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IDBARR

너희 쓸 것을 사라

mimnesko 2023. 3. 28. 10:55
마태복음 25:1~13

1 그 때에 천국은 마치 등을 들고 신랑을 맞으러 나간 열 처녀와 같다 하리니
2 그 중의 다섯은 미련하고 다섯은 슬기 있는 자라
3 미련한 자들은 등을 가지되 기름을 가지지 아니하고
4 슬기 있는 자들은 그릇에 기름을 담아 등과 함께 가져갔더니
5 신랑이 더디 오므로 다 졸며 잘새
6 밤중에 소리가 나되 보라 신랑이로다 맞으러 나오라 하매
7 이에 그 처녀들이 다 일어나 등을 준비할새
8 미련한 자들이 슬기 있는 자들에게 이르되 우리 등불이 꺼져가니 너희 기름을 좀 나눠 달라 하거늘
9 슬기 있는 자들이 대답하여 이르되 우리와 너희가 쓰기에 다 부족할까 하노니 차라리 파는 자들에게 가서 너희 쓸 것을 사라 하니
10 그들이 사러 간 사이에 신랑이 오므로 준비하였던 자들은 함께 혼인 잔치에 들어가고 문은 닫힌지라
11 그 후에 남은 처녀들이 와서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에게 열어 주소서
12 대답하여 이르되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가 너희를 알지 못하노라 하였느니라
13 그런즉 깨어 있으라 너희는 그 날과 그 때를 알지 못하느니라

 

넷플리스에서 방영 중인 '더 글로리(The Glory)'가 화제가 되고 있습니다. 

그동안 학교 폭력을 다룬 드라마나 영화가 없었던 것도 아닌데, 12부작의 드라마 '더 글로리'가 유독 사람들의 관심을 크게 받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우선은 학교 폭력의 피해 상황과 그에 대한 복수가 같은 시간대에 있지 않다는 점입니다. 잔인한 학폭의 피해자였던 학생은 처절한 고통과 아픔 끝에 성인이 됩니다. 오직 '복수'만을 동력으로 살아왔던 삶이기에 신산하기 이를 데 없는 삶이지만, 어느덧 가해자에게 맞설 힘이 자신에게 생겼음을 깨닫게 됩니다. 복수를 위해 교사가 되고 복수를 위해 바둑을 배우고 복수를 위해 주소지를 옮기는 위장전입을 불사합니다. 그 치밀한 시간표의 끝이 어디일까, 하는 호기심은 이 드라마를 여느 '학폭 드라마'와 다른 지점에 서게 합니다.

 

두 번째는, 피해자가 선택한 복수의 방식이 철저히 '가해자 맞춤형'이라는 점입니다. 극중에서 끊임없이 반복되는 '연진아...'라는 호칭은 동은이의 사적인 복수가 실은 가해자 스스로가 걸어 들어가는 개미지옥이 될 것이라는 서늘한 예감을 하고 있는 것만 같습니다. 여기엔 가해자들의 삶이 '일말의 반성도 없이 현재진행형'이어야 한다는 큰 전제가 필요합니다. 그래서 동은이가 연진이를 만나서 나누는 대화는 흥미롭습니다. "네가 그대로여서 고마워, 연진아."

 

그래서 존경하는 동문으로 연단에 오른 연진이에게 축하의 박수를 보내는 동은이의 모습은 마치 시한폭탄의 버튼을 누르는 것만 같습니다. 드라마 내내 시청자들의 머릿속에는 시한폭탄의 초침이 흘러갑니다. 똑딱 똑딱. 언제 터질지 모르는 폭탄을 바라보는 서스펜스는 이 드라마를 단순한 복수극 이상의 긴장감을 느끼게 해줍니다. 

 

***

오늘 말씀 속에서도 시한폭탄의 '초침 소리'가 들리는 것만 같습니다. 그리고 이천 년 전에도, 그리고 지금도 여전히 우리 주위에는 '가해자'와 '피해자'가 존재함을 느끼게 됩니다. 이 말씀 속의 가해자는 '미련한 자들'입니다. 그 때나 지금이나 가해자들은 당면한 문제 앞에서 자신들의 부족함을 탓하는 법이 없습니다. 오히려 가장 편리한 방법으로 문제를 벗어나려고 합니다. 

 

미련한 자들이 슬기 있는 자들에게 이르되 우리 등불이 꺼져가니 너희 기름을 좀 나눠 달라 하거늘

 

 

미리 기름을 준비한 '슬기 있는 자들'의 행동을 마치 '자신들을 위한 것'처럼 여기는 당당함은 '더 글로리' 속 가해자들의 모습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단지 그들 손에 흉기나 고데기가 없을 뿐입니다. 세상에서 흔히 경험하는 가해자와 피해자의 구도는 다음 구절에서 여지없이 빗나가고 맙니다. 당연히 피해자가 될 줄 알았던 다섯 명의 여인들은 그러나 '슬기 있는 자들'이 되어 스스로 피해자의 자리에 놓이는 것을 적극적으로 거부합니다. 

 

우리와 너희가 쓰기에 다 부족할까 하노니 차라리 파는 자들에게 가서 너희 쓸 것을 사라 하니

 

다섯 명의 가해자들이 '슬기 있는 자들'의 대답에 순순히 수긍했는지의 여부는 알 길이 없습니다. 어쩌면 가해자들이 포기할 때까지 사생결단의 마음으로 기름통을 지켜냈을지도 모릅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할까? 눈앞의 폭력과 고데기에 맞서는 힘은 어디서부터 온 것일까요? 학교 폭력의 가장 비정한 부분은 드라마 속 연진이의 대사에서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너희 같은 얘들은 가족이 가장 큰 가해자인데...."

눈 앞의 고통보다 그 고통을 피할 다른 길이 없다는 것이 학폭 피해자들을 절망의 구렁텅이에 밀어넣습니다. 어떤 구조의 기대도 사라진 곳, 그곳은 '지옥'과 다름이 없습니다. 

 

그러나 누군가 반드시 나를 구원하리라 약속되어 있다면 어떨까요? 가족이든 선생님이든 누군가 피해자의 목소리를 듣고 어떤 방법으로든 그 폭력의 굴레에서 벗어나게 해준다는 확고한 약속이 있다면 어떨까요? 피해자가 피해자의 절벽 앞에 서지 않는 유일한 방법은 절대적인 구원의 소식을 얻는 것뿐입니다. 오랜 시간이 지난 뒤, '영광 없는 복수'를 다짐하지 않아도 되는 유일한 길입니다. 그리고 오늘 성경에선 그 약속을 들은 다섯 명의 '슬기 있는 자들'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고통과 고난은 방향없는 매질과 고데기 앞에 선 희망없는 고통이 결코 아닙니다. 그 약속을 가진 자들이야말로 이 시대를 살아가는 '슬기 있는 자들'일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