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벼랑끝

mimnesko 2024. 2. 6. 10:14
시편 102:1~11

1 여호와여 내 기도를 들으시고 나의 부르짖음을 주께 상달하게 하소서
2 나의 괴로운 날에 주의 얼굴을 내게서 숨기지 마소서 주의 귀를 내게 기울이사 내가 부르짖는 날에 속히 내게 응답하소서
3 내 날이 연기 같이 소멸하며 내 뼈가 숯 같이 탔음이니이다
4 내가 음식 먹기도 잊었으므로 내 마음이 풀 같이 시들고 말라 버렸사오며
5 나의 탄식 소리로 말미암아 나의 살이 뼈에 붙었나이다
6 나는 광야의 올빼미 같고 황폐한 곳의 부엉이 같이 되었사오며
7 내가 밤을 새우니 지붕 위의 외로운 참새 같으니이다
8 내 원수들이 종일 나를 비방하며 내게 대항하여 미칠 듯이 날뛰는 자들이 나를 가리켜 맹세하나이다
9 나는 재를 양식 같이 먹으며 나는 눈물 섞인 물을 마셨나이다
10 주의 분노와 진노로 말미암음이라 주께서 나를 들어서 던지셨나이다
11 내 날이 기울어지는 그림자 같고 내가 풀의 시들어짐 같으니이다

 

 

그대 보고 싶은 마음 죽이려고
산골로 찾아갔더니, 때아닌
단풍 같은 눈만 한없이 내려
마음 속 캄캄한 자물쇠로
점점 더 벼랑끝만 느꼈습니다. 
벼랑끝만 바라보며 걸었습니다.
가다가 꽃을 만나면
마음은
꽃망울 속으로 가라앉아
재와 함께 섞이고
벼랑끝만 바라보며 걸었습니다. 

 

-  조정권, 「벼랑끝」 전문

 

누구나 인생의 깊은 벼랑을 지날 때가 있습니다. 벼랑끝만 바라보면 걸을 때가 있습니다.

그런 일이 없기를 바라지만, 살다보면 기대와 달리 "내 날이 연기 같이 소멸하며 내 뼈가 숯 같이" 타들어가는 일을 한두 번씩 경험하게 됩니다. 깊은 우물 바닥에 내려 앉은 기분. 시편 102편 저자의 표현처럼 "내 마음이 풀 같이 시들고 말라 버"리는 경험을 할 때면 극단적인 선택이라는 것이 결코 멀리 있지 않았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입으로 어떤 음식도 삼킬 수 없는 상태. 한 여름에도 몸의 한기가 좀처럼 빠지지 않고 떨림이 멈추지 않습니다. 눈을 감고 자리에 누우면 오히려 또렷해지는 원망과 절망은 시퍼렇게 밝아오는 새벽까지 멈추질 않습니다. 그래서 문득 '산다는 것'이 시시해질 때가 있습니다. 

 

우리나라의 자살률(인구 10만 명 당)이 급증한 것이 1998년 외환위기 즉 IMF 시절부터였습니다. 이후 2011년엔 31.7명으로 최고치를 기록하고 이후 소폭 감소했다가 증가하기를 반복하고 있습니다. 그래도 여전히 OECD 평균 10.7명에 비한다면 세 배 이상 높은 수치를 지난 30년 동안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 중 더욱 가슴아픈 것은 우리나라 10대의 자사률입니다. 2022년 기준 10대의 자살률은 무려 7.2명이나 됩니다. 매년 시행되는 청소년건강행태조사에 따르면 우리나라 청소년 중 10% 이상이 최근 1년 동안 심각하게 자살을 생각한 적이 있다고 대답을 했습니다(교육부 ·보건복지부 ·질병관리청, 2020). 도대체 왜 10대 청소년들이, 아직 채 피어보지도 못한 자신의 삶을 스스로 마감하는 것일까요? 통계에 따르면 자살한 학생들이 평소 고민하던 문제들이 '가족문제, 개인문제, 학업문제, 친구 관계'의 순이었다고 합니다. 최근엔 SNS 등 미디어 사용에 따른 자살의 이유가 증가하고 있습니다. 2019년에는 SNS에 자해 인증을 올리는 자해 챌리지가 유행하기도 했습니다. 팔목에 밴드를 붙이고 다니면서 몸에 있는 자해흔을 보여주는 것이 일종의 놀이처럼 된 것입니다. 물론 자해가 자살로 이어지는 경우는 드물지만, 이것이 '충동'으로 연결되는 것에는 어느 정도 가능성이 있어 보입니다. 이러한 '충동'이 콤플렉스 등으로 인한 우울감, 따돌림, 친구 사이의 갈등과 만났을 때 아직 어리기만 한 10대 청소년들을 극단적인 선택으로 몰아가기도 합니다. 

 

인생의 깊은 벼랑을 그저 '누구나 겪는 일'로 가볍게 봐서는 안 된다는 의미입니다. 누군가에게 도움을 요청해야 하고, 또 도움이 필요한 사람의 손을 잡아줘야 합니다. 특히 교회가 스스로를 '공동체'라고 부른다면, 이 역할에 더욱 주목해야 하지 않을까요? 벼랑끝만 바라보며 걷는 아이들의 손을 잡아주고, 그들의 안전한 보금자리가 되어주는 것이 이 시대에 부과한 하나님의 사명이 아닐까요? 갈 수록 줄어드는 다음세대에 고민하는 교회는 많습니다. 그러나 그 고민이 실질적인 행동으로 이어지는 교회는 드뭅니다. 많지 않은 실질적인 행동조차 정작 다음세대와는 별반 관련 없는 일일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오늘 시인은 자신의 깊은 절망과 좌절을 남김없이 하나님께 쏟아내고 있습니다. 

시편에는 이런 '비탄시(悲嘆詩)'가 무려 36편이나 됩니다. 우리 삶이 '노래'라면 그중 20%는 이런 깊은 절망과 아픔으로 채워져 있다는 의미는 아닐까요. 시인은 하나님에게 도움을 요청합니다. 이 문제를 실질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분을 바라봅니다. 내 깊은 절망과 좌절을 누구보다 잘 아시고 계시는 전능한 창조주를 바라봅니다. 문제의 해결이 바로 하나님께 있음을 아는 사람의 지혜가 감탄스러우면서 동시에 내 자신이 이렇게 낱낱이 하나님 앞에 쏟아낸 적이 있었던가 돌아보게 됩니다. 괜찮은 척, 상처받지 않은 척, 잘 견디고 있는 척하며 살고 있지는 않은지....

 

비탄의 시를 써본 사람만이 비탄의 표정을 읽을 수 있습니다. 상처입은 치료자, 라는 어떤 책의 제목처럼 어쩌면 교회 공동체야 말로 이 사회의 상처입은 치료자가 아닐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