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IDBARR

하나님은 어디에 계시는가?

mimnesko 2023. 9. 15. 10:10
열왕기상 6:14-38

14 솔로몬이 성전 건축하기를 마치고
15 백향목 널판으로 성전의 안벽 곧 성전 마루에서 천장까지의 벽에 입히고 또 잣나무 널판으로 성전 마루를 놓고
16 또 성전 뒤쪽에서부터 이십 규빗 되는 곳에 마루에서 천장까지 백향목 널판으로 가로막아 성전의 내소 곧 지성소를 만들었으며
17 내소 앞에 있는 외소 곧 성소의 길이가 사십 규빗이며
18 성전 안에 입힌 백향목에는 박과 핀 꽃을 아로새겼고 모두 백향목이라 돌이 보이지 아니하며
19 여호와의 언약궤를 두기 위하여 성전 안에 내소를 마련하였는데
20 그 내소의 안은 길이가 이십 규빗이요 너비가 이십 규빗이요 높이가 이십 규빗이라 정금으로 입혔고 백향목 제단에도 입혔더라
21 솔로몬이 정금으로 외소 안에 입히고 내소 앞에 금사슬로 건너지르고 내소를 금으로 입히고
22 온 성전을 금으로 입히기를 마치고 내소에 속한 제단의 전부를 금으로 입혔더라
23 내소 안에 감람나무로 두 그룹을 만들었는데 그 높이가 각각 십 규빗이라
24 한 그룹의 이쪽 날개도 다섯 규빗이요 저쪽 날개도 다섯 규빗이니 이쪽 날개 끝으로부터 저쪽 날개 끝까지 십 규빗이며
25 다른 그룹도 십 규빗이니 그 두 그룹은 같은 크기와 같은 모양이요
26 이 그룹의 높이가 십 규빗이요 저 그룹도 같았더라
27 솔로몬이 내소 가운데에 그룹을 두었으니 그룹들의 날개가 퍼져 있는데 이쪽 그룹의 날개는 이쪽 벽에 닿았고 저쪽 그룹의 날개는 저쪽 벽에 닿았으며 두 날개는 성전의 중앙에서 서로 닿았더라
28 그가 금으로 그룹을 입혔더라
29 내 외소 사방 벽에는 모두 그룹들과 종려와 핀 꽃 형상을 아로새겼고
30 내외 성전 마루에는 금으로 입혔으며
31 내소에 들어가는 곳에는 감람나무로 문을 만들었는데 그 문인방과 문설주는 벽의 오분의 일이요
32 감람나무로 만든 그 두 문짝에 그룹과 종려와 핀 꽃을 아로새기고 금으로 입히되 곧 그룹들과 종려에 금으로 입혔더라
33 또 외소의 문을 위하여 감람나무로 문설주를 만들었으니 곧 벽의 사분의 일이며
34 그 두 문짝은 잣나무라 이쪽 문짝도 두 짝으로 접게 되었고 저쪽 문짝도 두 짝으로 접게 되었으며
35 그 문짝에 그룹들과 종려와 핀 꽃을 아로새기고 금으로 입히되 그 새긴 데에 맞게 하였고
36 또 다듬은 돌 세 켜와 백향목 두꺼운 판자 한 켜로 둘러 안뜰을 만들었더라
37 넷째 해 시브월에 여호와의 성전 기초를 쌓았고
38 열한째 해 불월 곧 여덟째 달에 그 설계와 식양대로 성전 건축이 다 끝났으니 솔로몬이 칠 년 동안 성전을 건축하였더라

 

교회에서 청소년기를 보낸 사람들이라면 적어도 한 번 궁금해했을 질문이 있습니다. "교회는 과연 성전인가?"라는 것입니다.

교회 내에서 여러 행사를 하다보면 당연히 교회의 예배공간(흔히 '대예배실', '소예배실'로 나뉘는)을 사용하게 됩니다. 일반적인 예배공간은 긴 나무의자가 놓여져 있는 회중석과 목사님이 설교를 하시는 강단으로 구별 됩니다. 붉은 색 카펫이 깔려 있는 강단에는 설교를 위한 강대상과 한 눈에도 꽤 무거워 보이는 의자 몇 개가 놓여있곤 합니다. 그리고 대부분의 교회에선 그 붉은 카펫 위를 올라갈 떄는 신발을 벗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그런데 성탄절이나 여러 행사를 치르다 보면 신발을 신은 채 강단을 올라가야 할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면 교회 어른들과 옥신각신이 시작됩니다. 보통 "어떻게 감히"로 시작되는 그 논쟁의 중심에는, 교회는 '성전'이고 강단은 '지성소'이기 때문에 아무나 올라갈 수도 없고 신발을 신은 채 올라간다는 것은 상상조차 할 수 없다는 생각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교회는 성전일까요? 

흥미로운 것은, 이 모든 규칙이 '대예배실' 즉 대예배가 진행되는 공간에만 국한된다는 점입니다. 소예배실이나 부서 예배실의 경우엔 강단이 따로 없는 경우도 많고 딱히 그곳을 '성전'이라고 생각하는 의식도 크지 않습니다. 물론 신발을 벗고 올라갈 필요도 전혀 없습니다. 오직 대예배실만 성전이 되고 강대상이 놓여 있는 강단이 '지성소'가 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것을 '전통'이라고 말한다면, 도대체 그 전통은 어디서부터 온 것일까요? 

 

 


 

솔로몬이 성전 건축을 마쳤습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에선 성전의 안 쪽, 즉 성소에 대한 자세한 건축 양식을 엿볼 수 있습니다. 솔로몬이 건축한 성전의 성소(외소)와 지성소(내소)는 견고하고 화려합니다. 과거의  천막이 이젠 견고한 백향목과 정금으로 번쩍이는 공간이 되었습니다. 그 규모 역시 정확히 두 배씩 커진 채로 말입니다. 그 화려함 역시 상상조차 어려울 정도입니다. 

 

온 성전을 금으로 입히기를 마치고 내소에 속한 제단의 전부를 금으로 입혔더라 (22절)

 

 

당시의 제사장는 성소에 들어가는 순간 경이로움과 함께 눈부심을 느낄 수밖에 없었을 것 같습니다. 심지어 언약궤 양 옆을 지키는 그룹조차 금을 입혔을 정도입니다. 여기서 한 가지 질문이 생깁니다. 도대체 왜 이렇게까지 했을까요? 우리가 기억하는 "광야의 성막"과는 하나부터 열까지 다른 이 "성전"은 과연 어떻게 생겨나게 된 것일까요? 

사실 솔로몬 성전의 모형이라고 할 수 있는 성막은 하나님께서 직접 설계하여 모세에게 알려주신 것입니다(출 25장). 심지어 "너는 삼가 이 산에서 네게 보인 식양대로 할지니라"(출 25:40)라고 엄중히 경고까지 하셨습니다. 오늘 본문의 38절에도 이와 비슷한 이야기가 등장합니다. 

 

열한째 해 불월 곧 여덟째 달에 그 설계와 식양대로 성전 건축이 다 끝났으니...
(38절 상반절)

 

 

솔로몬 역시 '설계와 식양'대로 성전을 건축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 식양을 바꾸신 걸까요? 조금 더 거칠게 질문한다면, 과연 성막의 하나님께서 이 성전의 하나님과 과연 동일한 분이실까요? 하나님께서 성막의 소소함에 불만을 품고 내 성전엔 온통 금칠을 하라고 하셨던 것일까요? 

도대체 하나님은 어디에 계신 걸까요?

 

이 흥미로운 질문의 대답을 히브리서에서 엿볼 수 있습니다. 히브리서의 기자는 이 세상의 성전이 '하늘나라에 있는 본체의 모형'이라고 말합니다(히 9:23). 모세가 하나님의 식양에 따라 지었던 성막이나 솔로몬이 그 설계와 식양대로 지었던 성전 모두 하늘나라의 '본체'을 모델로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이렇게 이야기 합니다. 

 

 

그들이 섬기는 것은 하늘에 있는 것의 모형과 그림자라 모세가 장막을 지으려 할 때에 지시하심을 얻음과 같으니 이르시되 삼가 모든 것을 산에서 네게 보이던 본을 따라 지으라 하셨느니라.
(히브리서 8:5)

 

 

즉 모세의 장막이나 솔로몬의 성전 모두 하나님께서 보이셨던 '본을 따라' 지어진 것이라는 점입니다.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성막의 양식을 말씀해 주셨을 때는 당시 광야의 백성들이 가지고 있었던 또는 그들이 구할 수 있는 재료를 기반할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때문에 백성들이 모은 귀금속과 귀한 재료, 천과 실과 가죽 등이 성막의 재료로 사용되었습니다. 주변에서 구할 수 있는 나무나 돌 등의 재료를 활용하여 지혜로운 두 사람의 장인에 의해 성막을 지었다면, 솔로몬의 성전 역시 다윗 시대부터 준비된, 가장 귀한 재료들의 총 집합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백향목과 순금, 그리고 외부에서 특별히 초빙한 뛰어난 현장감독까지. 광야의 성막도, 솔로몬의 성전도 모두 당시 준비할 수 있는 최고의 재료와 최선의 노력으로 세워진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것입니다. 과연 그곳에 하나님이 계신가, 하는 점입니다. 이제 내가 집을 지었으니 하나님은 이곳에 계시기만 하면 됩니다, 할 수 있는가 하는 점이지요. 이점에서 모세의 성막과 솔로몬의 성전은 아주 미묘한 차이를 갖게 됩니다. 히브리서 기자의 증언처럼 여전히 지상의 것들은 '모형'에 지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왜 하나님께서는 명확한 '오리지널'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미테이션'에 머무셔야 하는 걸까요?

 

성전이란 '하나님이 계신 곳'을 의미합니다. 광야의 성막은 틀림없이 그랬습니다. 낮에는 구름기둥으로 밤에는 불기둥으로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과 함께 하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누구나 '하나님의 임재'를 목격할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이 어디에 계신가, 물어볼 필요조차 없었습니다. 바로 우리와 함께 계시기 때문입니다. 

 

항상 문제는 성전과 하나님을 분리하는 것에서부터 시작됩니다. 이것을 어려운 말로 '신앙의 피상성'이라고 말합니다. 마치 하나님 없이도 존재할 수 있는 '성전'이 있는 것처럼 말하는 것입니다. 또는 '성전'이라는 건물 속에 하나님을 가두는 것입니다. 두 가지 모두 이스라엘 백성이 되풀이했던 실수이며, 현재까지 '전통'이라는 이름으로 내려오는 일들입니다. 

 

그래서 다시 물을 수 있습니다. "대예배실이 성전입니까?"

이 질문이 성립하기 위해선 최소한 솔로몬의 열심 정도는 있어야 하는 것이 아닐까요? 사방에 금칠은 못하더라도 최소한 그 '설계와 양식'을 지켜야 하는 것이 아닐까요? '전통'이라는 이름으로 되풀이되는 실수는 이제 좀 줄여야 하지 않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