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MEMBRANCE

배려

mimnesko 2012. 3. 7. 00:32


주일 오후, 삼삼오오 모여 이야기를 나누다가 최근의 '국물녀' 사건이니 '채선당' 사건이니 하는 이슈가 나왔다.
두 사건 모두 인터넷을 통해 빠른 속도로 재생산되어 사건의 진위여부를 가리기도 전에 나름의 여론재판이 이뤄졌다는
공통점이 있었고, 두 사건 모두 경찰의 수사를 통해 극적 반전이 있었다는 공통점도 있었다.

이야기를 하다보니 한국사회에 '배려가 부족하다'라는 이야기가 나왔다. 한국전쟁을 경험한 세대들은 극심한 빈곤을
경험했기 때문에 그럴 수 있다 하더라도, 1970년대 이후 출생한 세대에서도 이런 각박함이 보인다는 것은
다소 의외라는 반응들이었다. 무엇보다 최근 청소년들 사이에서조차 - 그들의 살림살이는 분명 수십 년 전보다 월등히
나아졌음에도 불구하고 - 학교폭력, 집단따돌림, 자살 등 어떤 지독한 강박 아래에서만 일어날 법한 일들이
생각보다 만연하다는 것에 놀라게 되었다.

'다른 사람을 나보다 낫게 여기는 마음'이 배려이다.
하지만 중, 고등학교 시절조차 또래집단의 즐거움보다 지독한 경쟁의 전쟁터로 만들어놓은 한국의 교육현실이나
굳이 그럴 필요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지나치게 국민들에게 스트레스를 주는 정치적 상황들이 사람들을
어떤 '강박'으로 밀어붙이는게 아닌가 생각이 든다.
다른 사람을 딛고 서야 하는 경쟁위주의 교육은 결국 '다른 사람'을 나의 '방해물' 혹은 최소한 '경쟁자'로
인지하게끔 한다는 것이고, 서로 다른 정치적 입장(이라고 말하기도 우스운)을 '자연스럽게' 생각하기 보다
오히려 설득하고 '교화'시켜야 하는 대상으로 생각하고 '좌파'와 '우파'의 대립 또는 지역의 대립으로 몰아가는
한국 정치인들의 구태가 타인을 '다른 사람'이 아닌 '적'으로 개념화시키는 것이 아닐까.

적어도 이런 '게임의 법칙'에서 자유로울 수 있어야 우리에게 '배려'라는 말이 가능할 거 같다.
타인을 배려할 수 있다는 것은 스스로가 '마땅히 대우를 받을 만한(deserve to)' 인격임을 증명하는 일이다.
가만히 생각해보면, 자신의 인격(또는 사람됨)을 존중할 수 있는 사람이 타인의 인격도 존중할 수 있다.
그리고 타인의 인격을 존중해야, 다른 누군가도 내 인격을 존중하는 일이 가능해 진다.
이것이 선순환이다.

만약 스스로를 존중하지 못하다면, 위의 이야기가 역순으로 펼쳐진다. 생각으로도 충분히 안타까운 일이지만
그게 우리의 현실이기도 하다. 그건 차를 몰고 서울 시내를 20분만 돌아다녀보면 바로 알 수 있다.
결국 '자존감'(self-esteem)의 문제인 것이다. 그리고 이 자존감의 무게가 시민사회의 성숙을 가늠하는
리트머스와도 같다.

직업에 귀천이 없다는 것은 어떤 직업을 선택하든 개인의 '자존감'에 큰 영향을 주지 않는다는 것이다.
여전히 한 사람으로 '존중'받을 수 있으며, 그 사람의 '존재'를 사회가 지지할 수 있다는 것이기도 하다.
그러나 아파트의 평수, 자동차의 배기량으로 사람의 인격을 재단하는 사회에서는 자존감이라는 단어 자체가
지독한 사치가 될 수밖에 없다. 그것은 타인을 '낫게'여기는 사고의 흐름이 아니라, 오히려 타인을 '낮게' 여기는
불온한 사고가 그 바닥에 있기 때문이다.

배려는 꽤 실천적인 영역이다.
지하철에서 자리를 양보하는 일(이걸 그냥 '착한 일'이라고 하지 말아야 한다. 그는 타인의 인격을 존중한
것이고 건강한 자존감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도로 운전 중에 끼어들기나 위험운전을 하지 않는 것,
대중교통이 정상적인 운행을 하는 것이나 다른 사람을 위해 출입문을 잠시 잡아주는 것 등이다.
사소하지만, 외국을 경험한 사람들이 가장 먼저 떠올리는 일이기도 하다.

잡담에 가까운 모임이었지만 나름의 교훈이 있었다. 바로 나부터 시작해야 하는 일이라는 공감도 있었고
타인의 인격을 존중하는 것이 바로 내 인격, 또 내 아이의 인격을 존중받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라는 것도
함께 생각할 수 있었다.
다른 사람을 '낫게' 여기는 일은 과거 빌립보 교회에서나 지금 우리 현실에서나 여전히 요청되고 있는 것이다.

F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