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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초의 제안

mimnesko 2024. 3. 8. 09:00

 

마가복음 10:1~12

1 예수께서 거기서 떠나 유대 지경과 요단 강 건너편으로 가시니 무리가 다시 모여들거늘 예수께서 다시 전례대로 가르치시더니
2 바리새인들이 예수께 나아와 그를 시험하여 묻되 사람이 아내를 버리는 것이 옳으니이까
3 대답하여 이르시되 모세가 어떻게 너희에게 명하였느냐
4 이르되 모세는 이혼 증서를 써주어 버리기를 허락하였나이다
5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 마음이 완악함으로 말미암아 이 명령을 기록하였거니와
6 창조 때로부터 사람을 남자와 여자로 지으셨으니
7 이러므로 사람이 그 부모를 떠나서
8 그 둘이 한 몸이 될지니라 이러한즉 이제 둘이 아니요 한 몸이니
9 그러므로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나누지 못할지니라 하시더라
10 집에서 제자들이 다시 이 일을 물으니
11 이르시되 누구든지 그 아내를 버리고 다른 데에 장가 드는 자는 본처에게 간음을 행함이요
12 또 아내가 남편을 버리고 다른 데로 시집 가면 간음을 행함이니라

 

헤롯 안티파스(BC 20 - AD 39)는 헤롯 대왕의 아들입니다.

그는 아버지 헤롯과 로마 아우구스투스 황제와의 동맹을 유지하기 위한 명목으로 로마에 인질로 잡혀 있었고 그곳에서 교육을 받았습니다. 기원전 4년, 아버지가 죽자 헤롯 안티파스를 비롯한 여러 형제들은 헤롯대왕이 다스리던 지역을 분할하여 통치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이들을 '분봉왕'이라고 부릅니다.

이스라엘로 돌아 온 헤롯 안티파스가 통치했던 지역은 갈릴리와 베뢰아였습니다. 그는 아버지처럼 갈릴리와 베뢰아 지역에 여러 도시를 새로 건축했는데, 그중 잘 알려진 것이 갈릴리 호수 서편에 지은 '티베리아스'입니다. 로마 황제의 이름을 따서 지은 이 도시는 성경에선 '디베랴'(요 6:1)라고 언급되는데 지금도 리조트 및 관광지로 이름 난 곳입니다. 

 

그런데 헤롯 안티파스가 나름의 '유명세'(?)를 얻게 된 것은, 이러한 자신의 치적 때문이라기보단 오히려 '세례 요한을 참수했던 장본인'이기 때문이었습니다. 왜 로마의 대리자를 자처하던 분봉왕이 일개 광인에 불과했던 세례 요한을 잡아 극형을 내렸던것일까요? 바로 그의 '결혼' 때문이었습니다.

헤롯 안티파스는 그의 이복 동생인 헤롯 빌립 1세의 아내이자 또 다른 이복동생 아리스토부르스 4세의 딸이었던 '헤로디아'를 재혼의 상대로 맞이하게 됩니다. 이를 위해 이웃 나라 나바테아*의 공주 파살리스와 강제 이혼을 하는 무리수를 두게 됩니다. 헤롯 안티파스의 '이혼'과 '재혼'은 과정도 결과도 무엇 하나 제대로 된 것이 없었습니다. 외교의 근간을 무너뜨렸고, 형제들 사이에서도 엄청난 반감을 불러 일으키게 됩니다. 특히 세례요한의 비웃음을 받게 됩니다. 세례 요한은 이 파멸의 결혼에 대해 강도 높게 비판했고, 결국 안티파스는 세례 요한을 잡아들여 참수하게 된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은 바로 이 배경에서 읽어야만 합니다. 

 


 

 

지금 예수님이 계신 곳은 "유대 지경, 요단 강 건너 편"이었습니다. 이곳은 '세례 요한'이 사람들에게 세례를 주며 회개를 촉구하던 지역이었습니다. 그러므로 바리새인이 예수님께 갑자기 결혼과 이혼에 대해 질문했던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었습니다. 

 

 

 바리새인들이 예수께 나아와 
그를 시험하여 묻되 
사람이 아내를 버리는 것이 옳으니이까

 

마가복음 10:2

 

 

마가는 '시험하여 묻되'라고 표현하며 바리새인들의 의도를 숨기지 않습니다. 바리새인들은 만약 예수님께서 헤롯 안티파스의 심기를 건드릴만한 대답을 한다면 굳이 자신들의 손에 피를 묻히지 않아도 될 것이라 생각했을 것입니다. 예수님 역시 바리새인들의 이러한 의도를 모르시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다시 바리새인들에게 물으셨습니다. "모세가 너희에게 무엇이라고 명령했느냐?"

이혼하는 것이 옳으냐, 라는 바리새인의 정치적인 질문은 오히려 율법은 어떻게 말하고 있느냐, 라는 교리적인 질문으로 되돌아왔습니다. 누가 뭐라해도 바리새인들은 율법의 전문가들이었습니다. "모세는 이혼 증서를 써 주고 아내와 헤어지는 것을 허락했습니다."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그가 그러한 명령을 준 이유는 너희 마음이 완악하기 때문이다.

 

마가복음 10:5, 새번역

 

 

예수님은 바리새인들의 날카로운 예봉을 보란듯이 피하며 정치적인 문제를 교리적인 문제로, 그리고 다시 그 문제를 보다 근원적인 영역에서 바라보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마치 바리새인들의 심중을 들여다 보는 것처럼 대답하셨습니다. "모세가 이혼을 허락한 것은 '창조주의 의도'를 충족시킬 수 없었던 우리의 완악함 때문이었다."

우리의 완악함은 하나님의 기대에 미치지 못했습니다. 이스라엘의 무력함은 보다 완전한 인간성의 원형으로 회복되길 원했던 창조주의 기대를 좌절시켰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보다 완전한 모형으로서의 '결혼'을 제안해 주셨지만, 우리의 '인간성'은 그것을 오용하고 남용했습니다. 

 

"이혼은 옳고 그름의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우리의 발가벗은 인간성의 단면이다. 하나님은 우리 인간에게 완전한 인간성을 부여하시고자 하였으나, 인간은 스스로 완악함을 선택했고, 스스로 가장 좋은 것을 가장 나쁘게 사용하는 방법에 익숙해졌다. 원래 하나님께서 한 몸으로 만드신 것을 인간이 나눠서는 안 되는 일이다. 그래서 '차선'의 선택을 할 수밖에 없었다. 인간성을 지키고자 하는 최소한의 규율.  그것이 바로 모세의 율법이다."

 

예수님은 단순히 헤롯과 헤로디아의 부도덕한 결혼을 지적하신 것만이 아니라, 그것 자체가 창조 질서를 파괴하는 인간의 처절한 단면이라는 것을 보여주셨습니다. 더불어 결혼이 '자연스러운 연애 감정'이거나 '남녀관계의 사회·도덕적인 결론'이 아니라는 것을 강조하셨습니다. 오히려 애쓰고 노력해서 만들어가야 하는 어떤 '과정'이라는 것을 선명히 보여주셨습니다. 어쩔 수 없는 '이혼'일지라도 그 과정과 절차를 분명히 하고 이혼에 따른 피해를 최소화하라는 것인 예수님의 말씀이었습니다.

 

결혼은 창세기로부터 시작되는 "최초의 제안"입니다. 하나님께서 직접 마련(창 2:18)하셨고 스스로 이 결혼의 주례자(창 2:22~23)가 되셨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은 이 '결혼'을 하나의 '제도'로 오염시켰고, '이혼'을 하나의 '과정'으로 오용하였습니다. "지금 너희들이 헤롯과 헤로디아의 결혼을 두고 이런 말을 하나본데, 과연 너희의 결혼은 어떠하냐?"라고 묻는 듯한 예수님의 질문에 바리새인들은 말을 이어갈 수가 없었습니다.
신학자 톰 라이트의 지적처럼 "현대 사회에서 마가복음 10장 11~12절의 말씀을 크게 읽는 것은 별로 지혜로운 일이 아닌" 것처럼 보여집니다. '차선의 선택'으로서의 이혼은 당사자뿐 아니라 주위 사람들에게 깊은 상처를 남기고 또 그 상처가 오래 지속되기 때문입니다. 현대의 교회 공동체에는 그 상처를 보듬는 지혜와 세심한 배려가 더 필요합니다. 더불어 이 말씀은 사람과 사람이 만나 한 몸을 이루는 일이 얼마나 놀랍고 신비로운 것인지를 되돌아보게 합니다. 

 

하나님 안에서 결혼한다는 것은 얼마나 큰 축복일까요? 까마득한 창세로부터 내려온 결혼의 의미를 온전하게 이해하고, 하나님의 사람들이 손을 잡고 결혼의 서약을, 그 놀라운 기쁨을 하나님과 함께 나눈다는 것은 또 얼마나 기쁜 일일까요? 결혼을 하나의 수단, 피치 못할 선택, 신분 상승의 기회, 조건과 조건의 만남 정도로 가볍게 여기는 현대 사회에서 어쩌면 우리가 놓치고 있는 진정한 결혼의 기쁨과 감격이 바로 이것이 아닐까요? 제가 주례사에서 인용했던 시 한 편으로 이 기쁨을 갈음하고자 합니다. 

 

 

사람이 온다는 건

실은 어마어마한 일이다

그는

그의 과거와 현재와

그의 미래와 함께 오기 때문이다

한 사람의 일생이 오기 때문이다

부서지기 쉬운

그래서 부서지기도 했을

마음이 오는 것이다

 

- 정현종, '방문객' 전문

 

 

 

 

                          


* 성경엔 '나바테아', '나바테아인'이 등장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이들의 수도였던 '페트라'는 잘 알려져 있습니다. 나바테아는 당시 에돔 지역에 거주하던 소수 민족들이 세운 나라로 알려져 있습니다. 나바테아의 공주와 이혼했던 안티파스는 결국 나바테아의 왕 아레타스 4세의 침공으로 회복불능한 정치적 타격을 입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