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MOVIE

이 꼴이 날 줄 알았던 영화, 교섭

mimnesko 2023. 2. 9. 13:22

 

영국의 극작가인 버나드 쇼는 이런 묘비명을 남겼다고 알려져 있다(그러나 사실 버나드 쇼는 화장을 하고 그 재를 뿌렸기에, 이런 글귀가 적혀 있는 묘비 같은 건 없다. 늘 그랬듯이 그의 재기발랄한 입담이 사후까지 전해졌던 게 아닐까?). 

 

언젠가, 내가 이 꼴이 날 줄 알았어!

(I knew if I stayed around long enough, something like this would happen)

 

영화 '교섭'을 보고 난 뒤 가장 먼저 들었던 생각이다. 100억 원이 넘게 투자된 영화. 요르단 로케이션으로 메마르고 광활한 광야를 담아낸 영화. 황정민과 현빈이라는 핫한 두 배우의 투샷을 마음껏 즐길 수 있는 영화가 도대체 왜 '이 꼴'이 나버린 걸까? 

 

출처 : 다음 영화

 

2007년 샘물교회 단기선교팀 피랍 사건

잘 알려진 것처럼, 이 영화의 배경은 2007년 7월 발생했던 샘물교회 단기선교팀 23명의 피랍 사건이다. 인솔자였던 목사와 샘물교회 성도인 남성 1명이 탈레반에 의해 살해되었고 현지 선교사 3명을 포함한 선교팀 21명이 41일간의 구금을 마치고 8월 30일 모두 석방, 귀국하면서 매듭되었던 국제적인 사건이었다. 사회적 파장은 엄청났다. 이미 외교부에서 '여행금지구역'으로 지정한 바 있었고, 탈레반이 공공연하게 한국인들을 납치하겠다는 성명을 발표하고 있던 때였다. 그 어느 때보다 아프간 내의 긴장감이 높았던 시기에 한국에서 온 무려 23명의 개신교인들이 '단기선교'를 명목으로 밀입국 했다가 피랍되는 사태가 벌어진 것이다. 국내 여론은 일제히 개신교를 향해 십자포화를 쏟아내었다. 특히 이들의 몸값으로 거금이 지불되고, 심지어 1등석 귀국에 건강검진까지 받게 해줬다는 사실에 분노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들이 거의 아무런 필터 없이 기사화되었다. 

 

그로부터 15년이 지났지만, 이 한 편의 영화가 일깨운 것은 피랍된 한국인 21명의 성공적인 구조가 아니었다. 각종 사이트 영화 후기란에 도배되어 있는 것은 영화 자체의 내용보다는 샘물교회 사건과 한국 개신교에 대한 거대한 반감이었다. 영화를 이미 본 사람들은 정작 문제의 시발점이 된 샘물교회에 대한 이야기는 대사 몇 개로 처리해 버렸다며 공공연한 분노를 드러냈다. 가뜩이나 코로나 시기를 거치면서 얼마 남지 않았던 인심마저 탈탈 털리고 만 기독교계에 영문 모를 어퍼컷이 날아든 셈이다. 

 

뻔한 계산이 틀어졌다!

내가 이 영화를 보게 된 것도 영화 그 자체보단 사람들의 그런 댓글의 영향이 컸다. 제작사 측에선 대중의 이런 반응을 당연히 예상했을 것이고, 미담 아닌 후일담에 대한 거친 반발도 예상했을 것이다. 그 노이즈 마케팅이, 최근 주가를 한층 올린 현빈과 연기라면 이미 보증수표가 된 황정민의 연기와 어우러지면 충분히 제작비를 회수하고도 남는 흥행을 하리라는 계산이 있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잘 만들기만 하면 된다. 감동적이든 화려한 볼거리를 제공하든 아니면 제목에서 연상할 수 있는 어떤 서스펜스만 확보한다면 손익분기점은 거뜬히 넘길 것이다. 

그런데 이 뻔한 계산이 틀어졌다. 

 

영화는 시종일관 방향을 잡지 못한다. 영화 초반부는 피랍의 현장을 생중계하듯 보여준다. 그들에게 어떤 수식어가 붙여지든 간에 적어도 그들은 한국인들이고 또 마땅히 존중받아야할 생명임을 드러내는 것처럼 보였다. 그런데 실소가 터져 나온다. "나는 운전기사일 뿐이야!"라는 현지 운전사의 어색한 대사는 차치하고, 도저히 일촉즉발의 긴장감이 없다. 영화는 마치 고장 난 버스 때문에 트럭으로 옮겨 타게 되었다는 식으로 흘러간다. 아, 감동 코드는 아니구나. 

 

그리고 현지에 도착한 외교부 교섭관 재호(황정민)가 시내에서 느닷없는 폭탄 테러 한 복판에 놓였을 때, 아 이 영화는 '화려한 볼 거리'에 방점을 두었구나 생각했는데 영화를 통털어 뭔가 제대로 터지는 장면은 오직 이 장면 뿐이다. 그 마저도 너무 싱겁게(심지어 자살폭탄테러인데도) 처리가 되어, 혹시 테러범이 '교통 체증' 때문에 테러를 시도한 것이 아닐까 싶을 정도였다. 

 

 

출처 : 다음 영화

 

실제로 있었던 일인지는 모르겠으나, 차관까지 포함된 한국 외교부 교섭팀이 '사기꾼'에게 말려드는 장면도 등장한다. 사기꾼 압둘라 역을 소화해 낸 브라이언 라킨은 초면임에도 불구하고 잔멸하고 있는 한국 배우들 사이에서 '존재감'을 드러내며 감독이 의도치 않은 긴장감을 채워주었다. 그러나 이마저도 바로 이어진 현빈의 멋짐 뿜뿜 액션씬에 의해 한 방에 날아갔다. 그래 현빈이 계약서에 서명을 했으니 이런 "나 혼자 멋진 카 체이싱"이라도 있어야겠지. 그러나 예상과 달리 자동차와 오토바이의 추격 씬은 서로 다른 차종에서 기대할 수 있는 그 어떤 신선함도 주지 못 한다. 아니, 이쯤 되면 안 했다고 보는 게 맞다. 압둘라의 사기행각은 그 치밀한 준비와는 달리 황당한 '교통사고'로 미수에 그치게 되고, 도무지 명령체계가 보이지 않는 국정원 직원(현빈이다)은 국제 브로커에게 보이스피싱 당한 금액을 직접 들고(어떻게 걸어왔지? 라는 질문은 거절), 금의환향한다. 영화가 본격적으로 한심해지기 시작한 지점이다. 

 

뭐지, 이거?

임순례 감독은 인터뷰에서, 처음엔 제작사의 감독 제의 요청에 의아했다고 말했다. 남자만 줄줄이 등장하는 영화에 왜 나를?

그러게 왜 그녀를!!

개인적인 견해로, 와이키키 브라더스로 화려하게(?) 데뷔한 임 감독에게 가장 잘 어울리는 옷은 '리틀 포레스트'이다. 완성된 서사에 세련된 영상의 옷을 입히는 것. 말끔하고 세련된 화면으로 만드는 능력. 즉 누가 봐도 '일본 영화'스러운 소품에 가장 적합한 스타일이 아닌가, 였다. 때문에 임순례 감독의 '교섭'이라면 인물과 인물이 부딪히는 서스펜스 가득한 장면을 연상하게 되었다.

 

사실 이러한 연출에는 쿠엔틴 타란티노 감독이 단연 최고이다. 그의 영화 "바스터즈 : 거친 녀셕들"의 첫 장면이나 "헤이트풀 8"의 선술집 장면은 특별한 볼거리 없이도 관객의 심장을 내내 조여들게 한다. 그것은 철저히 연출자의 능력이다. '화려한 볼거리'가 없어도 몰입하게 되고, 연기자의 숨소리 하나에 가슴을 부여잡게 된다. 그러나 그것을 임순례 감독에게 기대해서는 안 되는 일이었다. 오히려 박훈정 감독(신세계, 마녀, 낙원의 밤 등 연출)이 더 가깝다. 

 

*

영화의 맥락없는 서사가 널 뛰듯 이어질 때마다 나는 '버나드 쇼'의 그 띵언이 자꾸 멤돌았다. 이렇게 어리버리하다가는 그 꼴이 날 것만 같은 불안감이 또 다른 서스펜스가 되었다. 가장 클라이막스여야할 상황, 손에 땀을 쥐는 긴장감으로 화면 가득 채워야할 동굴 속 교섭 장면에서 엉뚱하게 끼어 드는 한 줄기 클리세들이 아직 채 부풀지도 않은 반죽을 엉망진창으로 만들어 버린다. 정말 저렇게 교섭을 한다고? 

미군이 이십 년 넘게 헛물만 키던 곳이 아프간이 아닌가? 반미 기조의 정부를 무너뜨리기 위해 막대한 자금 지원과 무기 지원으로 키워낸 그룹이 바로 '탈레반'이 아니던가? 그런데 정작 미군이 자신들이 판 무기로 되레 공격을 당하던 곳도 바로 아프간이 아니던가. 미군이 아프간에서 철수하자마자 기다렸다는 듯이 탈레반이 정권을 장악하고, 현재도 악명높은 이슬람 통치를 이어가는 곳이 바로 아프간이 아닌가. 

그런 아프간의 탈레반을 상대로 저렇게 두 손에 사탕 쥐어 주 듯 교섭을 했다고? 그게 사실이어도 기막힐 노릇인데, 숨 막히는 교섭은 커녕 모든 것을 장난처럼 느껴지게 하는 감독의 연출은 할 말을 잃게 만든다. 왜 지 편을 그 순간에 죽여? 왜? 뭐지 이거? 

 

영화는 기대에 어긋나지 않았다. 

100억 원 넘게 투자된 영화니 최소 300만은 극장을 찾아야 손익분기를 넘길텐데, 아무래도 그런 아름다운 결과를 기대하긴 어려울 것 같다. 한국 개신교 선교사에 큰 비극을 남긴 묵직한 주제에 눌려 비장한 마음으로 자리에 앉았으나 헛웃음만 나는 영화의 조악한 완성도가 마비시켜버린 비통한 마음으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노이즈 마케팅을 당한 것은 영화가 아니었다. 이쯤 되면 샘물교회에 대한 사회적 분노가 오히려 함량미달의 영화를 따뜻하게 감싸주고 있는 꼴이다. 그래 내가 이 꼴이 될 줄 알았지... 영화 내내의 불안감은 현실이 되었다.

그나마 위로가 되는 것은 KT VIP 초이스 멤버십 덕분에 적어도 한 사람은 포인트로 볼 수 있었다는 점이다. 

 

 

 

 

 

* 현빈은 '공조' 스타일의 동어반복형 캐릭터에서 그만 벗어나길. 영화 속 현빈의 대사가 모두 북한 사투리처럼 들렸어....

* 역시 착한 '황정민'은 어울리지 않는다. 부라더~ 안 어울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