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MEMBRANCE

눅 20:27~40 : 부활논쟁

mimnesko 2012. 3. 26. 17:21

죽은 자가 살아난다는 것은 모세도 가시나무 떨기에 관한 글에서 주를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요 야곱의 하나님이시라 칭하였나니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요 살아있는 자의 하나님이시라 하나님에게는 모든 사람이 살았느니라 하시니 서기관 중 어떤 이들이 말하되 선생님 잘 말씀하셨나이다 하니 그들은 아무 것도 감히 더 물을 수 없음이더라 (37~40)


사두개인들
솔로몬 왕 당시 제사장이었던 사독의 일파로 여겨지는 사두개파들은 바리새파와 더불어 유대의 주요한 정치적 분파이다. 이들은 구약성경(말라기)과 신약성경(마태복음)의 사이의 역사기에서 크게 활약했고 하스몬 왕조의 소멸에 방아쇠를 당겼던 사람들이기도 하다.
헬레니즘 시대를 통과한 유대교의 신앙은 크게 두 흐름으로 나뉘었는데, 그 중 하나는 철저한 율법의 준수와 적용을 강조하던 근본주의적 경향이었고 다른 하나는 철저한 현세주의적 경향이었다. 당시 권력의 가장 가까운 곳에 있었던 사두개파들은 그 중 '현세적'인 감각이 뛰어난 부류였다. 그러므로 사두개인들에게 내세의 삶이란 무의미했고, 영원한 삶이란 계량화되지 않는 공상에 불과했다. 부활과 천국을 믿지 않았으며 현실적인 율법의 해석과 정치 권력의 형성에 보다 많은 관심을 보였다. 

그것이 본문에 등장한 '사두개인'의 배경이다. 그는 어느 정파에도 속하지 않았지만, 수많은 군중에게 영향력, 즉 정치력을 행사하고 있는 청년 예수를 통해 자신들이 믿고자 하는 바를 간접증명하고자 했다. 나아가 예수와 그를 추종하는 세력을 잠재적으로 사두개파의 정치적 영향력 아래에 두고자 하는 음험함도 있었을 것이다.  
그 질문의 내용을 가늠해보아도 그들의 현실감각은 탁월하다. 천국과 지옥의 형이상학적 문제를 결혼의 문제로 한 것이나 일곱 형제와 결혼한 첫째의 부인이 결국 누구의 부인이 되느냐, 라는 실제적인 문제로 환치시키고 결국 '현실'을 떠난 종교가 스스로 존립할 수 있는가 하는 문제를 던진 것이다.

예수의 대답
예수의 대답은 그래서 꽤 의미가 있다. 심지어 서기관들조차도 예수의 대답에 경탄을 마지 않았다.
Some of the religion scholars said, "Teacher, that's a great answer!" _ The Message
그러나 그 대답이란 것이 도무지 한 번에 이해가 되질 않는다. 문장의 구성을 보더라도 "죽은 자가 살아난다는 것은~"에 호응하는 서술어가 마땅히 없다. 갑자기 모세의 이야기가 등장하더니, 하나님에게는 모든 사람이 살았다, 라는 선언으로 끝나기 때문이다.

거칠게 본문을 고민해 본다면, '결국 하나님 앞에선 모두 죽지 않는다' 정도가 된다. 본문의 병행구절인 마태복음 22장과 마가복음 12장의 기록은 '사두개인이 하나님의 뜻을 오해하고 있다'고 표현하고 있다. 사두개인의 질문이 '오해'에서 비롯된 것이고 따라서 정확한 대답을 얻을 수 없었던 것이다. 즉 '부활'이란 사두개인들의 이해처럼 죽음 뒤에 찾아오는 '어떤 새로운 삶'이 아니라, 오히려 우리가 '죽음'으로 이해하는 상황과 매우 흡사한 '상태의 변화'라는 것이다. 

부활논쟁
예수가 '죽은 자가 살아났다는 것은' 하고 예를 들었던 모세의 경우, 떨기나무 앞에서 자신의 조상이었던 아브라함, 이삭, 야곱의 이름을 듣게 된다. 지금 자신에게 말씀하시는 하나님이 바로 자신의 조상의 '하나님'과 동일한 분이라는 것을 확신하게 된다. 이것을 역사의 연속성에서 보통 이해하곤 한다. 즉 구약의 약속, 아브라함에게 주신 하나님의 약속이 면밀히 역사를 통해 이어지고 있으며 이제 모세를 통한 출애굽(물론 모세는 몰랐겠지만)의 기념비적인 사건으로 달려가고 있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역사는 계속되고 있다. 그 시대와 사명에 따라 사용되는 사람들이 달라질뿐이다.

그런데 이것이 어떻게 '죽은 자가 살아났다'는 것의 예시가 될 수 있는가?
아브라함도 이삭도 야곱도 모두 '죽음'을 맞이한 사람들이다. 그들의 부활의 증거는 어디에도 없다. 오히려 죽음의 증거가 더욱 선명하다. 그런데도 예수의 대답은 대단히 선언적이며 절대적이다.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요 살아 있는 자의 하나님이시라

이 문장이 예수가 말하는 부활의 요체요 정수이다. 하나님은 단 한번도 죽은 자의 하나님이 되신 적이 없다. 죽음 저편의 어느 비옥한 땅에서 금칠을 한 보좌에 앉으셔서 죽은 자들을 심판하고 다스리는 '염라대왕'의 이미지는 전혀 없다는 뜻이다. 천국은 죽음 저편, 혹은 우주 저편에 있는 어떤 것이 아니라, 지금도 이뤄지고 있고 진행중인 '사건'이다. 과학적 증거에 따르면 우주의 창조는 여전히 진행중이다. 우주는 빅뱅이후 끊임없이 확장중이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천국의 도래와 세상의 종말 역시 여전히 진행중이다. 예수에 따르면 그것은 어느날 벼락같이 임하는 하나의 '사건'이 아니라, 시간과 공간의 진행속에서만 파악될 수 있는 '진행'이며 '흐름'인 것이다.

예수에 따르면 인간으로서 죽음을 맞이하는 것은 삶의 일단락이 아니라 오히려 새로운 삶의 시작이며 그것은 마치 애벌레가 탈피를 통해 날개를 얻는 나비로 '변태'하는 것과 다름이 없다는 뜻이다. 애벌레가 나비가 된 것을 '죽음'으로 보아야 하는가? 애벌레가 나비가 된 것을 '부활'로 보아야 하는가? 오히려 '살아있음'은 끈질기게 이어지고 있다(물론 나비도 언젠가 죽는다 따위의 논쟁은 논외이다).
사람은 누구나 모태에서 10개월의 시간을 보낸다. 그러나 태어난 이후에 그 10개월을 인생의 전부로 기억하는 사람은 없다. 마찬가지로 우리의 100년의 삶도 이런 것은 아닐까? 모태에서의 10개월과 다름없이 '죽음'이라는 상태의 변화 뒤에 찾아오는 삶이 어쩌면 진정한 삶이 아닐까?

예수는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우리의 '시간'과 하나님의 '시간'의 그 엄청난 차이를 살짝 엿보게 한다.
우리의 시간 속에선 모세도 다윗도 모두 '죽은 사람'들이다. 그것도 까마득한 옛날에 죽은 사람이다. 그러나 만약 사람의 수명이 100년이 아니라 1,000년을 산다고 한다면 그것을 '까마득한 옛날'이라고 말하기 어려워진다. 기껏해야 할아버지때 이야기 정도일 것이다. 고려시대에 태어난 사람이 한국전쟁을 경험하는 것과 비슷한 것이다. 이것을 좀 더 확장해서 시공간 자체를 한번에 바라볼 수 있는 위치에 있다면 어떨까? 관중석 꼭대기에서 100m 달리기를 보는 것과 비슷하다. 단 선수들은 자신들의 1m 앞만 바라볼 수 있다고 해보자.
만약 트랙의 80m 지점에서 엄청난 재앙이 벌어졌다면 달리기를 하는 선수들 입장에선 그것인 80m 미래의 일이지만, 관중석 꼭대기에 있는 사람에겐 '현실'이 된다.

통시적 관점
이것을 '통시적 관점'이라고 한다. 인문학에서는 뭐 그닥 새로울 것도 없는 용어이지만 이것이 오늘 예수의 대답을 엿보는 열쇠가 된다. 우리는 100년에 남짓한 삶을 살고 있지만, 하나님은 통시적인 시선을 통해 수십 억년의 삶을 동시에 바라보고 있다. 수십 억년 전의 삶도 '현재'이고, 우리가 경험하지 못한 수십 억년 이후의 삶도 '현재'이다. 하나님에게는 과거도 미래도 '현재'인 것이다. 이전에도 계셨고, 지금도 계시며 앞으로도 계시는 하나님이란 바로 이런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시각에는 아브라함도 이삭도 야곱도 '살아있는 것'이다.
현세적인 시선에 매몰되어 있던 사두개인에게 이런 예수의 선언은 '충격'에 다름이 없다. 스케일이 다른 것이다. 당장의 몇년을 행복하고 즐겁게 사는 것을 목적으로 두고 있던 사람에게는 가늠조차 되기 힘든 일일 것이다.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의 모습 혹에서 '사두개인'의 모습을 발견하기란 어렵지 않다. 그래서 이 말씀이 오늘 우리에게도 '약'이 된다.
애초에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거리는 극복될 수 있는 차이가 아니다. 이것을 심정적으로 받아들이기가 어려운 것이 '무신론'이다. 인간의 노력으로 그 차이를 극복하고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이 '단신론'이다. 우리가 기억할 것은 '하니님의 존재'는 우리의 의사와 무관하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없다, 를 꽤 멋지게 증명한 다음날도 동쪽 하늘에서는 해가 뜬다. 물론 우리가 불의의 죽음을 당해 차가운 땅속에 묻힌 다음날도 어김없이 해가 뜬다. 이것이 우리를 겸손하게 한다.


F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