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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인불양(當仁不讓)

mimnesko 2023. 2. 7. 11:02

- 마태복음 9:1~13

 

명나라 말 청나라 초, 고염무라는 사람은 명나라가 망하자 비밀조직을 결성해서 반청 운동을 벌이다가 끝내 실패하였습니다. 이후 그는 청나라 조정에 참여하기를 거부하고 평생을 저술로 마쳤습니다. 그의 대표작이 바로 '일지록'(日知錄)입니다. 그 책에서 고염무는 "천하흥망 필부유책(天下興亡 匹夫有責)"이라고 주장합니다. 말 그대로 "천하가 번성하고 쇠퇴하는 데는 논에 농사를 짓고 산에서 나무하는 보통 사람에게도 책임이 없을 수 없다."는 뜻입니다. 

 

얼마 전 이태원에서 안타까운 사고로 많은 사람이 소중한 목숨을 잃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술 먹고 놀러간 사람들이 사고로 죽은 것까지 우리가 애도해야 하는 거냐"라는 볼멘 소리를 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누구도 자발적으로 '피해자'가 되는 사람은 없습니다. 우리 역시 어느 순간에 의도치 않고 원하지 않는 '피해자'가 될 수 있습니다. 고염무의 '필부유책'이라는 지적은, 개인의 문제를 떠나 사회적인 문제 안에서도 우리는 결국 피해자 또는 가해자 중 하나가 될 수 밖에 없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사회는 개인에게, 또 개인은 집단을 향해 '옳고 그름'에 대한 활발한 논의를 이어가야 합니다. 라인홀드 니버의 지적처럼 집단으로서의 사회는, 선량하고 도덕적인 개인이 모인 집단이라고 할지라도 얼마든지 비도덕적이고 반인륜적이며 평화에 반대하는 결론을 내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공자는 적어도 '평화와 어짐'의 문제에 관해서만큼은 스승에게도 반기를 들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 

子曰 : 當仁, 不讓於師. (자왈 : 당인, 불양어사)

 

사회가 비도덕적이고 반인륜적이며 평화를 불태우는 결정을 할 때, 비록 논에서 농사를 짓고 산에서 나무를 하는 사람일지라도 분연하게 반기를 들 수 있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당사자가 아니란 이유로, 또는 당장의 피해자가 아니라는 이유로 멀찌감치 떨어져 자신의 감정만 툴툴 털어냈다고 해서 그 책임이 없다고 볼 수 없다는 것입니다. 

 

***

오늘 말씀 속에서 예수님은 대중의 가치과 사고, 그리고 종교적인 관습에 정반대 되는 두 가지 일을 하셨습니다. 한 가지는 공공연하게 사람의 죄를 사한 것이고 두 번째는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어울린 것입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한 사람 한 사람으로서는 경건한 신앙인이었을지 모르나 집단(바리새파, 사두개파 등)으로서는 차별과 억압, 정죄와 부정의 모습을 보이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그들과 어떠한 타협도 하지 않으셨습니다. 설령 그것이 기존의 종교적 관습을 모두 뒤집어 엎는 결과가 되더라도, '죄인을 부르시는' 하나님의 뜻을 세상 곳곳에 명확하게 전달하고자 하셨습니다.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13절)

 

 

기독교인들은 적어도 이 문제에 대해서는 '당인불양'의 기개를 가져야 합니다.

교회가 사회적 차별을 공고히 하는 일에 앞장 설 수 없는 이유가 바로 이것입니다. 정작 한국 사회 내에서 모든 차별의 피해자 위치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스스로를 또 다른 '가해자'로 자처하며 종교의 이름으로 사회적 폭력에 앞장서는 것은 상식에도 이치에도 맞지 않습니다. 무엇보다 '죄인을 부르러 오신' 예수님의 뜻과는 정반대에 서는 일입니다. 

 

종종 한국기독교사를 '순교의 역사' 또는 '피의 역사'라고 말하곤 합니다. 이 때 '순교'나 '피 흘림'은 기꺼이 '피해자'들과 함께할 때만 가능한 일입니다. 많은 순교자들은, 예수님이 그러셨던 것처럼, 가난하고 소외되고 사람의 취급을 받지 못 했던 죄인과 세리들을 위해 기꺼이 목숨을 버렸습니다. 얼마든지 가해자일 수 있었던 위치에서 내려와 오히려 피해자의 대변인으로 목에 칼을 받았습니다. 그 폭력의 가해자는 때론 조선의 조정이었고, 일본 제국주의였고, 반민주적인 행태를 서슴치않던 파시스트들이었습니다. 그러므로 기독교의 역사는 피해자들과 함께한 역사였고 차별자들을 끌어 안은 채 가해자의 몽둥이를 온 몸으로 막아내던 역사였습니다. 

 

오늘 마태를 찾아오셨던 예수님의 모습은, 만약 스스로를 경건한 기독교인이라고 생각하면서도, 사회적인 차별과 폭력, 그리고 반인륜적이고 평화를 깨뜨리는 일에 나몰라라 한다면 그는 '가해자'와 다름이 없다는 것을 분명하게 일깨워줍니다. 오늘 우리는 가해자의 편에 있습니까? 아니면 피해자의 편에 있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