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MEMBRANCE 86

반추

돌이켜 생각해보는 일에 게을러진다. 돌이켜 생각하는 일에 약간의 두려움이 생겼기 때문이다. 억지로 맞서 생각할 만큼의 여유가 없다는 핑계가 생겼다. 몇 년이 시간이 흐르면, 오늘의 나를 어떤 모습으로 또 기억하게 될까? 그때도 역시, 유쾌하지 않은 웃음으로 반추되는 기억을 저만치 떠밀어낼 건가. 마음이 흘러가는 방향은.. 마치 길을 정하지 않은 바람소리 같아서 귀곁에서 웅웅거리다가 어느새 저만치 하늘 끝에 툭하니 걸린다. 무심하게 키워보는 화초처럼, 물도 주지 않아도 지루한 장마에 햇빛조차 변변치 않았는데도, 어느새 훌쩍 자라버렸다. 내일은 일찍 일어나야하는데. 나는 게을러지고 있다. Fin.

REMEMBRANCE 2011.07.18

하루 종일, 비

후두둑 비가 떨어지기 시작하면, 마른 땅을 적시는 그 비 냄새를 참 좋아했다. 나른하게 내리는 봄비를 툭툭 털어내며 걸었던 기숙사 가던 길도 참 좋았고, 아펜젤러관 아치 지붕 아래에서 굵은 빗줄기로 쏟아지는 장맛비를 보는 즐거움도 작지 않았다. 쏴아아, 하고 비가 내린다. 온 사방이 어둑해진 도시의 풍경은 잔뜩 움츠린 고양이 같다. 라고 생각을 하다가도 금새 고양이는 무슨 하며 툭툭 털고 일어나 손을 내밀어 비를 만진다. 손바닥 위로 투둑 투둑 떨어지는 빗방울은 무색이다. 누구는 황사가 들었다면서, 또 누구는 방사능 빗줄기라면서 별로 막을 길 없는 빗줄기를 나뭇잎만한 손바닥으로 가리고 뛰어다니지만... 빗방울은 1억년 전부터 빗줄기여서, 투명한 그 물빛에 왠지 모를 거대함이 느껴진다. 방사능 따위... ..

REMEMBRANCE 2011.05.09

민수기 15장 : 네 귀퉁이의 옷술

37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38 이스라엘 자손에게 명령하에 대대로 그들의 옷단 귀에 술을 만들고 청색 끈을 그 귀의 술에 더하라 39 이 술은 너희가 보고 여호와의 모든 계명을 기억하여 준행하고 너희를 방종하게 하는 자신의 마음과 눈의 욕심을 따라 음행하지 않게 하기 위함이라 40 그리하여 너희가 내 모든 계명을 기억하고 행하면 너의의 하나님 앞에 거룩하리라 41 나는 여호와 너희 하나님이라 나는 너희의 하나님이 되려고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해 내었느니라 나는 여호와 너희의 하나님이라 - 민수기 15장 37~41, 개정개역성경 본문의 설명대로 옷술(치치트, tzitzit)은 '여호와의 모든 계명을 기억'하기 위한 방법이었다. 하나님께선 이스라엘 민족의 옷단 귀에 청색 끈을 더한 옷술을 ..

REMEMBRANCE 2011.04.01

waterman

Waterman Hemisphere Moonlight CT 늘 누군가에게 선물하던 만년필을 큰 맘 먹고 구입했다. 중요한 미팅 자리에서 필통꺼내 필기구를 꺼내는 일이 어쩐지 얼굴 뜨거운 일로 여겨질 무렵부터 만년필을 하나 사야겠다, 라는 호기를 부렸다. 종이 위에 사각거리며 잉크를 남기는 그 소리와 느낌이 좋아서 만년필은 오래전부터 위시리스트에 있었지만, 딱히 큰 필요가 없다는게 늘 뒷목을 잡곤 했는데, 이 정도는 나이에 걸맞는 소품이야, 라는 억지와 함께 마침 일이 있어 나간 차에 광화문 핫트랙에서 구입했다. 워터맨 헤미스피어는 만년필로는 매우 착한 가격(몽블랑을 검색해보라!)의 프랑스 제품이지만, 그립감부터 펜촉의 느낌까지 만년필의 기본이 제대로 잡혀 있다. 컨버터(위의 사진에서 만년필 옆에 있는 것..

REMEMBRANCE 2011.03.19

호타루의 빛

최근에 재미있게 보았던 일본드라마, 호타루의 빛 일본어는 전혀 모르기 때문에(자막의 힘은 늘 놀랍다!), 인트로에 나오는 영상을 보고 호타루=반딧불이 아닐까 추측해보는 정도지만 드라마의 내용은 '반딧불'과는 전혀 관련이 없다. 주인공의 이름이 제목과 같은 호타루(아야세 하루카). 이 드라마에선, 회사에서는 능력있고 깔끔한 여직원이지만 집에서는 '주머니가 뒤집어진' 트레이닝복 차림에 아무렇게나 모아 하나로 묶은 머리, 한 손에는 캔맥주와 입에는 오징어를 질겅거리는 여성을 '건어물녀'로 정의하고, 주인공을 그 '건어물녀'의 대표주자로 등장시킨다. 그녀가 건어물녀에서 벗어날 가능성은, "무리. 절대 무리, 죽어도 무리, 죽었다 깨어나도 무리"이다. 우연히(라고 말하기엔 어이없는) 같은 집에 동거아닌 동거를 하..

REMEMBRANCE 2011.03.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