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뮤지컬 '루카스' _ 경계에 선 사람들

mimnesko 2024. 11. 26. 11:11

 

 

토론토 성(聖) 마이클 대학의 장 바니에(Jean Vanier) 교수는 1964년, 정신지체를 겪던 두 사람과 함께 프랑스의 작은 시골 마을에서 '라르쉬 공동체'를 시작했습니다. '라르쉬(L'arche)'란 '방주(The Ark)'라는 뜻의 불어입니다.

창세기 8장에 등장하는 노아의 '방주'는 배라기보다는 직사각형의 긴 네모 상자에 가깝습니다. '방주'로 번역된 히브리어 '테바(tebah)' 역시 '네모난 상자'라는 뜻입니다. 성경에선 지성소의 '언약궤', 그리고 요게벳이 아기 모세를 담았던 '갈대 상자'에 사용된 단어입니다. 세 단어 모두 '생명을 보존하는 네모난 상자'라는 속성을 가지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특히 하나님께서 직접 고안하셨던 방주(The Ark)에는 일반적인 배(Ship)와 달리 진행의 방향이나 속도를 결정할 수 있는 노와 방향 키가 없었습니다. 방주의 목적 자체가 대홍수가 모두 끝나고 뭍이 드러날 때까지 생명을 보존하는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종종 '방주'는 하나님의 전적인 간섭과 개입을 상징하기도 합니다. 바다 위를 표류하는 것도, 또 뭍이 드러나 그 땅위에 비로소 정착하게 되는 것도 모두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따라야하기 때문입니다. 

 

장 바니에 교수가 공동체의 이름을 '라르쉬'라고 한 것은 그래서 한 편으로 의미심장합니다. '우리는 단지 생명을 보존할 뿐 어느 방향도 인위적으로 결정하지 않겠다'라는 바니에 교수의 의지가 보이는 것만 같습니다. 실제로 '라르쉬' 공동체는 일반인과 장애를 가진 사람들과의 차이가 없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장애를 가진 사람들을 '치료'의 대상으로만 보지 않고 나와 동일한 인격체로 함께 살아가는 것에 더 큰 초점을 두고 있습니다. 그래서 장애를 가진 사람들이 혹시 본능적인 실수를 하게 되더라도 그것을 질책하는 일은 거의 없습니다. 말 그대로 너와 나, 그리고 우리라는 공동체의 생활을 몸소 실천하고 있는 것입니다. 

 

뮤지컬 '루카스'의 배경이 되는 곳 역시 캐나다에 세워진 '라르쉬 데이브레이크'(L'arche Daybreak) 공동체입니다. 이곳은 가톨릭 사제이자 영성신학자로 잘 알려진 헨리 나우웬(Henry Nouwen, 1932~1996) 교수가 여생을 보냈던 곳으로 더 잘 알려진 곳이기도 합니다. 우리에겐 '상처입은 치유자'라는 저서로도 알려져 있는 그는 1982년 하버드 신학대학원의 교수로 초빙되었으나, 1985년 장 바니에 교수의 초대로 처음 라르쉬 공동체를 경험한 뒤, 교수직을 내려놓고 1986년부터 캐나다 데이브레이크 공동체에서 여러 장애인들과 함께 어울려 생활하며 여생을 보냈고 그곳에서의 경험을 '데이브레이크로 가는 길(포이에마)'이란 책으로 남기기도 했습니다. 

 

뮤지컬 '루카스(Lucas)'는 이 라르쉬 데이브레이크 공동체에서 실제 있었던 '실화'에 기반하고 있습니다.

당시 이 공동체에서 생활하던, 지적장애를 가진 부부에게 탯줄을 끊으면 15분밖에 살 수 없는 선천적인 기형을 가진 아이(루카스)가 찾아오면서 일어난 이야기들을 아름다운 뮤지컬로 각색했습니다. 태어난 아이 루카스는 의사들의 예상과 달리 무려 17일을 생존했다고 합니다. 7살 지능에 불과했던 루카스의 아빠와 엄마에게 아이의 출생과 죽음은 어떤 의미였을까요? 또 주위 사람들에게 이 특별한 아이는 어떤 의미였을까요? 뮤지컬 루카스는 이 '의미'를 풍성한 상상력과 아름다운 넘버로 풀어내고 있습니다. 

 


 

 

뮤지컬 루카스(Lucas)를 보면서 어떤 '위화감'을 느꼈습니다. 아름다운 넘버, 조화된 연출 사이사이로 불쑥불쑥 그 '위화감'이 찾아오곤 했습니다. 이 위화감의 정체가 뭘까? 공연을 관람한 이후, 뮤지컬의 여러 장면들과 서사를 되짚어 떠올려보니 그 위화감이 '경계에 대한' 것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 뮤지컬 속에는 많은 '경계선'이 의도적으로 배치되어 있습니다. 가장 두드러진 것은 역시 장애인과 비장애인의 경계입니다. 장애인들 사이에서도 발달장애와 지적장애, 그리고 자폐 스펙트럼의 경계선이 보입니다. 장애인과 비장애인이 다른 것처럼이나 장애인들 사이에서도 서로가 이해하는 세계가 여러 엄정한 경계선 위에 놓여 있음을 보게 됩니다. 또 이야기를 이끌어가는 한국인 자원봉사자(데이브레이크에서는 '어시스턴트'라고 부른다고 합니다) 두 사람 사이에도 역시 다양한 경계선이 놓여 있음을 느끼게 됩니다. 

 

그 중 가장 처참했던 것은 지적장애를 가진 부부 사이에서 태어난 아이, 루카스와의 경계입니다. 심지어 이 어린 생명은 탯줄을 끊으면 15분도 생존하기 어렵다는 선천적인 장애를 가지고 있습니다. 장애와 장애 사이에도 이처럼 큰 간극이 존재할 수 있는가? 이 어린 생명이 태어나는 것이 과연 '옳은 일'인가? 출산이 즉 죽음을 의미하는 생명을 우리는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왜 임신을 중지하지 않는가? 아니 애초에 그런 위험(이미 두 번이나 유산을 한 경험이 있는데)을 미연에 방지하지 않는가? 17일만에 목숨을 잃은 아이는 오히려 이들에 의해 방치된 것은 아닌가? 

 

 

 

 

이러한 위화감이 모두 정상과 비정상이라는 자의적인 '경계선' 위에 있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어쩌면 나는 '비장애인'보다 더욱 거친 시선을 가진 '정상인'의 시선으로 경계선 너머의 그들을 바라보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그들 중 누구도 장애를 원해서 장애를 가진 채 태어난 적이 없었음에도, 그러므로 내가 '정상인'이라고 말하는 그 경계선이 그저 우연의 결과임에도 불구하고, 나는 참 냉정하기 이를 데 없는 날카로운 경계선을 가지고 있었구나, 하는 위화감이었습니다.

 

그런데 뮤지컬 '루카스'을 보는 내내 나의 그 날카로운 경계선을 조금씩 희미해짐을 느끼게 됩니다.  그 날카로운 경계선이 처음엔 '현우'의 것이었다가 이내 '유리'의 것이 되기도 합니다. 그리고 이내 장애인들과 함께 생활하던 비장애인 '수잔'의 것이 되기도 합니다. 그리고 몰아치는 빗줄기 속에서 그 경계선이 거품처럼 사라져 버리는 것을 느낍니다. 장애와 장애 사이에 존재하던 경계선조차 부모와 자녀라는 관계 속에서 사라집니다. 그 부모들이 행동을 정당하다고 할 수 있을까? 과연 옳은 선택을 한 것인가? 라는 질문이 부차적으로 느껴지는 이유입니다. 도대체 누가 이들의 부모 됨을 '정당함'이란 기준에서 이야기할 수 있을까요.

 

 

 

 

캐나다 라르쉬 데이브레이크에서는 장애를 가진 사람들을 'Vulnerable'이라고 묘사합니다. 발음조차 쉽지 않은 이 단어는 '연약한, 노출되어 있는, 정서적으로 불안한'이란 뜻을 담고 있는데, 그렇게보면 우리 중 이 단어를 벗어날 수 있는 사람이 그리 많지 않다는 것을 느끼게 됩니다. 우리는 연약하고 때때로 정서적으로 불안합니다. 어린 태아 '루카스'조차 뇌의 일부가 '노출되어' 있어 극도로 연약한 상태에서 태어나게 되었습니다.

 

그 연약함 속에서 우리 내면의 '연약함'을 보게 됩니다. 그 아이와의 이별을 순수하게 애도하는 부모의 눈물 속에서 '노출되어 있던' 나의 상처를 보게 됩니다. 뮤지컬 루카스가 우리의 눈물샘을 자극하는 것은 그 이야기 자체가 가진 힘도 있겠지만, 어느새 스르르 마법처럼 사라지는 내 속의 경계선을 느끼기 때문은 아닐까요? 나 역시 그들 중 하나였다는 것을. 나 역시 종종 연약하고, 아무런 보호장치없이 세상에 노출되어 있으며, 정서적으로 불안함 사람임을 느끼기 때문은 아닐까요?

그래서 누군가의 따뜻한 손길이 나를 위로해 주기를, 내가 그어놓은 냉정한 경계선을 넘어 따뜻한 온기가 전해 오기를, 누군가 내 내밀한 아픔과 연약함을 순수하게 바라봐주기를 바라는 마음이 있기 때문은 아니었을까요.

 

라르쉬 데이브레이크 공동체에서 7명의 발달장애인과 여생을 보냈던 헨리 나우웬은 "나는 내 사랑하는 우리의 이웃을 통해 예수님을 새롭게 경험했다. 나는 참 행복했다. 정말 행복했다."라는 유언을 남겼다고 전해집니다.

그의 소감이 뮤지컬 '루카스'를 본 제 개인의 소감과 크게 다르지 않았습니다. 뮤지컬 '루카스'는 잘 만들어진 뮤지컬이라는 단순한 장르의 즐거움을 넘어, 슬그머니 내 자신과 '내 사랑하는 이웃'을 돌아보게 합니다. 내가 만들어 놓은 경계선 너머에 있던 사람들을 마주하게 합니다. 그들에게도 이 온기가 전해질 수 있기를. 우리가 말하는 행복이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었음을 느끼게 합니다. 

 

 

사족 : 뮤지컬을 보는 내내 손수건을 적시게 했던 이하은 배우의 '줄리'는 쉽게 잊기 어려울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