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IDBARR

엔딩 노트

mimnesko 2024. 3. 6. 11:30
마가복음 9:30~37

30 그 곳을 떠나 갈릴리 가운데로 지날새 예수께서 아무에게도 알리고자 아니하시니
31 이는 제자들을 가르치시며 또 인자가 사람들의 손에 넘겨져 죽임을 당하고 죽은 지 삼 일만에 살아나리라는 것을 말씀하셨기 때문이더라
32 그러나 제자들은 이 말씀을 깨닫지 못하고 묻기도 두려워하더라
33 가버나움에 이르러 집에 계실새 제자들에게 물으시되 너희가 길에서 서로 토론한 것이 무엇이냐 하시되
34 그들이 잠잠하니 이는 길에서 서로 누가 크냐 하고 쟁론하였음이라
35 예수께서 앉으사 열두 제자를 불러서 이르시되 누구든지 첫째가 되고자 하면 뭇 사람의 끝이 되며 뭇 사람을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하리라 하시고
36 어린 아이 하나를 데려다가 그들 가운데 세우시고 안으시며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37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런 어린 아이 하나를 영접하면 곧 나를 영접함이요 누구든지 나를 영접하면 나를 영접함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를 영접함이니라

 

"예수 믿고 구원 받으세요"

어린 시절 사탕 하나와 전도지를 들고 동네 공원에 계신 분들에게 나눠드린 적이 있습니다. 고맙게도 어린 아이들이 건네는 전도지를 매정하게 뿌리치는 분들은 적었습니다. 간혹 사탕만 받고 전도지는 다시 돌려주시는 분들이 있었지만 기억날만한 적대감을 드러내신 분들은 없었습니다. 그 중에는 놀릴거리를 하나 찾았다는 듯 장난끼 가득한 표정으로 묻는 분들은 있었습니다. 

"얘야, 근데 왜 하필 구원이냐? 10원도 아니고."

 

지금이면 다들 질색팔색하는 아재 개그, 부장님 농담인데 어린 나이의 저는 그 말이 꽤 흥미로웠습니다. 구원이 그런 거구나. 10원 주면 1원 거슬러 주는 게 구원(9원)이구나.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구나. 머리속으론 작고 가벼웠던(마치 '렙돈'처럼) 1원 주화의 은색빛을 떠올렸던 것이 기억납니다. 

 

같은 장소에서 같은 이야기를 들어도 사람마다 받아들이는 내용은 제각각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들리는 대로 듣는게 아니라, 듣고 싶은 대로 듣는' 경우가 더 많기 때문입니다. 심지어 전해지는 메시지 너무 선명하고, 오해가 끼어들 틈조차 없이 단호할 때에도 자신의 이해에 따라 메시지를 수용하곤 합니다. 자신의 가치관이나 이익의 방향과 다른 내용들은 스스로 볼륨을 줄이는 식입니다. 이것을 심리학에선 '확증편향'이라고 부르고 유튜브에선 '알고리즘'이라고 부릅니다. 

자기가 듣고 싶은 이야기만 귀에 즐거운 상황이 반복되면 어느샌가 주위에 '같은 이야기'들만 남게 됩니다. 그리고 그 상황을 '다수의 의견'이라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오해는 늘어나고 확증편향이 더욱 깊어지게 됩니다.

그래서 많은 학자들이 자신의 생각조차 때때로 '낯설게 보기'를 해야한다고 말합니다. 쉬운 일이 아닙니다. 깊이 100미터의 우물에서 맨손으로 빠져나오는 것보다 어려울 수 있습니다. 매순간 중력을 거스르는 듯한 반작용을 경험해야 하는 일이 달가울 리도 없습니다. 하지만 지신만의 세상에 갇히지 않기 위해선, 스스로 만들 우물 안에서 그 아귀만한 하늘만 바라보지 않기 위해선 부단히 노력을 해야 합니다. 

 

스나다 마미 감독의 '엔딩 노트(Ending Note, 2011)'라는 영화가 있었습니다. 스나다 감독의 친 아버지인 '스나다 도모아키'는 정년퇴임을 앞두고 위암 5기의 판정을 받습니다. 이 영화는 자신의 아버지가 죽음을 준비하는 꼼꼼한 과정을 담은 다큐멘터리 영화입니다. 그는 죽음을 앞두고 11가지의 할 일 목록(To do list)를 만들었습니다. 

 

    1. 평생 믿지 않았던 신을 한 번 믿어보기

    2. 손녀들 머슴 노릇 실컷 해주기

    3. 평생 찍어주지 않았던 야당에 투표하기

    4. 꼼꼼하게 장례식 초청자 명단을 작성하기

    5. 소홀했던 가족과 행복한 여행

    6. 빈틈이 없는 지 장례식장 사전 답사하기

    7. 노년들과 한 번 더 힘껏 놀기

    8. 나를 닮아 꼼꼼한 아들에게 인수인계하기

    9. 이왕 믿은 신에게 세례 받기

  10. 쑥스럽지만 아내에게 사랑한다 말하자

  11. 엔딩노트

 

스나다 도모아키는 위의 리스트를 하나씩 실천합니다. 전통적인 일본 신사 장례가 아닌 교회에서 장례식를 치르기로 한 그는 9번 항목에 따라 세례 교인이 됩니다. 평생 자민당에게만 투표했던 그가 "이젠 민주당을 찍어줄 때도 되었어."라며 웃는 모습은 비로소 자신만의 우물에서 조금은 자유롭게 된 모습처럼 보였습니다. 아내와의 마지막 순간, 그는 작게 말합니다.

"사랑해요. 고마워요." 

이 짧은 말을 오해하기란 정말 어렵겠지요. 

 


 

 

예수님은 마치 골고다를 향한 자신만의 '엔딩 노트'를 작성하시는 것처럼, 제자들에게 꼼꼼한 당부를 남깁니다. 문제는 그 내용을 여전히 이해하지 못하는 제자들의 고집스런 확증편향입니다. 

 

 

이는 제자들을 가르치시며
또 인자가 사람들의 손에 넘겨져 죽임을 당하고
죽은 지 삼 일만에 살아나리라는 것을
말씀하셨기 때문이더라 
그러나 제자들은 이 말씀을 깨닫지 못하고 
묻기도 두려워하더라

 

마가복음 9:31~32

 

 

변화산에서 예수님의 '신성'과 '메시아 되심'을 목격한 제자들로서는, 메시아가 죽임을 당한다는 것도 또 다시 살아난다는 것도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메시아가 죽는다고? 어떻게? 죽으면 메시아가 아닌 거 아냐?" 이 집요한 오해는 예수님이 다시 살아나실 거라는 대목에선 엄청난 혼란을 주고 맙니다. 죽은 사람이 다시 살아난다고? 사흘 만에? 

마가는 예수님의 제자들이 "이 말씀을 깨닫지 못하고 묻기도 두려워"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오해는 늘 그렇듯이 잘못된 행동으로 이어집니다.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을 전혀 이해하지 못한 제자들은 오히려 메시아이신 예수님이 통치하시는 새로운 나라에서 자신들의 서열로 논쟁을 합니다. 서로의 공과를 주장하며 예수님의 가장 가까운 권력의 자리에 누가 설 것인가로 열띤 논의를 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오해에서 이어진 잘못된 행동은, 필연적으로 잘못된 결과를 만들어 냅니다. 바람만 훅 불어도 넘어질 수밖에 없는 빈약한 논리의 성(城)이었지만, 그들 보기엔 세상 어떤 것보다 견고한 왕좌처럼 보였을 것입니다. 

 

톰 라이트는 이 말씀을 묵상하며 "여기서 우리는 제자들의 사정을 충분히 이해할 뿐만 아니라 우리도 그렇지는 않은지 자문해 보아야 한다. 하나님이 무언가를 말씀하려고 하실 때, 우리는 얼마나 잘 듣는가? 성경에서 보거나 교회에서 들은 것, 혹은 우리 주변에서 일어나는 어떤 일을 통해 하나님이 우리에게 말씀하시고자 하는 것이 있지는 않은가? 만약에 있다면 우리는 그것을 받아들일 수 있는가? 기존의 이해 방식을 버리고 새로운 방식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는가?" 라고 날카롭게 지적합니다. 

 

메시지가 부족한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메시지를 바르게 이해하고, 수용하며, 또 행동하는 성도가 희박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오염된 메시지'를 탓하지만 실상 그런 일은 극소수에 불과합니다. 극소수의 일을 부플려 말하는 것 역시 오해에서 비롯한 일일 뿐입니다. 만약 오늘 나에게 주신 '하나님의 말씀'이 있다면, 우리는 오해 없이 들을 준비가 되어 있습니까? 우리의 전(前)이해를 뒤집을 준비가 되어 있습니까? 설령 그것이 내 입맛에 맞지 않고, 내 생각에 일치하지 않더라도 그것을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수용할 준비가 되어 있습니까?

오늘 예수님이 쓰신 엔딩노트의 마지막은 자리의 높고 낮음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어린 아이와 같은 믿음'을 말하는 것도 아닙니다. 이 빈번한 오해는 본문의 말씀을, 예수님의 엔딩노트를 종종 오해하게 했습니다. 오히려 본문의 말씀은, 우리의 견고한 껍질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소위 '내 생각에는'이라고 시작하는 단단한 확증편향을 겨냥하고 있습니다. 

 

"너희 생각과 전혀 다른 일이 일어났을 때, 너흰 그것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느냐?"

이젠 우리가 대답할 차례입니다.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런 어린 아이 하나를 영접하면 
곧 나를 영접함이요 
누구든지 나를 영접하면 
나를 영접함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를 영접함이니라

 

마가복음 9:3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