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IDBARR

이것이 나를 앎이 아니냐

mimnesko 2023. 8. 18. 10:36
예레미야 22:10-19

10 너희는 죽은 자를 위하여 울지 말며 그를 위하여 애통하지 말고 잡혀 간 자를 위하여 슬피 울라 그는 다시 돌아와 그 고국을 보지 못할 것임이라
11 여호와께서 유다 왕 요시야의 아들 곧 그의 아버지 요시야를 이어 왕이 되었다가 이 곳에서 나간 살룸에 대하여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 그가 이 곳으로 다시 돌아오지 못하고
12 잡혀 간 곳에서 그가 거기서 죽으리니 이 땅을 다시 보지 못하리라
13 불의로 그 집을 세우며 부정하게 그 다락방을 지으며 자기의 이웃을 고용하고 그의 품삯을 주지 아니하는 자에게 화 있을진저
14 그가 이르기를 내가 나를 위하여 큰 집과 넓은 다락방을 지으리라 하고 자기를 위하여 창문을 만들고 그것에 백향목으로 입히고 붉은 빛으로 칠하도다
15 네가 백향목을 많이 사용하여 왕이 될 수 있겠느냐 네 아버지가 먹거나 마시지 아니하였으며 정의와 공의를 행하지 아니하였느냐 그 때에 그가 형통하였었느니라
16 그는 가난한 자와 궁핍한 자를 변호하고 형통하였나니 이것이 나를 앎이 아니냐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17 그러나 네 두 눈과 마음은 탐욕과 무죄한 피를 흘림과 압박과 포악을 행하려 할 뿐이니라
18 그러므로 여호와께서 유다의 왕 요시야의 아들 여호야김에게 대하여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 무리가 그를 위하여 슬프다 내 형제여, 슬프다 내 자매여 하며 통곡하지 아니할 것이며 그를 위하여 슬프다 주여 슬프다 그 영광이여 하며 통곡하지도 아니할 것이라
19 그가 끌려 예루살렘 문 밖에 던져지고 나귀 같이 매장함을 당하리라

 

그의 할아버지, 아버지와는 전혀 다른 삶을 살았던 요시야는, 불과 8세의 어린 나이에 왕위에 올랐음에도 이미 '준비'가 된 왕이었습니다.

열왕기의 저자는 이 놀라운 종교개혁자를 소개하면서 "요시야가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히 행하여 그의 조상 다윗의 모든 길로 행하고 좌우로 치우치지 아니하였더라."(왕하 22:2)라고 설명합니다. 

 

요시야의 시대를 관통했던 선지자 예레미야는, 그러나 아들 여호아하스(또는 살룸, 왕하 23장)가 벌이는 악행을 보면서 아연실색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요시야의 개혁은 불과 1년이 지나기도 전에 빠르게 잊혀졌습니다. 마치 시계가 30년 전으로 돌아간 것만 같았을 것입니다. 여호아하스는 과거 므낫세의 악행을 고스란히 따르고 있었습니다. 굳이 예레미야가 여호아하스를 '살룸'이라고 지칭하는 것 역시, '평화'와 '안전'을 뜻하는 그의 이름과 너무나도 달랐던 끔직한 통치행위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예레미야는 다윗의 길을 떠난 불행한 왕을 향해 경고합니다. 그가 '잡혀갈 것'이고 그곳에서 '죽을 것'이라고 예언합니다. 왕이 잡혀간다는 것은 결국 나라가 패망한다는 의미입니다. 심지어 여호아하스를 대신하여 왕위에 오를 여호야김에 대해서도 절망에 가까운 예언을 합니다. 예레미야는 자신의 사랑하는 나라가 완전히 무너지는 모습을 보았던 것입니다.

 

아직 희망이 있을지 모른다!

절박한 마음에 예레미야는 눈물의 선지자가 되어 부르짖습니다. 어쩌면 히스기야 때처럼, 하나님은 자신의 계획을 연기하거나 철회할 수 있을지 모릅니다. 만약, 여호아하스가 그 아버지처럼 하나님의 길로 온전하게 돌아선다면 말입니다. 그러나 상황은 절망적입니다. 여호아하스는 선왕 요시야의 갑작스런 죽음 뒤에 오히려 물을 만난 물고기가 되었습니다. 그는 백향목으로 자신을 치장하기에 바빴습니다. 온갖 호화로운 음식에 빠지면 자신의 권력에 도취되었습니다. 그는 '왕 노릇'에 심취한 것입니다. 

 

네가 백향목을 많이 사용하여 왕이 될 수 있겠느냐 네 아버지가 먹거나 마시지 아니하였으며 정의와 공의를 행하지 아니하였느냐 그 때에 그가 형통하였었느니라 (15절)

 

 

요시야는 '하나님을 아는 왕'이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아들 살룸, 여호아하스는 '하나님을 아는 것'에는 도무지 관심이 없었습니다. 그는 권력의 달콤함에 흠뻑 젖어 있었습니다. 자신이 세우지 않은 토대 위에 흥청망청 왕노릇을 하는 철부지일 뿐이었습니다. 백향목으로 치장하고 '왕'처럼 보이기에 열중할 뿐이었습니다. 마체 세상을 거머쥔 듯 여호아하스는 거침이 없었습니다. 모든 역사가 반복하는 것처럼, 권력에 심취한 어리석은 지도자만큼 위험한 것은 또 없습니다. 그는 자신만 파괴하는 것이 아니라 그가 가진 권력으로 공동체 전체를 파괴하기 떄문입니다. 겉으로는 지도자인 척, 겉으론 왕인 척, 또 겉으론 하나님을 아는 척, 했으나 실상은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기름진 제사와 그럴 듯한 수사가 '예배'가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가난한 자와 궁핍한 자를 변호하고 형통하였나니 이것이 나를 앎이 아니냐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선지자의 선포처럼 하나님을 아는 것, 그것은 '가난한 자와 궁핍한 자를 변호'하는 일입니다. 요시야가 형통하였던 이유가 바로 이것이었습니다. 물론 단호한 종교개혁을 통해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의 계약을 새롭게 한 것도 요시야의 뛰어난 업적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유다를 향한 심판의 칼날을 거두지 않으셨습니다. 요시야 한 사람의 돌이킴으로 바꿀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요시야를 형통하게 이끄셨던 것은, 요시야가 하나님을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가난한 자를 모욕하고 부자들에게 아첨하는 부끄러움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모든 불편한 책임은 전임자에게 돌리고 백향목으로 치장하며 '왕 놀음'에 심취한 지도자에게 준비된 미래가 어떤 것인지를 단호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가난한 다수의 죽음에 매정하고, 이미 충분히 부요한 사람들을 위해 권력을 남용하는 자의 최후가 어떤 것인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안타까운 것은 그 '어리석은 지도자'로 인해 다수의 민중들이 겪게 되는 참담한 고통입니다.

이 시대 교회의 역할은 어쩌면 이런 것이 아니띾요? 우리 시대에도 눈물로 호소하며 의인의 고난을 마다하지 않는 예레미야가 필요한 것은 아닐까요? 어리석은 자의 하수인이 되고 또 한 명의 괴벨스를 자처하는 거짓 선지자를 벗어나는 것, 그리고 이 시대의 가난한 자와 궁핍한 자를 돌아보는 것이 교회의 진정한 사명이 아닐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