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IDBARR

사람은 고생을 위하여 났으니

mimnesko 2023. 11. 8. 09:11
욥기 5:1-27

1 너는 부르짖어 보라 네게 응답할 자가 있겠느냐 거룩한 자 중에 네가 누구에게로 향하겠느냐
2 분노가 미련한 자를 죽이고 시기가 어리석은 자를 멸하느니라
3 내가 미련한 자가 뿌리 내리는 것을 보고 그의 집을 당장에 저주하였노라
4 그의 자식들은 구원에서 멀고 성문에서 억눌리나 구하는 자가 없으며
5 그가 추수한 것은 주린 자가 먹되 덫에 걸린 것도 빼앗으며 올무가 그의 재산을 향하여 입을 벌리느니라
6 재난은 티끌에서 일어나는 것이 아니며 고생은 흙에서 나는 것이 아니니라
7 사람은 고생을 위하여 났으니 불꽃이 위로 날아 가는 것 같으니라
8 나라면 하나님을 찾겠고 내 일을 하나님께 의탁하리라
9 하나님은 헤아릴 수 없이 큰 일을 행하시며 기이한 일을 셀 수 없이 행하시나니
10 비를 땅에 내리시고 물을 밭에 보내시며
11 낮은 자를 높이 드시고 애곡하는 자를 일으키사 구원에 이르게 하시느니라
12 하나님은 교활한 자의 계교를 꺾으사 그들의 손이 성공하지 못하게 하시며
13 지혜로운 자가 자기의 계략에 빠지게 하시며 간교한 자의 계략을 무너뜨리시므로
14 그들은 낮에도 어두움을 만나고 대낮에도 더듬기를 밤과 같이 하느니라
15 하나님은 가난한 자를 강한 자의 칼과 그 입에서, 또한 그들의 손에서 구출하여 주시나니
16 그러므로 가난한 자가 희망이 있고 악행이 스스로 입을 다무느니라
17 볼지어다 하나님께 징계 받는 자에게는 복이 있나니 그런즉 너는 전능자의 징계를 업신여기지 말지니라
18 하나님은 아프게 하시다가 싸매시며 상하게 하시다가 그의 손으로 고치시나니
19 여섯 가지 환난에서 너를 구원하시며 일곱 가지 환난이라도 그 재앙이 네게 미치지 않게 하시며
20 기근 때에 죽음에서, 전쟁 때에 칼의 위협에서 너를 구원하실 터인즉
21 네가 혀의 채찍을 피하여 숨을 수가 있고 멸망이 올 때에도 두려워하지 아니할 것이라
22 너는 멸망과 기근을 비웃으며 들짐승을 두려워하지 말라
23 들에 있는 돌이 너와 언약을 맺겠고 들짐승이 너와 화목하게 살 것이니라
24 네가 네 장막의 평안함을 알고 네 우리를 살펴도 잃은 것이 없을 것이며
25 네 자손이 많아지며 네 후손이 땅의 풀과 같이 될 줄을 네가 알 것이라
26 네가 장수하다가 무덤에 이르리니 마치 곡식단을 제 때에 들어올림 같으니라
27 볼지어다 우리가 연구한 바가 이와 같으니 너는 들어 보라 그러면 네가 알리라

 

 

C.S. 루이스는 우리가 겪는 고통의 문제에 대해 '고통은 하나님의 메가폰이다'라고 이야기했습니다.

어린 아이들이라면 교육과 훈육이 가능하겠지만, 이미 머리가 굵은 성인들이 자신이 가던 길에서 돌이켜 '회심'에 이르기 위해선 일정 분량의 '고통'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이런 '고통'은 하나님의 외침이자 호소이기 때문에 '확성기'라는 표현을 사용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하지만 정말 고통 속에 있는 사람들에게 이런 아포리즘은 별반 위로가 되질 않습니다.

최근에 허리 통증으로 몇 주 동안 병원 치료를 받고 있습니다. 처음에는 쿠션있는 의자에 앉는 것도, 양치를 하는 것도 어려웠습니다. 허리를 숙여 머리를 감는 것은 상상조차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조금이라도 몸을 숙이면 허리 끝에서 눈이 번쩍할 정도의 고통이 밀려왔습니다. 그 고통이 서서히 사라질 동안 무언가라도 부여잡고 진땀을 흘리는 일이 반복되었습니다. 

 

"고통은 하나님의 메가폰이다"

매우 설득력있는 문장이지만 실존적으로 동의하긴 어렵습니다. 그것은 고통을 관망하는 사람의 언어입니다. 스스로 고통을 겪었다 자부하는 사람, 혹은 그런 희미한 기억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종종 하는 말입니다. 한동안 '라떼는 말야~'라는 말이 소위 '꼰대'의 상징이 되어 유행했던 것은, 타인의 어려움이나 처지에 공감할 줄 모르고 자신의 경험담이나 늘어놓는 사람들이 이 사회에 적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상처를 보면 우선 보듬고 치료하는 일이 먼저입니다. 얼마나 아팠을까, 하며 상처입은 사람의 마음 속 상처에 먼저 공감해야하지 않을까요? 하지만 우리는 "왜 넘어졌어.", "그러게 내가 조심하라고 했잖아"라는 핀잔이 늘 공감을 앞섭니다.

 

그러게 왜 거길 갔어. 사람 많은 거 뻔히 알면서 간 거 아냐? 연예인이나 보러 다니다 죽은 거 아니냐고.

이런 핀잔은 아픈 상처를 다시 한 번 헤집고 도려냅니다. 잘못 놓여진 돌뿌리보다 우연히 거기에 걸려 넘어진 사람의 무능함을 저주하는 단어들입니다. 이들은 고통의 방관자이며 구경꾼일 뿐입니다. 그 고통이 자신과 무관하리라는 근거없고 낙관적인 기대 속에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오늘 말씀 속에는 마치 C.S. 루이스의 그것과 매우 흡사한 표현이 등장합니다. 

 

 

볼지어다 하나님께 징계 받는 자에게는 복이 있나니 그런즉 너는 전능자의 징계를 업신여기지 말지니라
(17절)

 

 

 

놀랍게도 이 말은 '욥'의 말이 아닙니다. 그의 가까운 친구였던 '엘리바스'의 이야깁니다. 그는 심지어 이 모든 권면이 자신을 비롯한 여러 사람들의 경험과 연구 끝에 나온 말이니 귀 기울여 들어야 한다(27절)고 경고하기도 합니다. 엘리바스는 고통을 통해 교육적인 목적으로 우리를 훈육하시는 하나님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그분은 아프게 하시다가 싸매시며 상처를 내시다가 그 손으로 치유하신다(18절 : 참고. 신 32:39; 삼상 2:6), '일곱'은 완전을 의미하는 수다. 훈련의 과정으로 말할 수 없이 많은 어려움을 겪을 수 있다. 그러나 어떤 어려움도 하나님의 회복 능력을 능가하지 못한다(19절). 하나님은 자연적 재난(기근)이나 인간적 공격(전쟁)으로부터도 구원하실 것이다(20절). 만약 욥이 이런 하나님의 보호와 구원을 신뢰하기만 한다면 파멸이 올 때도 두려워하지 않게 되고 그런 것들에 대해 오히려 웃을 수 있을 것이다(21~22절)."

- "욥기 어떻게 설교할 것인가", 목회와 신학 편집부, (서울: 두란노아카데미), 129쪽.

 

 

과연 엘리바스의 이런 충고가 욥의 마음에 닿았을까요? 아마 그렇지 않았을 것입니다. 고통의 한 복판에 놓여 있는 사람에게 이러한 충고는 또 하나의 회초리에 다름없습니다. 엘리바스에게 정말 필요했던 것은 고통의 '이유'를 밝히려는 노력이 아니라 오히려 고통의 '현장'을 바라보는 긍휼의 마음입니다. 

 

이태원에서 안타까운 사고가 일어난 지 벌써 1년이 지났습니다. 

유가족들의 시간은 1년 전 그 날에 멈춰있습니다. 아침에 문을 열고 나간 자녀가 저녁에 돌아오지 못하면, 부모는 그 문을 하염없이 바라볼 수밖에 없습니다. 이미 세상을 떠난 사람들의 고통도 적지 않았겠지만, 남겨진 사람들의 고통은 끈질기게 이어집니다. 문이 열릴 때마다, 누군가 그 이름을 부를 때마다 상처는 소금을 뿌린 듯 아파옵니다. 굳이 누군가가 고통의 이유를 들먹이지 않아도 이미 충분히 고통을 겪고 있습니다. 누구도 예상치 못한 순간에 화살처럼 날아와 꽂힌 그 고통의 부피가 시간이 지날수록 깊어집니다. 

 

혹시 우리는 그 고통의 방관자로, 구경꾼으로 서 있는 것은 아닐까요? 그 아픈 상처에 소금을 뿌리며 '엘리바스'와 같이 도도하게 그들을 바라보고 있는 건 아닐까요? 설령 고통이 나를 향한 하나님의 '확성기'일 수는 있겠지만 동시에 하나님은 그 고통받는 자들과 늘 함께있습니다. 고통은 하나님으로부터 그리고 하나님과 함께 우리에게 오기 때문입니다. 고통의 반대편에 서는 순간, 우리는 필연적으로 하나님을 놓치게 됩니다. 타인의 고통 앞에서 차가운 눈빛으로, 또는 냉정한 심판자로 서는 것은 하나님과 가장 반대편에 서는 일일 뿐입니다. 우리는 엘리바스를 통해 그것을 알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