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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즉구(通則久)

mimnesko 2024. 3. 5. 09:00
마가복음 9:14~29

14 이에 그들이 제자들에게 와서 보니 큰 무리가 그들을 둘러싸고 서기관들이 그들과 더불어 변론하고 있더라
15 온 무리가 곧 예수를 보고 매우 놀라며 달려와 문안하거늘
16 예수께서 물으시되 너희가 무엇을 그들과 변론하느냐
17 무리 중의 하나가 대답하되 선생님 말 못하게 귀신 들린 내 아들을 선생님께 데려왔나이다
18 귀신이 어디서든지 그를 잡으면 거꾸러져 거품을 흘리며 이를 갈며 그리고 파리해지는지라 내가 선생님의 제자들에게 내쫓아 달라 하였으나 그들이 능히 하지 못하더이다
19 대답하여 이르시되 믿음이 없는 세대여 내가 얼마나 너희와 함께 있으며 얼마나 너희에게 참으리요 그를 내게로 데려오라 하시매
20 이에 데리고 오니 귀신이 예수를 보고 곧 그 아이로 심히 경련을 일으키게 하는지라 그가 땅에 엎드러져 구르며 거품을 흘리더라
21 예수께서 그 아버지에게 물으시되 언제부터 이렇게 되었느냐 하시니 이르되 어릴 때부터니이다
22 귀신이 그를 죽이려고 불과 물에 자주 던졌나이다 그러나 무엇을 하실 수 있거든 우리를 불쌍히 여기사 도와 주옵소서
23 예수께서 이르시되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히 하지 못할 일이 없느니라 하시니
24 곧 그 아이의 아버지가 소리를 질러 이르되 내가 믿나이다 나의 믿음 없는 것을 도와 주소서 하더라
25 예수께서 무리가 달려와 모이는 것을 보시고 그 더러운 귀신을 꾸짖어 이르시되 말 못하고 못 듣는 귀신아 내가 네게 명하노니 그 아이에게서 나오고 다시 들어가지 말라 하시매
26 귀신이 소리 지르며 아이로 심히 경련을 일으키게 하고 나가니 그 아이가 죽은 것 같이 되어 많은 사람이 말하기를 죽었다 하나
27 예수께서 그 손을 잡아 일으키시니 이에 일어서니라
28 집에 들어가시매 제자들이 조용히 묻자오되 우리는 어찌하여 능히 그 귀신을 쫓아내지 못하였나이까
29 이르시되 기도 외에 다른 것으로는 이런 종류가 나갈 수 없느니라 하시니라

 

 

주역의 계사전에 보면 "궁즉변(窮則變), 변즉통(變則通), 통즉구(通則久)"라는 표현이 나옵니다. 여기서 궁(窮)은 막다른 곳을 의미합니다. 도저히 피해갈 길이 없는 높은 벽과 같습니다. 주역은 그런 '막다른 곳'을 만났을 때 좌절할 것이 아니라 변(變)해야 한다, 고 조언합니다. '변하면 통하게 된다, 그리고 통하면 오래 가게(久) 된다'는 것입니다.

 

막다른 곳에서 새로운 변화를 모색하는 것, 그리고 그 변화로 새로운 돌파구를 마련하는 것. 기존의 질서로 더 이상 전진할 수 없을 때, 전혀 새로운 방법으로 '통'해야 한다는 주역의 가르침은 토마스 쿤(Thomas Kuhn)이 '과학혁명의 구조'에서 언급한 '페러다임의 전환'(Paradigm shift)을 닮았습니다. 토마스 쿤은 과학의 역사가 '점진적인 진보'가 아니라 축적된 지식에 의해 어느 순간 단절된 도약을 이루는 '패러다임의 전환'을 통해 발전해 왔다고 주장했습니다. 즉 완만한 경사로가 아니라 마치 계단을 오르는 것처럼 도약과 도약으로 발전했다는 의미입니다. 이런 현상을 사회학에선 '혁명'이라고 정의합니다. 

 

생각해보면 인류의 역사도 '점진적인 진보' 즉 물 흐르듯 유연하게 흘러온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론 계단을 도약하듯 전혀 새로운 생각과 구조를 통해 발전해왔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인류가 처음 '불'을 사용하게 된 것이나 '도구'를 사용하게 된 것들도 어쩌다보니 그렇게 되었다고 설명하기엔 어려운 점들이 많습니다. 오히려 막다른 곳에 도달해 변화를 시도하고, 그 수많은 변화의 시도 중 통하게 된 한 가지를 찾아서 그것을 오래 유지하는 과정의 반복이라 보는 편이 더 정확할 것입니다. 4차에 걸친 산업혁명은 이러한 도약의 좋은 예가 됩니다. 인류는 컨베이어 벨트 대량생산의 시대로부터 이젠 클라우드에 존재하는 무형의 정보에 접근하여 생활을 채우는 단계로 '도약'하게 된 것입니다. 

 


 

 

예수님의 '메시아'되심과 '하나님 나라'의 도래를 직접 체감한 제자들은 마치 모든 것을 이룬 것처럼, 또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것처럼 의기양양했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의기양양'은 한 아이의 아버지로부터 산산히 부서지게 됩니다. 자신의 아이에게 '귀신'이 들렸다고 말하는 아버지는 제자들을 찾아왔습니다. 예수님의 놀라운 소문이 곳곳에 퍼져 있었으니 제자들 역시 능히 귀신을 쫓아낼 수 있으리라 생각했을 것이고 그 기대를 숨기지 않았습니다. 제자들 역시 자신들의 능력을 의심하지 않았습니다. 손만 대면 눈을 뜨고, 말만 하면 귀가 열리는 기적을 함께 경험했기에 나름 '예수님의 프로세스'를 확신하고 있지 않았을까요?

성경은 그 결과를 '아이 아버지'의 입을 통해 우리에게 알려줍니다. 

 

 

귀신이 어디서든지 그를 잡으면
거꾸러져 거품을 흘리며 이를 갈며
그리고 파리해지는지라
내가 선생님의 제자들에게 내쫓아 달라 하였으나
그들이 능히 하지 못하더이다

 

마가복음 9:18

 

 

결과는 썩 좋지 않았습니다. 아이 아버지의 말은 주위 제자들을 주눅 들게 했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 아버지의 절박함과 그 이면에 담겨 있는 생각을 파악하셨습니다. 쭈뼛거리며 서 있던 제자들의 마음도 선명하게 알고 계셨습니다. 

 

 

대답하여 이르시되
믿음이 없는 세대여 내가 얼마나 너희와 함께 있으며
얼마나 너희에게 참으리요
그를 내게로 데려오라 하시매

 

마가복음 9:19

 

 

제자들은 자신들이 '막다른 곳'에 도달했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더이상 할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아이 아버지의 비웃음, 주위 사람들의 조롱은 당연했습니다. 스승으로부터 어떠한 '능력'도 부여받거나 물려받지 못한 제자들은 무가치해 보였습니다. 이제 '변해야 할 때'였습니다. 그러나 제자들 누구도 어떻게 변할 수 있는지를 알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이 그들에게 '믿음이 없는 세대'라고 말씀하셨던 이유가 바로 이것입니다. 궁하지만 변할 수 없는 신앙인의 모습. 어쩌면 오늘 우리와 참 흡사한 모습입니다. 

 

아이의 아버지 역시 '막다른 곳'에 도달해 있었습니다. 한 걸음도 내딛을 수 없는 절벽 끝이었습니다. 어쩌면 이런 결과를 이미 예상하고 있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예수님에게 달려나온 것일 수도 있습니다. 부모로서의 절박함이 없을 수야 없겠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둔감해졌고 무덤덤해졌습니다. 매일 매일 또 다른 실패를 만나고, 자신 앞에 선 벽이 얼마나 견고한 것인지를 확인할 뿐입니다. 그 역시 '변하는 방법'을 몰랐던 것입니다. 그가 예수님께 "그러나 무엇을 하실 수 있거든 우리를 불쌍히 여기사 도와 주옵소서"라고 말했을 때, 예수님은 그 말 속에 담긴 패배의 짙은 그림자를 날카롭게 바라보셨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히 하지 못할 일이 없느니라 하시니

 

마가복음 9:23

 

 

정신이 번쩍 드는 한 마디에 그는 자신 앞에 계신 분이 여느 제자들과 다른 분임을 비로소 알게 되었습니다. 더불어 자신의 진정한 문제가 무엇인지도 알게 되었습니다. 한치의 틈도 없이 앞을 막은 벽 앞에서 좌절했을 때, 그 '궁지'를 벗어나기 위해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비로소 깨닫게 되었습니다. 

 

 

곧 그 아이의 아버지가 소리를 질러 이르되 
내가 믿나이다 나의 믿음 없는 것을 도와 주소서 하더라

 

 

 

아이의 아버지는 귀신 들린 아이의 증상이 '호전되는 것' 말고는 딱히 바란 것이 없었습니다. 설마 귀신이 떠나가리라고는 생각조차 해본 일이 없습니다. 도대체 누가 귀신 들린 아이에게서 그 귀신을 쫓아낼 수 있단 말인가! 그저 물불을 가리지 않고 뛰어드는 아이의 증상이 조금이라도 호전되기를, 단 며칠이라도 말끔해지길 바랬던 것입니다. 의사를 찾아가 "어차피 내 몸은 내가 잘 압니다. 진통제나 좀 주세요"라고 말하는 것과 다를 바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눈앞에서 귀신이 쫓겨 나가는 모습에 누구보다 큰 충격을 받았던 것 역시 아이의 아버지였을 것입니다. "이게 된다고?" 

 

이 놀라운 기적은 변화산으로부터 새로운 세상이 시작되었음을 제자들에게 알려줍니다. 현실의 얇은 베일을 들추자 드러난 하나님의 나라를 경험한 제자들은 궁즉변, 변즉통, 통즉구의 세상. 이전과는 전혀 다른 패러다임이 지배하는 새로운 세상을 목격하게 된 것입니다. 구하면 주시는 세상, 찾으면 찾게 되는 세상, 문을 두드리면 활짝 열리는 새로운 세상이야말로 하나님의 나라, 메시아이신 예수님이 통치하시는 나라, 통즉구(通則久)의 나라인 것입니다. 

 

그러나 여전히 우리의 믿음은 낮은 담 앞에서 멈춥니다. 오갈 데 없는 발걸음이 되어 낙심합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그 놀라운 가능성을 애써 외면하며 살아갑니다. 손을 모으고 기도하면 열리는 세상을 모른 채 살아갑니다. 믿음의 모양은 있으나 그 능력이 없는 것, 바로 이런 모습은 아니었을까요? 그래서 오늘 예수님의 말씀이 서늘하게 다가옵니다. 

 

 

이르시되 기도 외에 다른 것으로는 이런 종류가 나갈 수 없느니라 하시니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