는 '오직 타고난 자'만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흥미로운 말씀이지요. 결혼을 '하나님의 축복'으로만 해석하는 교계 목사님들의 주례사나 격려를 들을 때마다 앙금처럼 걱정이 남곤 합니다. 물론 축복의 결정을 내린 두 사람 앞에서 '결혼을 다시 심각하게 고려해 보면 좋게다'라고 할 수야 없겠지요. 틀림없이 결혼은 하나님의 축복입니다. 오직 '타고나 자'들만이 누리는 특권이자 '하나님이 짝지워 주신' 필연적인 결과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결혼' 그 자체를 하나님의 축복이라고 정의한다면, 두 사람의 안타까운 결별인 '이혼'은 '하나님의 축복'이 소멸되는 '저주'가 되고 맙니다. 이 과정 속에 하나님의 '축복'이 인간의 결정으로 취소될 수도 있다는 잘못된 메시지가 상흔처럼 두 사람에게 남을 수도 있다는 점입니다. 

 

이것은 단순히 논리의 허점을 피하고자 하는 이야기는 아닙니다. 보다 중요한 것은 결혼을 바라보는 기독교 공동체의 정립된 시선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왜 굳이 개인이 감당하기 어려운 과도한 비용일 지출하면서까지, 또 개인의 목표나 비전과 정반대의 결과를 초래할 수 있는 선택을 수반할 수 있는 결혼을 감행해야 하는 것인가? 그 장점보다 엄청난 '단점'이 존재함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교회는 청년들의 결혼을 축복하고 장려해야 하는 것인가? 더불어 그 결혼 생활을 유지하는 과정에 기독교 공동체의 노력이 얼마나 지속적으로 수반되고 있으며, 과연 공동체는 결혼 가정의 영적인 안전망이 되어 주고 있는가. 

 

소소하지만 확실한 행복, 즉 '소확행'을 추구하는 삶이 유행처럼 번졌던 이유를 우리는 깊이 돌아보아야 합니다. 교회 공동체가 그들에게 종종 '희박하지만 거대한 비전'처럼 느껴지는 하나님의 구원을 설명하는 일이 또 얼마나 힘들고 애처로운 것인지도 돌아보아야 합니다. 신혼부부에게 종교적 서약을 강요하는 결혼예비학교로는 이 간격을 메우기 어려워 보입니다. 그것이 우리의 고민이고 숙제가 아닐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