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IDBARR

어찌하여 무서워 하느냐

mimnesko 2023. 2. 6. 10:46

- 마태복음 8:23~34


깊은 바닷 속을 들여다 보신 적이 있으신가요?
어린 시절, 가족들과 함께 낚시배를 빌려 바다 낚시를 해 본 적이 있었습니다. 뭍에서 떠난 통통배는 약 20여 분 간 물살을 가르고 바다 가운데로 향했습니다. 점점 멀어지는 뭍을 바라보며, 그리고 소금기 가득한 바람과 함께 눈 앞에 펼쳐지는 수평선을 바라보며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느낌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게 정확히 어떤 느낌인지는 설명할 길이 없었습니다.

마침내 배가 엔진을 끄고 닻을 내렸습니다. 날씨는 맑았고 바다의 너울은 생각보다 높았습니다. 연신 배를 때리는 파도에 마치 놀이기구를 타는 것처럼 배는 위 아래로, 때론 조금 불안한 소리를 내며 양 옆으로 흔들거렸습니다. 배의 선장은 별일 아니라는 듯이 사람들에게 간단한 낚시도구를 나눠주고는 연신 뱃머리에서 담배를 피웠습니다. 저는 그 때, 배를 때리며 출렁거리는 바다를 한참 바라보았습니다. 푸르스름한 표면과 달리, 그 아래는 칠흙같이 어두운 검푸른 물이 까마득했습니다. 그 물 아래에 무엇이 있을지 알 수 없었습니다. 아마도 풍덩 그 속에 빠진다면 발 끝은 바닥도 없는 거대한 물길 속에서 퍼덕일 것이 분명해 보였습니다. 그 때에서 항구를 떠날 때 느꼈던 이질적인 느낌의 정체가 무엇인지를 알 수 있었습니다. 그것은 '두려움'이었습니다.

이 넓은 망망대해에 비해 우리가 서 있는 작은 배는 말 그대로 나뭇잎 한 장처럼 느껴졌습니다. 너울이 일 때마다 그런 느낌은 더욱 뚜렷해졌습니다. 이 작은 나무조각에 기대어 바다 위에 둥실 떠 있는 것은, 그 어떤 표현으로도 '안전함'과는 거리가 멀어 보였습니다. 이처럼 불안과 위험에 가까이 직면하면서도 이 작은 조각인 나를 안전하게 지켜주리라는 희막한 믿음이 거대하게 자리잡는 경험은, 그 때서야 찾아든 배멀미처럼 생소한 경험이었습니다.

오늘 본문의 많은 제자들은 배를 뒤집을 듯 밀려드는 바닷물을 바라보면 엄청난 '공포'를 느낍니다. 그런데 정작 예수님은 꿀잠을 주무시고 계십니다.

바다에 큰 놀이 일어나 배가 물결에 덮이게 되었으되 예수께서는 주무시는지라(24절)


이 본문은, 위태로운 배 안에서 태평하게 잠을 청했던 요나를 즉시 떠오르게 합니다. 요나와 예수님 모두 주위의 위태로운 상황에도 불구하고 꿀잠을 자고 있었습니다. 사람들이 찾아와서 깨웠던 것도 흡사합니다. 그런데 그 다음 행동에는 조금 차이가 있습니다. 요나는 이 풍랑의 이유가 자신에게 있음을 알고 자청해서 바다로 뛰어듭니다. 빛도 없이 깜깜한 깊은 바다 위에서, 그것도 거대한 풍랑이 배를 덮쳐 거대한 배조차 나뭇잎처럼 느껴지는 그 두려움 속에 바다로 뛰어든다는 것은 목숨을 버리는 일과 다름이 없습니다. 요나는 스스로 목숨을 끊어 하나님의 노여움(그 이유가 자신에게 있으므로)을 가라앉힐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오히려 바람과 바다를 꾸짖으셨습니다. 그 풍랑과 바람의 이유를 궁금해하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사람을 두렵게하는 그 대상을 꾸짖고 나무라셨습니다. 거센 풍랑이 일던 바다는 본문의 표현처럼 "아주 잔잔하게" 되었습니다. 이 본문은 우리에게 한 가지 중요한 질문을 갖게 합니다. 이 본문은 예수님의 위대함이나 요나와의 차별성을 나타내는 데 그 목적이 있지 않습니다. 거대한 바다에 대한 두려움을 이겨내는 지혜를 가르쳐주는 것도 아닙니다. 인생의 거대한 풍랑이 일 때, 우리가 어떻게 해야하는가, 에 초점이 있는 것도 아닙니다. 오히려 이 본문이 우리에게 묻고있고 또 가르쳐주고 있는 것은,

예수님은 실제적으로, 그리고 구체적으로 어떤 일을 하실 수 있는 분이신가?


종종 우리의 신앙은 구체적인 두려움 앞에 추상적인 믿음을 대안으로 삼을 때가 많습니다. '믿음을 가지면 됩니다!'라는 말처럼 공허한 외침은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세상에 발을 디디고 사는 우리에게, 삶을 초월한 믿음을 소유하고 산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믿음의 분량'이 다 차면 두렵지 않을 것이라고 말씀하신 적이 없습니다. 오히려 우리의 부족한 믿음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이 구체적으로 어떤 일을 행하시는지를 보여주고 싶어하셨습니다.

물에 빠진 베드로에게, "자 믿음을 가지고 다시 일어서 보거라"라고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내 그럴 줄 알았지"라고 비웃지도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안타까워하셨습니다. 그리고 즉시 손을 내밀어주셨습니다. 우리가 놓치는 부분이 바로 이것입니다.

예수님은 '실제적으로', 그리고 '구체적으로' 우리 삶에 개입하시는 분입니다. 2천 년 전에도 그러셨고 지금도 그렇습니다. 사람들이 가히 공포스러워할 정도의 결과 - 이이가 어떤 사람이기에 바람과 바다도 순종하는가 - 를 아무렇지도 않게 만들어내시는 분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가져야할 믿음의 내용입니다. 오늘 우리의 삶에 풍랑이 찾아올 때, 깊은 바다와 같은 두려움이 앞설 때, 한 번도 가보지 않은 길에 걸음을 내딛을 때 느끼는 공포가 찾아올 때, 바람과 바다도 잔잔하게 하실 수 있는 예수님이 우리와 함께하고 계시다는 것을 믿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믿음이 부족할 때마다 손을 내밀어 나를 건져주시는 예수님을 또한 믿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 삶의 강력한 안전망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