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IDBARR

엎드려서 눈을 뜬 자가 말하기를...

mimnesko 2023. 5. 8. 09:29
민수기 24:10-25

10 발락이 발람에게 노하여 손뼉을 치며 말하되 내가 그대를 부른 것은 내 원수를 저주하라는 것이어늘 그대가 이같이 세 번 그들을 축복하였도다
11 그러므로 그대는 이제 그대의 곳으로 달아나라 내가 그대를 높여 심히 존귀하게 하기로 뜻하였더니 여호와께서 그대를 막아 존귀하지 못하게 하셨도다
12 발람이 발락에게 이르되 당신이 내게 보낸 사신들에게 내가 말하여 이르지 아니하였나이까
13 가령 발락이 그 집에 가득한 은금을 내게 줄지라도 나는 여호와의 말씀을 어기고 선악간에 내 마음대로 행하지 못하고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대로 말하리라 하지 아니하였나이까
14 이제 나는 내 백성에게로 돌아가거니와 들으소서 내가 이 백성이 후일에 당신의 백성에게 어떻게 할지를 당신에게 말하리이다 하고
15 예언하여 이르기를 브올의 아들 발람이 말하며 눈을 감았던 자가 말하며
16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자가 말하며 지극히 높으신 자의 지식을 아는 자, 전능자의 환상을 보는 자, 엎드려서 눈을 뜬 자가 말하기를
17 내가 그를 보아도 이 때의 일이 아니며 내가 그를 바라보아도 가까운 일이 아니로다 한 별이 야곱에게서 나오며 한 규가 이스라엘에게서 일어나서 모압을 이쪽에서 저쪽까지 쳐서 무찌르고 또 셋의 자식들을 다 멸하리로다
18 그의 원수 에돔은 그들의 유산이 되며 그의 원수 세일도 그들의 유산이 되고 그와 동시에 이스라엘은 용감히 행동하리로다
19 주권자가 야곱에게서 나서 남은 자들을 그 성읍에서 멸절하리로다 하고
20 또 아말렉을 바라보며 예언하여 이르기를 아말렉은 민족들의 으뜸이나 그의 종말은 멸망에 이르리로다 하고
21 또 겐 족속을 바라보며 예언하여 이르기를 네 거처가 견고하고 네 보금자리는 바위에 있도다
22 그러나 가인이 쇠약하리니 나중에는 앗수르의 포로가 되리로다 하고
23 또 예언하여 이르기를 슬프다 하나님이 이 일을 행하시리니 그 때에 살 자가 누구이랴
24 깃딤 해변에서 배들이 와서 앗수르를 학대하며 에벨을 괴롭힐 것이나 그도 멸망하리로다 하고
25 발람이 일어나 자기 곳으로 돌아가고 발락도 자기 길로 갔더라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것, 또 환상을 본다는 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이것을 '하나님의 응답'이라고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신앙이 있는가 하면, 이 자체를 심약한 사람들의 '자기 최면'으로 보는 신앙도 있습니다. 흥미로운 점은 마치 두 양극처럼 보이는 이 견해들조차 하나의 신앙, 즉 하나님을 믿는 것에 포함되어 있다는 점입니다. 과거 기도원에선 밤새 기도를 하고 나무를 통채로 뽑아 들고 내려왔다는 이야기가 전설처럼 전해지곤 했습니다. 그래서 밤이면 기도원 뒷산(보통 '겟세마네'라는 이름이 붙어 있는)에 올라가 굵은 나무 하나를 붙들고 '주여!'를 외치기도 합니다.

 

기독교 신앙이 전혀 없는 분들의 눈에는 이것이 '광신적인 행동'으로 보이기 쉽습니다. 실제로 1990년대 초반, 한 방송사에선 대표적인 도심 기도원이었던 북한산 삼각산 기도원을 찾는 사람들을 향해 '광신도'라고 부른 적이 있었습니다. 실제로 이 기사 이후 기도원을 찾는 기독교인뿐 아니라 대부분의 기독교인들을 '광신도'라고 부르는 일이 빈번해졌고, 기독교 신앙을 어떤 '미신적인 것'과 동일시하는 사회 저변의 의식지 자리잡기도 했습니다.  (참고 :  https://imnews.imbc.com/replay/1992/nwdesk/article/1918797_30556.html )

 

[기획취재]북한산, 광신도 극성, 자연 훼손 심각[임정한]

 

imnews.imbc.com

 

그렇다면, 하나님의 음성을 듣기 위해 금식 기도를 하고, 환상을 보기 위해 철야 기도를 하는 일들은 모두 광신적인 행동일까요?

개인의 생각이 어떠하든, 어느 교회나 한두 분 정도는 이런 신비한 체험을 하신 분들이 있기 마련이고, 그 분들이 교회 내에서 어떤 '영적 권위'를 행사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특히 목회자나 목회자의 사모가 이런 신비한 영적체험을 주도하는 경우엔 그 권위가 교회 공동체의 의사결정에 큰 영향을 주기도 합니다. 분명한 것은, 2023년 현재 한국에서 내로라 하는 대형 교회 중 신비한 영적 체험의 경험을 기반하여 세워진 교회들이 적지 않다는 것과 매일 저녁마다 철야 기도와 은사집회를 열고, 또 그것을 교회의 자랑으로 여기는 교회들이 많다는 점입니다.

다시 말해 여전히 많은 기독교인들이 소위 '광신적'이라는 기독교인들을 지지하고 그들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있다는 점입니다. 

 

그러나 '미신적인 행위'와 '기독교 신앙'은 보다 엄격하게 구분이 되어야 합니다. 신약성경에서 '은사'를 말하는 본문을 살펴보면 거의 예외 없이 바로 앞에는 '교회'에 대한 내용이, 그리고 뒤에는 '사랑'에 대한 내용이 따라옵니다. 고린도전서 12장이 대표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신약성경 필자의 의도를 충분히 헤아려본다면, 은사는 교회라는 테두리 안에서, 그리고 '사랑'을 이루기 위해서만 의미가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방언을 하고 예언을 하고, 심지어 죽은 사람을 다시 살리는 은사가 있다고 하더라도 '사랑'이 없다면 아무런 소용이 없다는 것은 그 어떤 신비적인 행위도 '사랑'보다 우선하거나 '교회'보다 우선할 수 없다는 의미가 됩니다. 그러므로 어떤 은사를 가지고 있다 하더라도, 그 쓰임이 교회를 배반하고 공동체와 개인의 관계를 파괴한다면 그것은 '기독교 신앙'이라고 보기 어렵습니다. 설령 그 빗나간 신비주의가 거대한 회중을 모으고 있다 하더라도 말입니다. 

 


 

본문은 발람의 네 번째 예언이자 마지막 예언을 이야기합니다.  이때 예언자(navi)를 칭하는 표현이 흥미롭습니다. 오늘 본문 16절은 발람을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자가 말하며 지극히 높으신 자의 지식을 아는 자, 전능자의 환상을 보는 자, 엎드려서 눈을 뜬 자가 말하기를

 

 

이 모든 표현이 '예언자'를 지칭하고 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자'이며, '지극히 높으신 자의 지식을 아는 자'입니다. 또한 '전능자의 환상을 보는 자'이며 '엎드려서 눈을 뜬 자'입니다. 그 각각의 의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예언자란 말 그대로 전능하신 하나님께 완전히 압도되어 있는 사람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의 그 거룩함에 눌리어 엎드러진 자가, 간신히 눈을 떠서 하나님의 놀라운 환상을 발견하는 사람을 '예언자'로 지칭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의 예언은 상식에도 맞지않고 그 누구의 이해 관계도 따르지 않습니다. 심지어 예언을 요청했던 발락의 바람과도 전혀 다른 예언들을 쏟아놓습니다. 이방 족속들에 대한 예언은 그 성취 여부를 확인하기도 어렵습니다. 그 곳에 겐 족속이 있었는지 또 아말렉 족속들이 있었는지의 여부도 알 길리 없으나 예언은 정확히 그 종족들을 향하고 있습니다. 발락의 어이없음도 이해가 되는 대목이지요. 

 

예언(προφητεία)은 그 시대를 관통하는 말입니다. 단순히 미래의 어떤 일을 가리치는 말이 아니라, 이 시대를 관통하는 하나님의 뜻을 의미하며 하나님의 뜻이 바로 우리 앞에 놓여져 있다라는 긴박성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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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언(豫言)에 대하여

간혹 한자어의 예언(豫言)을 '미리 예(豫)'가 아닌 '맡길 예(預)'로 해석하여 '예언자'를 하나님의 말씀을 맡은 자라고 설교하는 목회자들도 있습니다만 이것은 일본 한자해석의 영향일 뿐, 헬라어 본문이 갖고 있는 의미는 말 그대로 앞에(pros) 있는 사건의 의미와는 다릅니다. 

 

그러므로 예언자란 자신의 말을 하는 사람이 아닌, 하나님의 영에 압도되어 도무지 예측할 길이 없는, 그러나 시대를 관통화여 의미를 갖는 단어들을 내뱉을 수밖에 없는 사람입니다. 이것이 '엎드려서 눈을 뜬 자'의 의미입니다. 발람은 비록 하나님께 속한 예언자는 아니었으나, 그 인생의 어느 한 순간을 하나님에 영에 붙잡히고 또 압도되어 그 도구로 사용된 사람이었습니다. 필요하다면 돌을 들어 말하게 하시는 하나님께서 발람의 입을 여시지 못할 이유가 없습니다. 발람 역시 나귀의 입을 여섰던 하나님의 그 압도적인 능력에 짓눌리어 내키지 않았던 길을 나설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 시대의 목회자가가 '예언자'인지는 분명하지는 않습니다. 이것은 그들의 '목회적 소명'이나 '사도적 계승'의 불온함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온전히 '하나님의 영'에 압도되어 메시지를 전하고 있는가, 하는 점 때문입니다. 발람의 네 번째 예언을 묵상하며, 이 시대를 향해 전혀 다른 언어와 단어로, 종잡을 수 없으나 통시적인 예언을 전하는 예언자, '엎드려서 눈을 뜬 자'가 되기를 간절히 소망하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