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멀티버스(multiverse), 하나님 나라

mimnesko 2024. 3. 4. 12:48
마가복음 9:2~13

2 엿새 후에 예수께서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을 데리시고 따로 높은 산에 올라가셨더니 그들 앞에서 변형되사
3 그 옷이 광채가 나며 세상에서 빨래하는 자가 그렇게 희게 할 수 없을 만큼 매우 희어졌더라
4 이에 엘리야가 모세와 함께 그들에게 나타나 예수와 더불어 말하거늘
5 베드로가 예수께 고하되 랍비여 우리가 여기 있는 것이 좋사오니 우리가 초막 셋을 짓되 하나는 주를 위하여, 하나는 모세를 위하여, 하나는 엘리야를 위하여 하사이다 하니
6 이는 그들이 몹시 무서워하므로 그가 무슨 말을 할지 알지 못함이더라
7 마침 구름이 와서 그들을 덮으며 구름 속에서 소리가 나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 하는지라
8 문득 둘러보니 아무도 보이지 아니하고 오직 예수와 자기들뿐이었더라
9 그들이 산에서 내려올 때에 예수께서 경고하시되 인자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날 때까지는 본 것을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라 하시니
10 그들이 이 말씀을 마음에 두며 서로 문의하되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는 것이 무엇일까 하고
11 이에 예수께 묻자와 이르되 어찌하여 서기관들이 엘리야가 먼저 와야 하리라 하나이까
12 이르시되 엘리야가 과연 먼저 와서 모든 것을 회복하거니와 어찌 인자에 대하여 기록하기를 많은 고난을 받고 멸시를 당하리라 하였느냐
13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엘리야가 왔으되 기록된 바와 같이 사람들이 함부로 대우하였느니라 하시니라

 

 

최근 SF영화들에서 가장 자주 접하게 되는 단어는 아마도 '멀티버스(multiverse)'가 아닐까요? 우주(universe), 또는 '단일 우주'라는 단어에 대응하는 이 개념은 '다중 우주' 또는 '다중 우주론'으로 번역되곤 합니다. '어벤저스 시리즈'로 대표되는 마블코믹스에서 세계관에서 종종 만나게 되는 설정이죠. 최근 개봉한 영화에선 서로 다른 우주에서 온 세 명의 스파이더 맨이 힘을 합쳐 싸우는  다소 기괴한(?) 장면이 등장하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이런 '다중 우주'의 개념이 최근의 상상물이 아니란 점입니다. 무려 기원전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데모크리토스나 에피쿠로스와 같은 고대 희랍의 철학자들은 '우주' 자체가 생성하고 소멸하며 얼마든지 다중의 우주가 존재할 수도 있다는 과감한 주장을 했습니다. 망원경 하나 없이 맨눈으로 밤 하늘을 쳐다보는 것이 고작이었던 고대의 과학자들이 이런 생각을 했다는 것 자체가 놀랍기도 합니다. 

 

철학적 개념처럼 또는 만화적인 상상으로만 존재했던 '다중 우주' 가설에 그야말로 불을 지폈던 것은 20세기의 양자역학이었습니다. n차원의 '가능성' 속에서 얼마든지 다른 차원의 우주가 병존할 수 있다는 이론(그러나 다른 우주로 가거나 그 존재들을 인지할 수는 당연히 없습니다)이 아름다운 수학 방정식으로 정리되었기 때문입니다. 우주가 여러 개의 끈으로 이뤄져 있다든지 관측자에 따라 대상의 상태가 변화하거나 중첩된다는 이 '가능성의 과학'은 미시 세계에선 나름의 효력을 발휘하고 있으나, 그러나 여전히 거시 세계는 뉴턴의 역학으로 작용과 반작용을 이루며 돌아가고 있기에 갑자기 달이 두 개가 되거나, 나와 똑 같은 누군가를 만나는 참상을 현실에서 경험하기는 매우 어렵습니다. 

 

 

 


 

 

 

변화산(성경에선 '높은 산'이라고만 기록되어 있습니다만 아마도 가이사랴 빌립보 바로 북쪽에 있는 헐몬 산이었을 것입니다)에서의 사건을 접할 때면 어김없이  '멀티버스'를 떠올리게 됩니다. 성경은 예수님께서 베드로와 야고보, 그리고 요한 앞에서 '변하셨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옷은 세상의 어떤 강력한 세제도 구현할 수 없을만큼 얼룩 한 점 없이 하얗게 빛났습니다. 심지어 엘리야, 모세와 함께 이야기를 나누고 있습니다. 제자들이 어떻게 저 사람들이 '엘리야'나 '모세'라는 것을 알 수 있었을까요(이름표 같은 걸 목에 걸고 계신 것도 아니었을테니까요)? 또 어떻게 죽은(혹은 죽었다고 알려지거나 이미 충분히 그럴 정도의 시간이 경과한) 인물들이 버젓이 살아 있는 걸까요? 이들은 도대체 어디서 나타났던 것일까요?

 

오컴의 면도날처럼, 마치 그 순간 또 다른 현실, 즉 멀티버스가 그 높은 산에서 펼쳐진 것은 아니었을까요? 과거가 현재가 되고 또 미래가 현재가 되는, 시공간의 제약을 뛰어넘는 다른 차원의 멀티버스가 열렸던 것은 아닐까요? 그래서 도무지 표현도 설명할 길도 없는 놀라운 장면에 제자들이 "몹시 무서워하므로 그가 무슨 말을 할지 알지 못"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아니었을까요? 성서학자들은 "어떤 상황의 '내면'을 평상시에는 볼 수 없지만 그 일상의 베일이 걷히면 더 온전한 실재를 보게된다."라며 이 장면을 설명했습니다. 어쩌면 현실에 내재하는 '하나님 나라'의 층위를 발견하게 되었는지도 모릅니다. 일상의 베일이 걷히는 순간, 평행 우주처럼 우리와 함께하던 하나님의 나라를 발견하게 되었는지도 모릅니다.  이들은 퇴장은 등장의 신비함만큼이나 놀랍습니다. "문득 둘러보니 아무도 보이지 아니하고 오직 예수와 자기들뿐이었더라."(8절)

 

마치 베드로처럼 우리가 이 놀라운 장면에서 종종 놓치는 것은, 예수님께서 이 놀라운 광경을 제자들이 목격하게 하셨던 의도입니다. 또 하늘에서 들렸던 음성입니다. 이것은 현실 속에 계시는 예수님이 바로 '메시아'이며, 바로 저 분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외침입니다. 현실의 베일을 살짝 들추기만 하면 너무나 명확히 보이는 그분의 신성(神性)을 똑똑히 기억하라는 것입니다. 그분은 관념이나 철학이나 만화속 캐릭터가 아닙니다. 시공을 넘나들며 대환장 소동을 벌이는 닥터 스트레인지도 아닙니다. 실제로(여기서 '실제로'라는 말의 힘이 얼마나 큰 지) 우리와 함께 하시며, 동시에 하나님 나라와 함께하시는 바로 그 분이 바로 예수님이란 사실입니다. 

 

이 놀라운 고백이 지금도 이어지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현실 속 베일을 살짝 들추기만 해도 우리는 '하나님 나라'를 목격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멀리 있는 곳도 아니고, 또 여기에 있다 저기에 있다고 말할 수 있는 곳도 아닌 이유가 바로 이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모든 곳에 있습니다. 현실이라는 얇은 베일 너머에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이 놀라운 사실은 기쁨이며 동시에 두려움입니다. 현실적이며 대단히 비현실적입니다. 오히려 '죽어서나 가는 나라'라는 표현이 그렇게 남루하게 느껴질 수가 없을 정도로 세련된 현재입니다. 우리가 있는 나라가 바로 '지금 이 나라'이며, 우리가 가야할 나라 역시 바로 '지금 이 나라'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