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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대인의 왕 예수

mimnesko 2023. 4. 6. 09:12
마태복음 27:27~44

27 이에 총독의 군병들이 예수를 데리고 관정 안으로 들어가서 온 군대를 그에게로 모으고
28 그의 옷을 벗기고 홍포를 입히며
29 가시관을 엮어 그 머리에 씌우고 갈대를 그 오른손에 들리고 그 앞에서 무릎을 꿇고 희롱하여 이르되 유대인의 왕이여 평안할지어다 하며
30 그에게 침 뱉고 갈대를 빼앗아 그의 머리를 치더라
31 희롱을 다 한 후 홍포를 벗기고 도로 그의 옷을 입혀 십자가에 못 박으려고 끌고 나가니라
32 나가다가 시몬이란 구레네 사람을 만나매 그에게 예수의 십자가를 억지로 지워 가게 하였더라
33 골고다 즉 해골의 곳이라는 곳에 이르러
34 쓸개 탄 포도주를 예수께 주어 마시게 하려 하였더니 예수께서 맛보시고 마시고자 하지 아니하시더라
35 그들이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은 후에 그 옷을 제비 뽑아 나누고
36 거기 앉아 지키더라
37 그 머리 위에 이는 유대인의 왕 예수라 쓴 죄패를 붙였더라
38 이 때에 예수와 함께 강도 둘이 십자가에 못 박히니 하나는 우편에, 하나는 좌편에 있더라
39 지나가는 자들은 자기 머리를 흔들며 예수를 모욕하여
40 이르되 성전을 헐고 사흘에 짓는 자여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자기를 구원하고 십자가에서 내려오라 하며
41 그와 같이 대제사장들도 서기관들과 장로들과 함께 희롱하여 이르되
42 그가 남은 구원하였으되 자기는 구원할 수 없도다 그가 이스라엘의 왕이로다 지금 십자가에서 내려올지어다 그리하면 우리가 믿겠노라
43 그가 하나님을 신뢰하니 하나님이 원하시면 이제 그를 구원하실지라 그의 말이 나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하였도다 하며
44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강도들도 이와 같이 욕하더라

 

리쏄 웨폰(Lethal Weapon) 시리즈로 일약 스타의 반열에 오른 멜 깁슨(Mel Gibson)이 출연과 연출을 겸했던 '브레이브 하트'의 성공에 힘입어 도전했던 영화가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The Passion of Christ)'(2004)였습니다. 최후의 만찬 이후부터 예수님이 십자가의 고난을 겪으신 뒤 죽음에서 부활에 이르는 과정을 촘촘히 담아낸 영화였습니다. 

 

사실 1980년대 이후 헐리우드에선 거의 금기시 된 듯 보였던 '종교 영화'를 전면에 내세운 그의 시도는 무모해보였습니다. 심지어 2천 년 전으로 돌아간 듯한 고증을 위해 로마 군인들은 라틴어를, 예수님을 비롯한 모든 유대인들이 아람어를 사용했기 때문에 미국인들이 극혐하는 '자막'이 달린 영화이기도 했습니다. 선뜻 제작을 하겠다는 사람도 또 배급을 맡겠다는 회사도 없었던 것은 어쩌면 너무나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멜 깁슨은 자신의 사재까지 털어가며 2,500만 달러의 제작비를 조달했습니다. 가장 빠른 속도로 망할 것이라는 예상과 달리 영화는 미국에서만 3억 7000만 달러를 회수했습니다. 전 세계 흥행수익이 6억 달러에 달할 정도의 대흥행을 기록한 영화가 되었고, 한국에서도 250만 명의 관객이 영화를 관람했습니다. 2000년 대, 극세밀화에 다름없는 기독교 영화에 250만 명의 관객이 찾았다는 건 다시 생각해도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리고 매년 사순절과 고난주간이 되면 어김없이 리플레이 되는 영화 중 하나가 바로 이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입니다. 

 

일각에서는 독실한 가톨릭 신자인 멜 깁슨의 반유대주의가 넘쳐 흐른다는 비판도 있습니다. 또 지나치게 폭력적인(그래서 미국에선 이 영화가 R등급을 받았습니다) 묘사로 예수님의 지상사역보다 그 죽음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는 비판도 있었습니다. 개인적으론 이 영화를 복음서의 '브레이브 하트' 버전이라고 생각합니다. 감독이 개인의 사재까지 털어가며 만드는 영화니 주위의 비판이나 조언이 통할리 없었을 것 같고, 이미 흥행영화의 기본 공식을 너무나 잘 알고 있는 멜 깁슨이 자신의 개인적인 신앙에 B급 고어, 헐리우드 흥행요소를 더해 만들어낸 빨간 맛 칵테일에 가깝습니다. 제목조차 정직하게 '예수의 고난'이지요. 

 

문제는 예수님을 죽음에 이르게까지 한 이 '고난'의 이유를 영화가 설명하지 않는 데 있습니다. 이것이 감독의 의도인지는 분명치 않지만, 영화는 철저하게 예수님의 죽음에만 대부분의 러닝타임을 할애하고 있습니다. 이유 모를 고난, 영문 모를 폭력을 우리는 '공포'라고 합니다. 게다가 피가 흥건하고 뼈와 살이 튀는 영화를 '고어 영화'라고도 하지요. 때문에 이 영화는 촘촘한 고증과 서사에도 불구하고 'B급 호러 고어 무비'라고 밖에는 볼 수가 없습니다.

심지어 호러영화에서 피해자가 되는 주인공이 바로 '예수님'입니다. 기독교 신앙을 가진 사람이라면 누구나 감정이입을 할 수밖에 없는 대상이지요. 때문에 영화를 보며 연신 눈가에 눈물을 닦는 대부분의 관객들은 "나 때문에 예수님이 저렇게 고난을 당하셨구나..."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것이 이 영화의 목적이었다면 나름의 성과가 있는 셈입니다.

 

문제는 이제 고난주간, 사순절이 되면 가장 먼저 이 영화의 장면을 떠올리게 되었다는 점입니다. 복음서의 서사가 개인의 묵상과 이어져 발견되는 풍성한 고난주간의 묵상이, 너무나 강렬했던 고난의 예수님으로만 남게되었다는 것입니다. 선혈이 낭자하고 살과 피가 튀는 채찍질만 떠올리게 되었다는 점입니다. 한 편의 영화가 만들어 낸 이미지의 힘이란 이처럼 놀랍고 강력합니다. 그래서 영화가 미처 담아내지 못하는, 그 카메라 앵글에 담겨있지 못한 복음서의 강력한 내러티브들이 주변으로 밀려나고 있는 모습은 가슴 아픈 일입니다. 심지어 기독교 내에서조차 "왜 예수님이 고난을 당하셨는가?" 가 아니라 "어떻게 예수님이 고난을 당하셨는가?"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 것만 같습니다. 이유가 사라진 폭력은 '공포'만을 만들 뿐입니다. 그러나 단언컨데 십자가 위의 예수님의 메시지는 '공포'가 아니었습니다. 우리에게 어떤 '죄책감'을 주고자 한 것도 아니었습니다. 갚을 길 없는 '은혜'가 그 폭력에 대한 빚갚음은 더더욱 아닙니다. 우리는 이 영화를 통해 어쩌면 예수님을 오해하게 될 지도 모릅니다. 

 

***

십자가 위 예수님의 머리 위에는 '유대인의 왕 예수'라는 명패가 붙어 있었습니다. 이 중의적인 표현은 그 의미를 떠올릴 때마다 가슴이 아픕니다. 예수님은 '유대인의 왕'으로 이 땅에 오신 것이 아닙니다. 평화의 왕, 온 세상의 통치자로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분의 선포와 치유, 수많은 기적은 민족과 인종을 가리지 않으셨습니다. 식탁 아래 떨어진 것도 감사히 먹겠다는 이방 여인에게 '네 믿음이 크다'라고 말씀하셨던 분이 바로 예수님이셨습니다. 

 

그러므로 '유대인의 왕'이란 예수님의 삶과 그 사역을 모두 무시하고 거부하는 표현입니다. 단지 유대인을 소동하게 하고 민란을 일으킨 주범이라는 의미의 저열한 비난에 불과합니다. 그렇다면 적어도 '유대인'들은 분노해야 하지 않을까요? 자신들의 왕이라는 사람이 처참하게 십자가 형을 당하고 있다면 억울해하고 슬퍼해야 하는 것이 정상적인 반응이 아닐까요? 유대인들에게 일말의 자존심이라도 남아있었다면 마땅히 소리치고 분노해야 하는 것이 아닐까요? 그러나 유대인들은 그렇게 반응하지 않았습니다. 

 

 

그와 같이 대제사장들도 서기관들과 장로들과 함께 희롱하여 이르되
그가 남은 구원하였으되 자기는 구원할 수 없도다 그가 이스라엘의 왕이로다 지금 십자가에서 내려올지어다 그리하면 우리가 믿겠노라

 

 

예수님의 십자가는 세상의 모든 종류의 '거부'를 합쳐놓은 것만 같은 외로운 자리였습니다. '그가 남은 구원하였으되 자기는 구원할 수 없도다'라는 조소 어린 비아냥은 바로 며칠 전까지만 해도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며 '우릴 구원하소서'라고 외쳤던 같은 이웃의 목소리였습니다. 그 참담함을 어떻게 표현할 수 있을까요? 때문에 우리가 고난주간에 느껴야할 가장 중요한 감정은 '공포'가 아니라 '외로움'입니다. 닿을 길 없는 '소외'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길을 따라간다는 것은 그 외로움과 소외를 기꺼이 나눠갖겠다는 뜻입니다. 만약 십자가가 '공포'뿐이라면 누가 그것을 나눠지겠습니까? 어떻게 그 길을 '내가 주는 멍에는 쉽다'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의 외로움과 우리의 고독과 우리의 소외를 누구보다 잘 아셨던 주님이 여전히 이땅에서도 외로움과 소외, 고독을 겪고있는 사람들에게 복음의 빛을 나눠주라는 사명을 우리에게 맡겨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십자가는 나눔의 자리이며 재생의 자리입니다.

아무쪼록 누군가 만들어 놓은 그 혹독한 고통과 피흘림에만 매몰된 십자가가 아니라,  본래 온 세상의 왕으로 오신 예수님의 생애와 고난, 그리고 죽음과 부활의 의미를 발견하는 고난주간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