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MEMBRANCE

민수기 15장 : 네 귀퉁이의 옷술

mimnesko 2011. 4. 1. 12:12
37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38 이스라엘 자손에게 명령하에 대대로 그들의 옷단 귀에 술을 만들고 청색 끈을 그 귀의 술에 더하라
39 이 술은 너희가 보고 여호와의 모든 계명을 기억하여 준행하고 너희를 방종하게 하는 자신의 마음과 눈의 욕심을 따라 음행하지 않게 하기 위함이라
40 그리하여 너희가 내 모든 계명을 기억하고 행하면 너의의 하나님 앞에 거룩하리라
41 나는 여호와 너희 하나님이라 나는 너희의 하나님이 되려고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해 내었느니라 나는 여호와 너희의 하나님이라

- 민수기 15장 37~41, 개정개역성경

 

본문의 설명대로 옷술(치치트, tzitzit)은 '여호와의 모든 계명을 기억'하기 위한 방법이었다.
하나님께선 이스라엘 민족의 옷단 귀에 청색 끈을 더한 옷술을 달아, 스스로가 하나님의 백성임을 상기하며 당신의 도우심을 기억하고 그 앞에서 '거룩'할 것을 요청한 것이다.

상식적으론, 도움을 받은 사람들이 해야할 일들이다. 우리가 당신의 도움을 기억하기 위해 옷의 귀퉁이마다 작은 술을 달아 날마다 기억할 것입니다, 라는 것이 일반적인 '감사'의 반응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결국 하나님 스스로가 방법을 강구해야 할 정도로 이스라엘 백성은 정체감을 상실하고 있는 듯 보인다. 직전에 등장한 안식일에 나무하던 사람의 죽음도 그런 의심을 방증하고, 이어지는 고라 자손의 반란 역시 출애굽 2세대의 정체감의 갈등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믿음은 의심으로, 확신은 회의로 바뀌어 가고 있다. 놀라운 출애굽의 사건은 부모님이 '입만 열면 하는 고리타분한 이야기'가 되어 있었던 건 아닐까?

옷술까지 달아 감사를 각인하던 히브리인의 습관은, 그러나 이후 또 다른 형태의 변질을 가져 왔다. 가까스로 성전이 회복되던 신약의 초기,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자신의 '의'를 드러내는데 이 '옷술'을 차용한다. 즉, 스스로의 의로움을 드러내기 위해 더 크고 화려한 옷술을 옷에 달게 된 것이다.

 

마태복음 23:5
그들의 모든 행위를 사람에게 보이고자 하나니 곧 그 경문 띠를 넓게 하며 옷술을 길게 하고


예수는 이런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의 '외식'을 신랄하게 비판했다.
원래 의미의 경문과 옷술은 온데 간데 없고, 스스로의 의로움을 드러내는 허위만 남아 있는 껍데기 신앙을 강도높게 비판하신 것이다.

 

 

민수기 본문을 읽다가 마치 현재의 한국교회 모습을 보는 듯 했다. 마침 요란하게 분당의 모 교회의 목회자 전별금이 각 언론에 대서특필된 아침의 일이다. 목회자로서 명예로운 퇴진도 아니었음에도 전별금을 '합의'해야 하는 교회가 이땅에 버젓한 모습이 예수 시대의 예루살렘과 다를 바 없어 보였다.

더욱 아쉬운 것은, 그래도 예수시대의 서기관과 바리새인은 그들의 원리주의적인 고지식함을 모든 사람들에게 보이고자 했다면, 지금의 한국교회는 결코 교회에선 있어서 안 될 가장 질 낮은 세속의 모습을 오히려 교회의 포장으로 보여주고 있다는 점이며, 이것이 더욱 우리를 슬프게 한다. '빛과 소금의 삶'이라고 쓰고 '성공한 삶'이라고 읽는 한국교회의 단면. 우리 모두 이 일에는 무관하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