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IDBARR

그 헤아림으로

mimnesko 2023. 2. 1. 10:09

- 마태복음 7:1~12

 

 

만약 오늘 묵상을 새벽 설교나 강해 설교의 본문으로 정했다면, 틀림없이 그 강조점은 7절에 맞춰졌으리라 생각합니다.

"구하라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리하면 찾아낼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문장의 기승전결 구조처럼 마태복음 7장의 전반부는 7절 말씀을 향해 달려가는 완만한 상승곡선처럼 보입니다. 그리고 대단원의 결론은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이것이 율법이요 선지자니라." 라는 12절의 말씀에 놓입니다.

비록 신학자 칼빈은 이 결론이 앞의 말씀, 즉 7장 1~11절까지와는 큰 관련이 없이 서술된 단독적인 도덕률이라고 보기도 했지만 접속사 '그러므로(헬 oun, 영어로는 then, therefore의 의미가 있습니다)'는 이 말씀이 전체의 결론처럼 보이게 합니다. 

 

그렇게보면 구하라, 찾으라, 두드리라는 친숙한 표현은 12절의 결론과 꽤 거리가 있어 보입니다. 오히려 1~12절까지의 분위기는 '당신이 한 그 행동들이 당신에게 고스란히 돌아갈 것이다'라는 비장함이 느껴집니다. 

 

비판을 받지 아니하려거든 비판하지 말라(1절)

 

마치 어떤 '비판'도 용인할 수 없다는 이 강인한 태도는 우리를 움츠러들게 합니다. 개인뿐 아니라 사회에 대한 일절의 비판도 용서받지 못할 것처럼 여겨집니다.  그리고 그 '비판'은 종종 자신의 눈에 '들보'도 빼지 못하면서 남의 눈에 '티'를 빼고자 하는 아전인수의 태도처럼 보여집니다. 과도한 자기검열이 마치 종교적인 의무인 것처럼 여겨집니다. 이러한 '좁은 시각'은 꽤 오랫동안 기독교인들의 보이지 않는 족쇄가 되어져 왔습니다. 흥미로운 것은 그것이 '자기검열'의 수단이라기보다는 오히려 '타인검열'의 증거로 오용될 때가 많았다는 점입니다. 

 

사람 사는 일에 비평과 비판이 없을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그 때마다 대화의 마지막이 "당신 눈에 들보나 빼고 말하시오!" 라는 식이라면 비판은 금새 '비난'으로 바뀌고 대화는 그 효용을 상실하고 맙니다. 사실 이것은 '비판을 감당할 정도의 성숙'이 없는 사람과의 비판적 대화가 결국은 '거룩한 것을 개에게 던져주는' 것과 다름이 없다는 것을 우리에게 일깨워줍니다. 누군가를 날선 칼로 벨 요량이라면 자신의 몸에 비슷한 상처가 한두 개 생기는 것을 두려워해서는 안 됩니다. 비판을 위한 비판, 자신만 쏙 빠진 남을 향한 날선 말들을 우리가 '비난'이라고 따로 묶어 말하는 이유가 바로 이것입니다. 

 

'정의(正義)'라는 단어는 하나의 형상이 아닙니다. 

종교인이 말하는 정의와 정치인이 말하는 정의가 다릅니다. 법조인이 말하는 정의와 언론인이 말하는 정의가 다릅니다. 사용자가 말하는 정의와 노동자가 말하는 정의도 다릅니다. 농부가 말하는 정의와 어부가 말하는 정의가 다릅니다. 그런데 만약 누군가가 자신이 말하는 '정의'만 옳은 것이라고 주장한다면, 그것이 바로 '파시즘'입니다. 날선 비판은 날선 비판을 부릅니다. 우리의 헤아림은 대상의 헤아림을 부릅니다. 나만 옳다, 내 생각만이 옳다라는 함정을 벗어나야 비로소 우리가 진심으로 구하고 찾고 두드려야 할 대상이 보입니다. 우물 안에서 보는 하늘을 세상의 전부라고 여기는 시선으로는 결코 우리의 진정한 필요(이 우물을 벗어나야겠다, 라는)를 발견하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헤아림을 견딜 수 있는, 비판을 감당할 수 있는, 그러나 관대하고 너그러운 마음을 담아가는 일은 어렵습니다. 사실 인간으로서는 요령부득의 일처럼 여겨집니다. 그래서 오늘도 찾고, 구하고, 두드립니다. 하나님, 우리에게 이 관대함을 주시옵소서. 이 너그러움을 주시옵소서. 아들이 떡을 달라는데 돌을 줄 부모가 없고, 생선을 달라는데 뱀을 줄 부모가 없듯, 이 요령부득의 일을 우리에게 허락해 주시옵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