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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이 작은 자여

mimnesko 2023. 2. 28. 06:00
마태복음 14:22~36

22 예수께서 즉시 제자들을 재촉하사 자기가 무리를 보내는 동안에 배를 타고 앞서 건너편으로 가게 하시고
23 무리를 보내신 후에 기도하러 따로 산에 올라가시니라 저물매 거기 혼자 계시더니
24 배가 이미 육지에서 수 리나 떠나서 바람이 거스르므로 물결로 말미암아 고난을 당하더라
25 밤 사경에 예수께서 바다 위로 걸어서 제자들에게 오시니
26 제자들이 그가 바다 위로 걸어오심을 보고 놀라 유령이라 하며 무서워하여 소리 지르거늘
27 예수께서 즉시 이르시되 안심하라 나니 두려워하지 말라
28 베드로가 대답하여 이르되 주여 만일 주님이시거든 나를 명하사 물 위로 오라 하소서 하니
29 오라 하시니 베드로가 배에서 내려 물 위로 걸어서 예수께로 가되
30 바람을 보고 무서워 빠져 가는지라 소리 질러 이르되 주여 나를 구원하소서 하니
31 예수께서 즉시 손을 내밀어 그를 붙잡으시며 이르시되 믿음이 작은 자여 왜 의심하였느냐 하시고
32 배에 함께 오르매 바람이 그치는지라
33 배에 있는 사람들이 예수께 절하며 이르되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로소이다 하더라
34 그들이 건너가 게네사렛 땅에 이르니
35 그 곳 사람들이 예수이신 줄을 알고 그 근방에 두루 통지하여 모든 병든 자를 예수께 데리고 와서
36 다만 예수의 옷자락에라도 손을 대게 하시기를 간구하니 손을 대는 자는 다 나음을 얻으니라

 

30세 이후 신앙을 갖고 교회에 출석하고 있는 한 청년과 교회 경험에 대해 나눈 적이 있었습니다. 짧은 기간 경험한 교회의 모습이기에 그 청년에게는 교회 공동체의 '첫 인상'과 같은 것이었는, 어느새 교회가 익숙해진 저의 입장에선 그런 시선이 꽤 신선하게 느껴졌습니다. 

 

"교회에 와서 보니 회사생활에선 절대 들을 수 없는 독특한 단어들을 많이 사용하는 것 같아서 처음엔 적응하기가 좀 어려웠습니다."

"독특한 단어라.... 어떤 단어가 있을까요?"

"음. 이게 일반적이지 않을 순 있는데 적어도 저는 그랬습니다. 우선 '용서'라는 말이에요. 사회에선 거의 들어본 적 없습니다. 오히려 '복수'라는 단어가 가깝지요. 용서를 한다는 건, 그 자체가 좀 상대적으로 낮은 위치, 약한 위치에 고립되는 느낌이에요."

"흠. 한 번도 생각해 보지 못 했는데, 정말 그럴 수 있겠어요. 또 다른 단어가 있나요?"

"은혜라는 말도 거의 안 씁니다."

"그렇겠네요. 은혜라는 말은 직장에서 듣기 어렵죠?"

"사람 이름일 때 정도(웃음).... 그런데 정작 이름이 은혜인 직원이 기독교인일까 생각해 본 적은 없었던 것 같습니다. 그 단어에 대한 감각 자체가 없었다고나 할까요? 오히려 교회에 오고나서 혹시 그 사람이 크리스천이었나? 하게 되었어요."

"흥미롭네요. 감사, 은혜. 교회의 시그니처 같은 단어들이네요."

"믿음도 그렇습니다. 교회에서 이야기하는 '믿음'은 사회에서 종종 내가 믿을게, 믿고 있어, 라는 표현과 뭔가 상당히 의미가 다르게 느껴졌어요. 사실 회사에서 믿는다, 라는 말은 '두고 본다'에 가깝거든요. 절대로 안 믿죠. 회사 생활은 사람을 불신하는 것에서부터 시작하는 것 같아요. 누군가를 믿는다, 라는 말은 순진하다, 바보 같다와 거의 동의어처럼 쓰이니까요."

 

같은 단어이지만 그 쓰임새나 함의가 전혀 다를 수 있다는 것을 새삼 느끼게 되었습니다. 사실 용서, 은혜, 믿음은 기독교의 뿌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핵심적 교리를 담고 있습니다. 하지만 교회 밖에서 그 단어들이 쓰여질 때는 전혀 다른 뉘앙스로 전달이 되곤 합니다. 그래서 불필요한 선입견도 갖게 됩니다. 청년의 이야기처럼 사회에서 '용서'라는 단어의 유약성을 느꼈던 사람이라면, 교회 공동체의 일원이 되어서도 그 단어에 대한 선입견으로 '용서'에 대한 불편함을 가질 수도 있다는 뜻입니다. 문화라는 것이 이처럼 어렵고 난해합니다. 

리차드 니버의 지적처럼 교회(예수)는 필연적으로 문화와 관계를 형성하게 됩니다. 그 관계가 어떤 모습일지에 대한 다양한 생각이 존재할 수는 있겠지만 1루 덕아웃과 3루 덕아웃의 분리는 의심할 여지 없이 필연적입니다. 

 

***

예수님의 제자 베드로는 자신이 예수님을 '믿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것은 본인의 오랜 경험과 생각, 여러 성장의 배경을 통해 만들어진 믿음입니다. 더불어 예수님을 향한 '믿음'이기도 했습니다. 그 믿음이 베드로로 하여금 물 위를 걷게 했습니다. 잠시나마 '전지전능함'을 덧입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거기까지였습니다. 베드로가 가진 '믿음'이 바람의 무서움조차 이길 수는 없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을 '즉시' 물에 빠진 베드로에게 다가오셨습니다. 그리고 같은 단어 '믿음'이 어떤 함량의 차이를 갖는지 그에게 알려주셨습니다. 우리가 가득 채웠다고 했던 그 믿음이 얼마나 '극소한 믿음'이었는지를 돌이키게 하셨습니다. 

 

 

"믿음이 작은 자여, 왜 의심하였느냐"

 

 

이것은 베드로의 믿음이 작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적어도 물위로 발을 내딛는 그의 믿음은, 우리의 믿음과는 비교조차 어려울 정도로 크고 깊었을지도 모릅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인간이 가진 상식과 교양, 성장을 통해 배양되고 획득할 수 있는 최대치의 믿음이란 결국 그 정도에 불과하다는 것을 가르쳐주신 것입니다. 잠깐은 물 위에 발을 딛을 수 있을지는 몰라도, 그 유효기간은 짧습니다. 거친 바람과 깊이를 알 수 없는 검은 바다. 일렁이는 파도 앞에서 우리는, 우리가 가진 '최대치의 믿음'의 정체를 발견하게 됩니다. 나로부터 시작된 그 제한적인 믿음이 마침내 온전하게 될 수 있는 것은 오직 예수님을 통해서만 가능하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에베레스트나 K2와 같이 사람이 범접하기 어려운 높은 산들도 또 밑을 알 수 없는 깊은 해구조차도 지구 밖에서는 동그란 직선에 불과합니다. 산의 높음이나 바다의 깊음은 우리가 얼마나 '제한적인 시선' 속에 살고 있는지를 새삼 일깨워줍니다. 우리의 '최대치의 믿음' 역시 그렇습니다. 인격의 수양으로 쌓을 수 있는 '선'의 경지란 우주 밖에서는 한 줄 직선 안에 포함되는 오차의 범위에 불과할지도 모릅니다. 우리의 믿음을, 우리의 용서를, 우리의 은혜를 온전하게 하는 분은 오직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으로부터 시작된 믿음, 용서, 은혜가 필요합니다. 비록 같은 단어를 사용하지만 세상의 그것과 다른 믿음, 용서, 은혜의 이유가 바로 이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