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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희 조상의 분량을 채우라

mimnesko 2023. 3. 24. 10:01
마태복음 23:29~39

29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는 선지자들의 무덤을 만들고 의인들의 비석을 꾸미며 이르되
30 만일 우리가 조상 때에 있었더라면 우리는 그들이 선지자의 피를 흘리는 데 참여하지 아니하였으리라 하니
31 그러면 너희가 선지자를 죽인 자의 자손임을 스스로 증명함이로다
32 너희가 너희 조상의 분량을 채우라
33 뱀들아 독사의 새끼들아 너희가 어떻게 지옥의 판결을 피하겠느냐
34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선지자들과 지혜 있는 자들과 서기관들을 보내매 너희가 그 중에서 더러는 죽이거나 십자가에 못 박고 그 중에서 더러는 너희 회당에서 채찍질하고 이 동네에서 저 동네로 따라다니며 박해하리라
35 그러므로 의인 아벨의 피로부터 성전과 제단 사이에서 너희가 죽인 바라갸의 아들 사가랴의 피까지 땅 위에서 흘린 의로운 피가 다 너희에게 돌아가리라
36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것이 다 이 세대에 돌아가리라
37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선지자들을 죽이고 네게 파송된 자들을 돌로 치는 자여 암탉이 그 새끼를 날개 아래에 모음 같이 내가 네 자녀를 모으려 한 일이 몇 번이더냐 그러나 너희가 원하지 아니하였도다
38 보라 너희 집이 황폐하여 버려진 바 되리라
39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제부터 너희는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할 때까지 나를 보지 못하리라 하시니라

 

요즘 언론의 기사들을 보면 혼란스러울 때가 많습니다. 

검찰의 수사권을 조정하는 법안(소위 '검수완박'이라고도 불립니다)이나 한일 간의 정치적 경제적인 협의, 후쿠시마의 원전오염수 방류 및 인근지역 해산물 수입, 선거구 조정 등등 뭔가 전문적인 지식이 좁쌀만큼이라도 있어야 생각을 하든 판단을 하든 할 수 있는 심오한 주제들이 대부분입니다. 때문에 법이나 외교에 전문적인 지식이 없는 저와 같은 사람들은 누군가의 의견이나 해석에 도움을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주위에 그런 분들이 흔하지는 않습니다. '이게 도대체 무슨 말이야?'라고 물을 수 있는 다양한 범주의(의견이 하나일 리가 없으니까요) 법조계의 전문가나 경제 전문가가 주위에 많지 않다는 것입니다. 언젠가 TV의 형사 프로그램을 보다가 문득 그런 생각이 든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내가 지금껏 주위에서 형사를 실제로 만나본 적은 있었나?"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제가 형사나 경찰에 대해 알고 있는 지식의 대부분은 드라마 작가나 교양 작가의 이해 범위 안에 있는 정도이며, 그것은 대부분의 전문분야에 대해서도 거의 마찬가지일 것 같습니다. 그런데 슬픈 일은 그런 '일'이 제 전공분야에서도 비일비재하게 벌어진다는 것입니다.

누군가 대학과 대학원(석사), 그리고 박사 과정을 설명하면서 '넓게-좁게-더 좁게'라고 표현한 적이 있는데 정말이지 깊게 공감이 됩니다. 학위의 수준이 높아질수록 오히려 지식의 폭은 좁아집니다. 따라서 전문가란 "아주 좁은 범위에 대해 조금 더 알고 있는 사람"입니다. 그 범위를 넘어서면 다른 사람들과 다를 바가 전혀 없습니다.

 

신학조차도 그렇습니다. 누군가 신약학 중 마태복음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고 해서 신약 전체를 꿰뚫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구약이나 실천신학은 말할 나위도 없습니다. 그런데 신학대학원 3년 과정을 이수하고 목회학 석사(M.Div)를 받았다고 해서 마치 성경 전체를 꿰뚫고 있는 것처럼 말하는 목사님이 있다면, 적어도 학문의 측면에선,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 중에는 간혹 성경을 100번 읽었더니 영적인 눈이 열려서 성경의 모든 내용을 알게 되었다고 주장하는 분들도 있습니다. 그 열심은 인정할 수 있으나 결론에 동의하기 어렵지요. 수영에 관한 책을 100번 읽었더니 올림픽 금메달을 딸 수 있게 되었다고 주장하는 것과 별 차이가 없습니다. 엄청난 비약이지요. 

 

그래서 최근 언론의 기사들을 읽을 때면 그 행간에 숨겨진 '비약'에 주목하게 됩니다. 기자 역시 해당 분야의 전문가가 아닙니다. 그의 전문영역은 '다양한 전문가들의 의견을 청취'하는 일입니다. 저와 같이 전문분야가 좁아 아는 것이 별로 없는 사람들에게, 어떤 주제에 대한 다양한 진영의 전문가들 의견을 청취하고 사실관계를 잘 파악해서 일목요연하게 전달하는 것입니다. 만약 언론이 어떤 특정한 방향의 해석을 강요한다면, 그건 더 이상 '전문가'의 자세가 아니지요. 성경을 200번 읽었더니 영적인 눈이 열려 스스로 하나님이 되었다는 사람과 다를 바 없습니다. 그걸 요즘 표현으로 '사이비', '이단'이라고 합니다. 이처럼 대중으로 전해지는 지식은 다루기도 어렵고, 조심해야 하는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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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말씀 속 대중들 역시 스스로의 '논리와 비약'에 갇혀 있습니다. 예수님은 선지자들의 잘 꾸며진 무덤 앞에서 과거 조상들의 잘못을 비판하는 사람들의 목소리를 들었습니다.

 

만일 우리가 조상 때에 있었더라면 우리는 그들이 선지자의 피를 흘리는 데 참여하지 아니하였으리라 하니

 

 

과연 그럴까요? 아닙니다. 누구도 자신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엄중히 경고하셨습니다. 만약 적절한 기회와 여건만 주어졌더라면 너희들 역시 너희 조상과 '똑같은 선택'을 했을 것이다. 너희 역시 그들과 다를 바가 없다. 너희는 너희가 정말 알고 있는 것과 알지 못하는 것 사이의 그 깊은 여백을 '논리와 비약'으로 가리고 있을 뿐이다. 너희 조상들은 선지자들에 대해 '죽어 마땅한 사람'이라고 판단했다. 그리고 너희도 그렇게 될 것이다. 너희 손으로 또 한 명의 선지자를 죽일 것이고, 너희 후손들이 그것을 기념할 것이다. 예수님의 이야기는 한 절 말씀속에 압축된 용액처럼 담겼습니다. 

 

너희가 너희 조상의 분량을 채우라

 

일제강점기의 슬픈 역사를 가진 우리가 불과 해방 100년도 지나지 않은 지금, 그 역사를 되풀이하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언론의 기사를 아무리 꼼꼼하게 읽어봐도 '논리와 비약' 역시 그 때와 다를 바가 없습니다. 내가 그 때 태어났더라면 민족의 해방을 위해 싸웠을 것이다, 라고 누가 자신할 수 있을까요? 지금의 비겁함이 그 때라고 해서 다를까요? 지금의 논리가 그 때라고 해서 또 다를까요? 어쩌면 우리 역시 우리 조상의 분량을 채우고 있는 건 아닐까요? 앞서 간 사람들과 다른 한 걸음을 내딛는 일에는 지구의 중력을 거스를 정도의 거대한 힘이 필요한 것만 같습니다. 사순절, 우리가 골고다에 중력을 거스르며 세워진 십자가에 눈을 돌리는 이유가 바로 그것입니다.