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IDBARR

그가 오신 이유

mimnesko 2023. 2. 9. 10:56

- 마태복음 9:27~38

 

 

늦은 저녁, 서울 근교의 기도원을 방문하기 위해 혼자 산길을 올랐던 적이 있었습니다. 비록 차가 다닐 수 있는 포장도로가 기도원까지 이어져 있었고 드문 드문 가로등이 밝혀져 있긴 했지만 그래도 주위가 깜깜해진 시간에 인적 없는 산길을 올라간다는 것은 생각보다 많은 용기(?)가 필요했습니다. 특히 드문한 가로등의 노란 빛 아래 있다가 그 경계를 벗어나 컴컴한 길로 접어 들 때면 저절로 입에서 찬양이 흘러나올 정도였습니다. 약 30분 남짓한 그 길이 까마득하게 느껴졌습니다. 

 

그러다 문득 눈을 들어보니 가로등과 가로등 사이, 그 거뭇한 길 사이로 무언가 희끗한 게 보였습니다. 애써 눈길을 피하려 애썼지만, 심장은 가빠오고 저절로 눈은 그 정체모를 것에 집중이 되었습니다. '사람인가?' 사람이겠죠. 그 시간에 길을 따라 내려오는 것은 사람밖에 더 있었겠습니까? 그런데 그 움직임이 좀 특이했습니다. 사람인가? 싶었던 이유입니다. 걷는 동작치곤 너무 컸습니다. 그리고 관절마다 툭툭 꺾여 있는 것처럼 부자연스러웠습니다. 그 괴상한 움직임에 가슴이 한껏 오그라들었습니다. 찬양도 나오지 않았습니다. 마른 침을 꼴딱거리며 마침내 환한 가로등 아래에서 그 '정체모를 것'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물론 그건 사람이었습니다. 그것도 한쪽 다리에 깁스를 하고 목발에 의지하여 조심히 기도원부터 산길을 내려오시던 성도님이었습니다. 어깨에 맨 가방이 연신 흘러내리는데 한 손이 목발을 집으랴 가방을 다시 올리느라 바빴습니다. 그래서 멀리서 보이던 모습이 좀 특이했던 거였습니다. 그 분 역시 거뭇한 길을 올라오던 제 모습에 겁을 먹으셨던지 크게 찬송가를 부르며 내려오고 계셨습니다. 

밝은 가로등 아래에서 그분과 간단한 목례로 길을 지나치면서 제 안에 자리잡았던 '두려움'에 대해서 생각해 보게 되었습니다. 

 

사실 공포와 두려움은 '비일상성'에서부터 옵니다.

당연하다 싶었던 것이 갑자기 뒤틀려질 때, 일상적이던 모습 속에 갑자기 이질적인 어떤 것이 비집고 들어올 때, 우리는 '두려움'을 느낍니다. 그 두려움은 '경외함'이 되기도 하고 '강한 거부감'이 되기도 합니다. 예수님이 찾아오셨던 이스라엘 지방의 사람들 역시 그와 비슷한 비일상성의 두려움을 느꼈던 것처럼 보입니다. 

 

귀신이 쫓겨나고 말 못하는 사람이 말하거늘 무리가 놀랍게 여겨 이르되 이스라엘 가운데서 이런 일을 본 적이 없다 하되 (32절)

 

 

예수님의 놀라운 기적들은 그들의 '일상성'을 비집고 들어온 가공할 만한 '비일상적인 경험'이었습니다. 예수님을 그 때마다 '두려워하지 말라'라고 우리를 다독여 주십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일상성을 깨고 새로운 질서, 즉 하나님나라의 경험을 주시기 위해서 우리에게 오셨기 때문입니다. 마태복음의 저자는 이러한 예수님의 지상 사역을 9장 35절에 다음과 같이 요약하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모든 도시와 마을에 두루 다니사 그들의 회당에서 가르치시며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며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시니라. (35절)

 

이 한 절의 말씀 속에 '그가 오신 이유'가 담겨 있습니다. 그분은 우리의 일상을 견고하게 하기 위해서 오신 분이 아니라, 오히려 우리 일상의 견고한 벽, 그 아집과 고집과 편견과 선입견에 거대한 틈을 내시기 위해서 오신 분입니다. 우리의 상식으로는 헤아릴 수 없는 하나님의 나라의 소식을 전하기 위해 이 땅에 오셨습니다. 모든 병이 고침을 받고, 모든 약함이 나음을 얻는 것은 철저히 비일상적인 사건들입니다. 우리의 좁은 인식과 경험으로는 그 발끝도 헤아릴 수 없는 거대한 존재로 예수님은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 분이 바로 나의 구원자입니다. 이 기쁨의 고백은 아무리 외쳐도 넘치지 않는 기쁜 소식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