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염려하지 말라

mimnesko 2023. 1. 31. 11:11

- 마태복음 6:19~34

 

고대 로마의 작가 '히기누스'가 쓴 우화가 있습니다.

염려의 신 '쿠라(Cura)'가 어느 날 강가를 건너다 진흙을 발견하고 그 진흙을 떼어 형상을 하나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주피터 신에게 자신이 만든 진흙 형상에 혼을 불어 넣어달라고 부탁을 했습니다. 주피터는 흔쾌히 쿠라의 부탁을 들어주었습니다. 쿠라가 그 형상에 이름을 붙이려고 하자 주피터가 자신이 혼을 불어넣었으므로 자신이 이름을 붙여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최고의 신(神)이라기엔 참 속좁은 모습입니다. 쿠라는 자신이 빚은 점토 형상이니 자신이 이름을 붙이겠다고 주장합니다. 그렇게 둘이 옥신각신하고 있는데 텔루스, 즉 대지의 신이 나타납니다. 그리고 원 재료(점토)의 제공자가 자신이니 자신의 이름을 붙여야 한다고 주장하기 시작합니다. 

말 그대로 셋의 '진흙탕 싸움'은 결국 시간의 재판관이 사투르누스에게까지 가게 됩니다. 시간의 재판관은 이렇게 판결을 내립니다.

 

주피터는 몸을 주었으니 그가 죽을 때 혼을 받고, 텔루스는 육체를 선물했으니 그가 죽을 때 육체를 받아라. 하지만 쿠라(염려)가 이 존재를 처음 만들었으니 이 존재가 살아가는 동안 이 존재는 쿠라의 것이니라. 그러나 이 존재의 이름은 후무스, 즉 흙으로 만들어졌으니 호모(인간)라고 부를지니라

 

 

사실 이 우화는 하이데거가 '존재와 시간'이라는 책에서 인간(Dasein)의 존재를 설명하는 데 인용한 덕분에 잘 알려지게 된 이야기입니다. 인간이란 존재는 그 생명이 붙어 있는 한 염려로부터 떨어질 수 없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하이데거는 방향없는 걱정(Angst)과 달리 염려(Sorge)야 말로 인간 그 자체라고 설명합니다. 그래서 "인간은 인간의 존재 자체가 늘 문제가 되는 존재다." 라고 지적합니다. 

 

실존주의 철학자들의 입장에선 예수님의 선언, 즉 '염려하지 말라'라는 말은 인간의 존재 방식을 정면으로 거스르라는 말처럼 들릴 것입니다. 하이데거나 사르트르의 견해로는 염려를 떠나 인간은 살 수 없습니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최종의 결론, 죽음이라는 염려 앞에 살아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죽음을 향한 중단 없는 카운트다운 위에 살아가는 인간은, 그 유한함으로 인해 현재의 삶을 더욱 풍족히 누리고자하는 열망을 갖게 됩니다. 또 풍족한 삶을 누리는 사람들일수록 자신의 후대가 '풍족한 기반' 위에서 제한된 삶의 경쟁을 시작하기를 바랍니다. 삶을 움직이는 강한 원동력이 바로 이 '염려'로부터 출발한다는 것은 아이러니한 일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염려'자체를 하지 말라고 말합니다. 

그 의미는 우리 삶의 원동력이 '염려'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 대한 강렬한 '열망'에 있음을 지적한 것입니다. 동시에 우리의 기도에 응답하시는 '동역'의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하신다는 사실에 주목할 것을 예수님을 강조하셨습니다. 우리가 염려하는, 아니 염려가능한 모든 삶의 조건이 하나님 안에 있다는 것을 인정할 것을 요구하시는 것입니다.

 

쉽지 않은 일입니다. 날마다 시들지 않는 열망을 지키며 살아가는 것은 어렵습니다. 예수님은 그 어려운 삶에 매몰되지 말고 하나님께서 주시는 '힘'을 소망하라고 거듭 강조합니다. 그것은 결코 상징적인 메시지도 아니고 막연한 낙관론도 아닙니다. 만약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를 이 땅에 도래하게 하는 사역자의 삶을 살아간다면, 만나와 메추라기로 오늘 하루의 삶과 먹을거리를 챙겨주시겠다는 하나님의 실질적인 약속이기도 합니다. 단 하루치의 사역. 단 하루치의 약속. 그 경건한 약속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들만이 실존주의 철학자들의 '염려'를 벗어날 수 있습니다. 방향없는 걱정에 매몰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메시지 성경은 본문의 34절을 다음과 같이 번역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바로 지금 하고 계신 일에 온전히 집중하여라. 내일 있을지 없을지도 모르는 일로 동요하지 마라. 어떠한 어려운 일이 닥쳐도 막상 그 때가 되면 하나님께서 감당할 힘을 주실 것이다.
(마태복음 6:34, 메시지)

 

 

염려하지 말라, 는 예수님의 메시지는 거꾸로 오늘 하루 나에게 주신 하나님의 사명에, 하나님께서 지금 바로 내 눈앞에서 하고 계신 일에 주목하라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열망이 염려를 지웁니다. 어떠한 어려운 일 앞에서도 꺼지지 않은 열망으로 살아가는 충실한 하루를 꿈꿉니다.

 

 

 

* 본문의 하이데거 해석은 감신대 설왕은 교수님에게 도움을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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