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IDBARR

이렇게 된 것이 아버지의 뜻이니이다

mimnesko 2023. 2. 16. 06:00

- 마태복음 11:20~30

 

 

어느 목사님의 책을 읽다가 흥미로운 내용이 있어서 옮겨 봅니다.

 

수피교의 신비가 라비아의 일화가 떠오릅니다. 어느 날 사람들은 라비아가 한 손에는 횃불을 들고 다른 한 손에는 물통을 들고 달려가는 것을 보았습니다. 사람들은 이 이상한 행동의 의미가 뭔지, 어디를 향해 가는지 물었습니다. 그러자 라비아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낙원에 불을 지르고, 지옥에 물을 끼얹으려고 가는 길입니다. 그래서(하나님에 대한 참된 비전을 가로막는) 두 가지 너울을 없애 버리려고요"
라비아는 이런 기도를 신께 바쳤습니다.

"오 나의 주님, 내가 만일 지옥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당신을 섬긴다면, 나를 지옥 불로 태워 주십시오. 만일 내가 낙원에 대한 기대 때문에 당신을 경배한다면, 나를 낙원에 들이지 마십시오. 그러나 내가 당신 자신을 위해 당신을 섬긴다면, 당신의 영원한 아름다움에서 나를 멀리하지 말아 주십시오."

 

글을 인용하셨던 목사님은 "사실 사람들을 형벌의 두려움과 보상에 대한 기대 속에 가두는 종교야말로 가장 나쁜 종교라고 생각"한다며 자신의 의견을 조심스레 피력하셨습니다. 그러나 우리 주위에는 슬프게도 기독교를 '가장 나쁜 종교'로 둔갑시키는 분들이 적지 않습니다.

 

오래 전 어느 교회에서 발행한 신문을 보다가 깜짝 놀랐던 적이 있습니다. 어느 성도의 간증이었는데, 요약해보면 '주일 성수를 하지 않고 가족들과 여행을 갔다가 교통사고를 당해 병원에 입원하게 되었다. 죄를 범한 자신을 '사랑의 매'로 일깨워주신 하나님께 감사한다'는 내용이었습니다. 아연실색하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 기사 속 하나님은 "주일 예배를 빠지는 자에게 가차없이 교통사고로 벌을 주시는 분"이었습니다. 가까스로 목숨을 건졌지만 그 역시도 "사랑의 매"로 받아들어야 하는 것이 죄 지은 사람의 속죄였습니다.

 

도저히 납득할 수 없는 이 '간증'이 어떻게 기사화 될 수 있을까요? 그것이 '상식'인 교회가 있기 때문이 아닐까요? 그런 '하나님'을 설교하고 강조하는 목회자가 있기 때문이 아닐까요? "예수 천당 불신 지옥"이라는 과거의 슬로건(라임이 좋다고 해서 내용까지 사실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에서 한 걸음도 내딛지 못한 채, 또 스스로의 눈과 마음을 가린 채, 마치 그것이 '기독교 전부'인 양 말하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은 아닐까요?

 

하지만 그런 환경 속에선 결코 보듬고 돌보시는 하나님, 우리와 함께 모든 고통을 겪으시는 하나님, 격려하시고 칭찬하시는 하나님, 차별하지 않으시는 하나님, 땅을 가려 비를 내리지 않으시는 사랑의 하나님을 만날 수 없습니다. 개인의 성공보다 하나님 나라의 도래를 중요하게 말씀하시는 하나님을 만날 수 없습니다. 설령 교회가 가루처럼 부서질지라도 고아와 과부, 가난한 자, 힘 없는 자, 차별 받는 자들을 힘껏 부둥켜안는 하나님 나라의 질서를 실천하는 공동체를 만날 수 없습니다. 기독교의 역사를 반추하건데, 이것은 기독교가 가진 대부분의 힘을 상실한 채, 고작 한줌 땅 위에 서 있는 것처럼 위태한 일입니다. 세상이 기독교를 오해하고, 기독교인 스스로가 스스로의 종교를 오해할 정도의 왜곡된 일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슬프게도 이것이 현실입니다. 피터 버거의 지적처럼 교회는 스스로 '세속화'의 길로 들어섰고, 세속화 되었으며 이제 선택가능한 어떤 것이 되고 말았습니다. 

 

 옳소이다. 이렇게 된 것이 아버지의 뜻이니이다. 
(마태복음 11:26)

 

 

그러나 이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아버지 외에는 아들을 아는 자가 없고 아들과 또 아들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는 자 외에는 아버지를 아는 자가" 없는 현실의 모습이 다름아닌 하나님의 뜻입니다. 곤고함은 결핍에서 비롯합니다. 쉽은 '중한 노동'을 전제합니다. 교회 공동체조차 쉼과 안식이 되어주지 못 하는 현실 속에서, 마치 천국 어딘가에 금, 은, 동 면류관이 놓여 있기라도 한 것처럼 세속과 다름없는 치열한 경쟁의 끝에 획득해야할 어떤 것으로 구원을 둔갑시키는 그 각박한 결핍 속에서 우리는 진정한 쉼과 놓임을 희망하게 됩니다. 

 

잠시의 목 축임으로 벗어날 수 있는 갈증과 노동이 아니기에 그 간절함은 더욱 큽니다. 그 때 예수님이 우리에게 다가와 말씀하십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예수님의 초청에는 차별이 없습니다. 세상에서 소망이 끊어진 누구라도 좋다. 세상의 노동에 짓눌려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좋다. 다 내게 오라. 그 예수님의 초청에는 제한도 없습니다. 만약 우리 중 누군가가 예수님의 초청 앞에 "등록 교인"이라는 제한 사항을 달아두고 싶어하고, 또 "장로, 권사, 안수집사, 서리집사의 순서대로 오시오" 라는 약간의 계급과 차별을 놓고자 한다면 그것이야말로 반(反)복음입니다. 하나님은 땅을 가려 비를 내리는 분이 아닙니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참된 쉼과 평안입니다. 세상의 거친 짐을 내려놓을 자유입니다. 주님이 주시는 참된 평안과 안식을 경험하는 일입니다. 교회가 여전히 이 땅에 필요하고 중요한 이유가 바로 이것이 아닐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